의성의태어의 발견
박일환 지음 / 사람in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리와 모양을 흉내낸(?) 말을 의성의태어라고 한다. 어떤 말들은 명확히 소리를 흉내내었고, 또 모습을 흉내냈다고 구분할 수 있지만, 소리를 흉내내었는지, 모습을 흉내내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딱 의성어, 의태어로 구분하기 힘들다.


하긴 어떤 모습이나 동작에서 소리가 날 때도 있고 안 날 때도 있으니 의태어라고 해서 소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의성어라고 해서 모습이나 동작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의성어, 의태어를 굳이 구분하기보다는 그냥 의성의태어로 하자.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세분해도 좋고.


박제천이 쓴 시 '통사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그렇다.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서 전달하려면 부사어가 필요하다. 꾸며주는 말, 일명 수식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말에 어떤 느낌을 더해준다.


그 중 부사어는 가장 쓰임이 많은데, 부사어를 이루는 말 중에 의성의태어는 표현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해준다.


건조한 말이 아니라 무언가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 그런 역할을 바로 의성의태어가 한다. 이 책은 이런 의성의태어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동작, 태도, 말과소리, 동물과 식물에 관한 의성의태어를 소개하고 있고, 그 말들의 어원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또한 어떤 느낌을 주는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의성의태어뿐만이 아니라 우리 말을 어떻게 쓰면 더욱 효과적일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에 기존 사전(주로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 샘을 참조했다고 한다)에서 다루고 있는 방식도 비교해주고 있어서 같은 말이라도 사전 편찬자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 수 있다.


사전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언어들은 사전에 표제어로 수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사전이 더욱 풍부하게 그 말의 어원 및 쓰임들을 각종 예를 들어서 수록해주었으면 한다.


요즘은 종이책으로 사전이 발간되기보다는 인터넷으로 다 찾아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 사전의 수정 작업도 예전에 비해서는 빨라질 수 있고, 또 용량에 제한받지 않고 수록할 수도 있으니 사전을 보면 그 말의 다양한 쓰임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의성의태어를 사전에서 찾아 그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책, 읽으면서 그냥 단순한 사실 전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담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어휘를 알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박제천 시인의 말처럼 꼭 시에서만 부사어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서 부사어를 사랑해야 한다. 그 부사어에 속하는 말 중에 의성의태어는 말맛을 살리는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이우,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섬으로 돌아온 남자 정모,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못하게 되어 남들에게 듣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 판도. 판도를 데려다 키운 이삐 할미.


섬에 사는 주요 인물 넷이다. 이 중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삐 할미를 빼고는 셋. 


섬과 연결된 뭍에 사는 사람으로는 정모의 친구이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둔 태원이 있고, 이우를 정모에게 맡긴 이우의 엄마 연수가 있다. 


태원이 간혹 서술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가 사는 삶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반대의 삶, 즉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모는 모든 일을 접고 섬에 들어온다. 그가 하려는 도서관 만드는 일은 서울에서 하는 활동과는 상관 없다. 그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위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는 이우도 마찬가지다. 


이우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를 얻지 못한 이우는 사고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다.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판도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아예 어린 시절에 혼자가 되어 이삐 할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말을 잃게 된 과정을 보면, 판도 역시 다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정모, 이우, 판도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이때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쪽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태원 역시 다른 삶이긴 하지만 그 삶은 부정적인 쪽으로다. 정모의 말을 빌리면 학창 시절에 말썽피우던 태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거리감을 돌아온 태원에게서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는 돈만 아는 아버지 영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뭍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 섬이기도 하지만 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처를 알아도 그 상처를 더 덧내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생활들.


특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우의 변화가 바로 '섬'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우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 속에서 소설은 '섬'이라는 장소가 주는 긍정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지만, 갈 수 없는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 닿은 섬도 아니지만, 열려 있는 섬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섬'이라는 제목을 지닌 정현종과 함민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두 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종 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이고 함민복 시는 '물 울타리를 둘렀다 / 울타리가 가장 낮다 /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짧은 시다. 하긴 섬이 은 뭍에 비하면 작으니, 섬에 관한 시도 짧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보다는 길어야 하겠지. 이 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정미경의 이 소설에서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서정적 자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을 어느 정도 엿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울타리가 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관계.


우리는 모두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이 시들이 보여주고 있다면, 정미경은 세 인물을 통해서 닫힌 존재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닫혀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그렇다고 쉽게는 갈 수 없는 그런 섬,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계임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아주 먼 섬이 갈 수 없는 섬은 아니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는, 당신이라는 섬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울타리는 길이기도 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민지의 식탁
박현수 지음 / 이숲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식민지의 식탁이라니... 식민지 음식이 따로 있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식민지란 바로 일제강점기를 의미하고, 식탁이란 그 당시 사람들이 조선에서 먹었던 음식을 말한다. 그것도 집에서 먹는 가정식보다는 외식을 할 때 먹는 음식들.


즉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아니라 돈을 주고 먹어야 하는 음식들에 대한 소개라고 보면 된다. 근대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어떤 음식들이 들어왔고, 그것들이 음식 문화로 자리잡았는지를 알려주는 책.


첫 시작을 이광수의 <무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광수의 <무정>. 여기서 샌드위치가 나온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무정>에 나오는 음식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병욱이 영채에게 음식을 준 장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음식이 샌드위치였다는 사실을 어찌 기억하겠는가.


이렇게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문학이니, 소설 속에 나온 음식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식일 수밖에 없다. 또한 소설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이미 사회에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고.


<무정>이라는 소설부터 시작해서 거의 발표된 연대 순으로 음식들을 등장시킨다. <무정>에 이어서는 염상섭이 쓴 <만세전>이다. 물론 예전에 읽었을 때는 음식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책을 통해서나 이인화가 먹게 되는 음식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무정>이나 <만세전>에 나오는 음식은 여행하면서 먹는 음식이다. 기차라는 근대 문명의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끼니를 해결하는 음식들. 그만큼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서 제국주의는 철도를 부설하고, 기차를 운용했으며, 그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또 기차와 기차를 연결하는데 바다로 막혀 있으면 배를 이용해서 연결을 시키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개발하게 된다. (관부연락선이라는 말이 바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의 철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배를 의미한다고)


낯선 음식이었을 것이다. 기차라는 문물도 낯설었을테니.. 그러다 이런 문물이 일상이 되면서 다른 음식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가게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로 가게 된다. 현진건이 쓴 <운수 좋은 날>이다. 바로 설렁탕이야기. 지금도 많이 먹는 설렁탕이니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을 듯하지만 아니다. 설렁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읽을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왜 하필 현진건이 김첨지 아내를 통해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영양이 좋아 보양식으로 많이 먹었다는 사실.


이제 책은 선술집, 카페, 빠에 대한 이야기로 가다가 김유정으로 오면 시골 주막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감자'도 빼놓지 않고. 


30년대가 되면 서양식이 소설에 나오기 시작한다. 카페는 기본이다. 이상이 '제비'라는 카페를 차렸다는 사실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상과 친구인 박태원이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로 '카페'를 선택했다는 사실. 이상도 선술집을 무척 좋아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서 언급된다.


여기에 <날개>에 나왔던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파는 음식들 이야기가 나오고, 조선호텔에서 파는 음식들까지 다양한 일제강점기 시대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서 당시 어떤 음식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것들의 가격은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당시 발표되었던 소설을 만나게 되고, 그 소설을 통해서 음식을 만나게 된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이 외식으로 먹었던 음식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소설과 음식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미경 소설집을 읽다. 7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공통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소설이란 원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아니던가. 그러니 삶에서 겪음직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서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욕망?' 무엇에 대한 욕망일까? 다양한 욕망이 있겠지만, 우선 '돈'에 대한 욕망을 꼽을 수 있겠다.


돈이라는 말, 자본이라는 말, 어느 정도는 생계에 꼭 필요한 돈. 이 돈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대부분 돈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돈'은 어느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더 많아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를 욕망으로 바꾸어보자. 욕망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이룰 것을 다 이루었노라 한다면? 그 다음 삶은 어떤 모습을 띨까?


'너를 사랑해, 들소,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돈을 매개로 욕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안정된 자리를 잡지 못해서, 돈 때문에 위기 상황에 처한 자산관리사와 여전히 시간 강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그것이 너를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또다른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바로 '돈'이다. 자신들이 바라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돈'.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욕망을 실현시키려 하지만, 과연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들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쩌면 욕망의 크기 앞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는 그런 관계. 이런 관계의 뒤틀림이 '들소'라는 소설에서 잘 나타난다.


조각가. 예술가다. 돈하고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인공이 남편과 갈등을 하는 이유는 돈에 있다. 자신의 일을 돈과 관련지어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상적인, 사회사업가라 할 수 있는 남편에게 반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는 그 점이 바로 싫어지는 이유가 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돈을 위한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사회사업을 한다고 하지만, 그 사회사업에는 '돈'이 필수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별이든 죽음이든.


소설 속 남편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다. 다만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찾는다면 다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들소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동물. 여기서는 이제 '돈'은 개입하지 않는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때 예술은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돈'에 얽힌 이야기는 '내 아들의 연인'으로 넘어가면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된다.


가난한 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관계가 문제가 된다.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 대 관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차이, 그 사람을 욕망하지만, 그 사람이 지닌 관계는 용납할 수가 없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이 적확한 것이 개인으로서 만났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의 테두리에 개인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지니고 있는 관계들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고, 또 내 욕망의 테두리가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관계의 테두리로 확장하면 그 개인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에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집단이 서로 다르면 어울리기 힘들어짐을 '내 아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욕망의 끝을 보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니 욕망의 끝을 본 다음에는 더 이상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바로 '밤이여, 나뉘어라'다.


늘 내 앞에 있던 존재, 천재라고 불리던 친구가 몰락한 모습,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 역시 내 욕망의 끝을 보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의 몰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 친구 역시 아마도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결국 순간이여 멈추어라 하고 말하는 순간, 사람의 삶은 끝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욕망해야 한다. 인간이 용납할 수 없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 그러니 돈을 위해서 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관계의 파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맹목적인 이상 추구 역시 파탄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않아서도 안 된다. 욕망이 없는 상태, 이를 갈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삶이 무의미해진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처럼. 


결국 이 소설집을 읽으며 어떤 욕망을 지녀야 하는가? 욕망이라는 말이 부정적이라면 어떤 갈망을 지녀야 하는가로 바꾸면 된다.


다양한 내용의 소설들이지만, 돈에 대한 욕망이 결코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과 욕망(갈망)을 상실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갈등들이 얽혀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의 제왕 - 전6권 세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읽어봐야지만 하다가 미루고 또 미뤘던 소설. 반지의 제왕. 영화를 먼저 보아서 그런지,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러다 영화와 소설이 같지 않음을, 서로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옴을 알고 있으면서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톨킨의 이 작품을 르 귄이 엄청나게 칭찬하고 있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사서 소장하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예전 판본이다. 예전 판본답게(?) 글자도 작고 빽빽하다. 눈이 피곤하다. 게다가 6권이나 되지 않나.


1부, 2부, 3부 각 2권씩.


오랜 시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읽다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물론 읽으면서 영화에서 받던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와 다른 점을 찾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점은 호빗 족의 나이다. 프로도를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영화에서 호빗들이 작은 키로 나오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소년의 모험이 아니다. 호빗의 나이로 프로도는 50이 되어서야 모험에 나서게 된다. 


함께 모험에 나서는 샘이나 메리, 피핀 역시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고. 하지만 나이가 중요하랴? 자신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가 다른 공간을 여행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성장소설의 구조라고 해도 좋다.


환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와 환상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중심이 된 세상만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을 이루지 않고 살던 시대,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을 떠나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한다.


그래서 엔트 족들이나 요정들의 이야기를 그냥 환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제는 자연과 소통을 할 수 없게 된,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1기, 2기, 3기라고 시대를 구분하고 3기가 반지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 반지의 시대는 아직 인간이 자연과 분리가 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지의 시대가 지나면 인간의 시대가 되고, 자연은(요정이나 엔트와 같은 다른 존재들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동물들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장면, 인간이 철(총)을 이용해 신을 죽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톨킨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죽이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중심인 시대로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


반지를 운반하는 사명을 띤 프로도, 그를 수행하는 샘, 그리고 같은 호빗족으로 프로도와 함께 하겠다는 메리와 피핀, 여기에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아라고른(영화에서는 아라곤으로 나온다)과 요정 레골라스, 난장이 김리 그리고 보로미르. 이들을 인솔하는 마법사 간달프.


이야기는 단순하다. 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조력자들과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고, 어려움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은 반지를 없앤다. 


단순히 이렇게만 판단할 수가 없음을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반지를 운반하는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빌보가 쓴 이야기를 프로도가 이어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모험이 이야기로 전승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로도는 책을 끝내지 않는다. 책을 끝낼 사람은 샘이다.


프로도가 끝까지 반지를 운반하는데 함께 했던 충실한 조력자 샘. 샘은 호빗 마을에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끝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의 삶으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샘의 말로 끝난다.


"자, 내가 돌아왔어."(6권 228쪽)


소설은 위대한 여정을 끝난 인물들의 위대한 삶으로 끝나지 않는다. 혁명은 위대함을 넘어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때 완성된다.


파괴된 것들의 재건. 일상성의 회복. 여기에 영웅은 퇴장해야 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로도로 끝맺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샘에게 다음 이야기는 샘의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이 된 아라고른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마법사인 간달프도 또 반지 운반자였던 프로도도 모험의 시대가 끝났을 때 물러나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모험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일상의 회복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 그런 모습이 일상이 된 사회여야 한다고 톨킨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그들의 모험은 일상에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샘이 자신이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소설을 끝맺을 수밖에 없다.


반지를 없애고 사우론을 퇴치하면서 소설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호빗으로의 귀환. 그리고 호빗에서의 또다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일상이 회복됨을 보여주고 있어서 더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어보면 될 것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로이카 2023-07-2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밤의 언어>에서 르 귄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톨킨을 알게 된 사람들을 부러워 한다고 고백했었지요. 르 귄의 <반지의 제왕>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kinye91님이 읽으신 것을 몇 년 후에 읽고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 <반지의 제왕>도 몇 년 뒤에는 읽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kinye91 2023-07-29 13:22   좋아요 1 | URL
에로이카 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르 귄의 말을 조금 바꾸면 저는 조금 더 젊은 시절에 르 귄의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도 또 다른 글들도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고요. 저 역시 르 귄이 말한 작품들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