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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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이미 시작된 기술변혁의 시대에 뒤따라가기만 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적어도 이미 변하는 시대라고 인식했다면,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현대는 스마트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에 든 그 작은 기계가 우리들 삶 전반을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결제도 현금으로 하지 않는다. 현금의 시대가 카드 시대로 넘어간 지 오래지만 이제는 카드 시대로 저물어 가고 있다. 그냥 핸드폰 하나면 다 된다.

 

심지어 자신을 인증하는 것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핸드폰으로 인증을 하게 된다. 주민등록증을 제시해도 인증을 하지 못해 물건을 구입 못할 때도 있다. 핸드폰이 없다면. 그만큼 우리들 생활에서 핸드폰은 사치품,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핸드폰을 이용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원격수업을 하는데, 컴퓨터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한다. 언제 어디에서고 핸드폰만 있으면 학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더더욱 필요해진 것이 핸드폰이다.

 

실시간 수업을 하는 것도 핸드폰으로 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보수적이라는, 시대가 변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하기 시작하는 교육에서도 핸드폰은 이미 대세가 되고 있다. 핸드폰 소지를 아무리 금지해도, 학생들은 몰래몰래 들고 다닌다. 핸드폰을 걷어서 보관하고 방과 후에 준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공기계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핸드폰을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학교는 뒤처져 있다. 핸드폰에 관한 온갖 규제들이 학생들을 얽어매고 있는 상황. 그나마 코로나19로 인해 핸드폰이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도구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책 최재붕 교수의 '포노 사피엔스'는 이런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규제가 여전한 우리나라에서 이대로 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나라들은 이미 스마트폰을 이용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규제가 심해 많은 부분에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미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우리들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부터 금융까지, 심지어는 사교까지.

 

그러니 이런 현실을 읽고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 이미 전세계는 이쪽으로 가고 있다. 이게 기반한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 온라인 플랫폼이 미국이나 중국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그만큼 우리는 오프라인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라.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광통신망과 거의 모든 국민이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인해 대응을 즉각적이고 적절하게 할 수 있었다.

 

아직 빅데이터를 활용하지 않고 있지만, 방역부분에서는 이런 빅데이터를 이미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레 방역을 통해 스마트폰을 활용한 활동들이 우리들 삶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들 삶의 방식을 바꿔가고 있다.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 부분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시대를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런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최재붕 교수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람이 기계에 종속되는 삶이 아닌, 더 여유를 가지고, 좀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반으로 스마트폰 시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인류를 만났다. 그런 포노 사피엔스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를 잘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변화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는 사람 이 책을 읽어보라. 왜 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스마트폰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스마트폰이 주가 아니라 사람이 주라는 것. 사람을 위해서 스마트폰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을 위한 세상을 위한 기반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포노 사피엔스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러모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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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3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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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마워 하면서 더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금 우리나라를 보자. 3D업종이라고 하는 데에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고마워 하는가? 아니면 없는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하는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전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결혼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역시 차별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오랜 전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도살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 먹기 위해서 북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양수척, 화척, 재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살게 했다. 함께 살게 했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차별이었다.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회에서 격리해서 그들만의 공간에서 지내게 하는, 자신들은 그들이 생산한 물품과 잡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고, 멸시했다. 그것이 고려 시대에 동물을 도축하는 과정이 이랬다고 서긍이 전한다고 한다.

 

잡을 때는 먼저 네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넣고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가르는데 위장이 다 끊어져서 똥과 오물이 흘러넘친다. 따라서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서긍, <고려도경> 권23 '도축' (140쪽)

 

이렇게 고기조차도 제 맛을 모르게 먹던 사람들이 백정들의 도움으로 제대로 맛을 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워 해야 하는데, 그들을 오히려 천시하고, 자신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조선시대에는 군대조차도 소를 잡지 못했다니 하니 그 한심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수척, 화척, 재인 등등은 백정으로 용어가 통일된다. 일반 백성으로 대우하겠다는 의도로 백정이라는 말을 쓰도록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멸시받는다. 하다못해 노비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

 

소는 그냥 짐승이 아니라 극락의 태자.

그러므로 소를 잡는 일은 극락에 가고자 도를 닦는 일이다, 따라서 소를 잡는 백정 또한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믿음은 백정들에게 하나의 구원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도 그냥 부르지 않고 하늘나라 왕자라고 소 우牛를 붙여 '우공태자'라 불렀다. 소를 잡는 칼도 영험한 칼로 여겨 소중히 대했고, 소를 잡기 전에는 늘 몸가짐도 정결히 했다. ... 백정들은 하늘에 오르면 왼쪽이 극락이, 오른쪽에 지옥이 있다고 믿어 왼쪽을 특히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소를 잡을 때도 왼손만 썼다. (151쪽)

 

천시받던 그들의 대표적인 예가 중종반정에 참여한 당래와 미륵이라는 사람이다. 특히 당래는 벼슬까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 결국 다시 강도짓을 하게 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공신이 되어도 또 벼슬을 해도 백정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천시받던 백정들이 가끔 집단적으로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이 되는 것은 일제시대에 벌인 '형평사'운동이다.

 

이 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강상호의 이야기를 통해서 백정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양반임에도 백정들의 권리를 위해 평생을 살았던 강상호. 그가 받은 멸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의 백정들이 와서 그를 저세상으로 보낼 때의 모습을 보면 강상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상호와 같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평등이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을 추구해야 함을 백정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 지금 우리 시대에 '백정'들은 없는가? 주위를 살펴보라. 우리 주변에 아직도 '백정'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런 차별을 바꿀 수 있는 행동. 그것이 사회를 조금 더 평등한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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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폭풍의 시대 - 치명적 신종, 변종 바이러스가 지배할 인류의 미래와 생존 전략
네이선 울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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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우리 인류는 앞으로 우리에게 판데믹(팬데믹이라고도 한다)이 여러 차례 올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냥 당장 닥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기에 들어가는 돈의 몇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투자만 하고 있었을 뿐.

 

그 결과가 무엇인가? 현재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판데믹이 올 거라고, 그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결과가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비극이다.

 

판팬데믹을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 잠시 통제가 풀리니 수천 명이 모여서 몸을 부딪치며 즐기는 현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코로나19를 말하는 모습. 마스크가 중요함에 대해서는 더이상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데도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어떤 대통령.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판데믹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겪지 못한 질병이 나타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다. 그러다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공포에 빠지고, 정치권은 어떤 대응책도 내놓지 못한다.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란 기껏해야 봉쇄다. 격리과 봉쇄. 그러나 헌신적인 의료인들이 나타난다. 의료인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질병은 점차 사그러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질병은 사라진디. 퇴치된 것이 아니라.

 

이런 공식이 되풀이 된다.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비슷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런데도 우리는 기존에 겪었던 감염병들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냥 대응방식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련되어졌을 뿐. 그 질병을 예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또다시 판데믹을 겪고 있다.

 

판데믹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한다. 현대는. 우리들 편리한 생활이 감염병을 순식간에 퍼뜨릴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도로망의 확충, 교통수단의 개발, 장기이식과 수혈을 할 수 있는 의학기술, 생태계 파괴 등등이 이런 조건이다. 우리가 빨리 세계 전역으로 갈 수 있듯이, 우리들과 더불어 세균과 바이러스들도 세계 전역으로 빠른 시간 안에 퍼져 간다.

 

그리고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하고 무분별한 동물고기 섭취로 인해 동물이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우리 몸에 들어온다. 이것들이 변종을 일으켜 사람 간에 전염이 되는 순간, 판데믹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네이선 울프가 쓴 이 책,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네이선 울프는 판데믹을 예방하기 위해 기구를 조직하고 그에 대한 활동을 하고, 또 수많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판데믹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 우리에게 다가올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이런 경로를 거쳐 판데믹을 유발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은 인간과 돼지와 조류가 동거하는 농장에서 재편성될 수 있다. 돼지는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받아들일 수 있고, 철따라 이동하는 철새들을 비롯하여 온갖 조류의 바이러스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철새들은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를 통해 직접 혹은 간접으로 돼지를 감염시킬 수 있다. 조류에서 옮겨진 새로운 바이러스가 돼지와 같은 가축의 체내에서 인간 바이러스들과 서로 영향을 미칠 때 예상되는 결과 중 하나가, 인간 바이러스의 일부와 조류 바이러스의 일부를 지닌 완전히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자연항체로도, 그리고 과거에 유행한 인플루엔자 계통의 백신으로도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 217쪽.

 

인간과 동물, 특히 야생 포유동물의 긴밀한 접촉에서 새로운 판데믹이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상적인 예측 시스템이 완성되기 전이라도 이런 형태의 접촉을 줄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방식을 바꿔가야 한다. 319쪽.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320쪽.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321쪽.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무엇하고 있었나 싶다. 도대체 인간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꾸준히 이야기되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모르쇠로 일관해 오다니...

 

코로나19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런 전조는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 네이선 울프와 같은 사람이 계속 판데믹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을 뿐더러, 더 빨리, 더 많이 이동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냈고, 또 더 많은 동물들과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가. 또 너무도 많은 야생동물들의 생활터전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게 하고, 또 그들을 잡는 과정에서, 또 날것으로 먹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인간에게 없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인간의 몸으로 옮겨놓지 않았던가.

 

그렇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 나올 것이다. 치료제도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또다른 바이러스들이, 박테리아들이 우리를 판데믹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감염병을 단지 치료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다른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생활방식. 그것이 필요하고, 거기에 대한 전세계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293쪽에 보면 이 책은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읽은 책은 2015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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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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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저자인 호사카 유지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반일 종족주의'라고 폄하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일본 극우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와도 같다. 필자는 '노예근성'을 되풀이하는 이영훈의 논리와 글이 한국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자는 그 우려스러움을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본서를 썼다.' (33쪽)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는 서울대를 나온 인간들이 - 하긴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이고 그 대학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대학이었으니,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사람들 가운데 일본에 빌붙어 출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한답시고, 일본 극우세력과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그런데도 이들이 하는 주장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큰소리를 내고 있는 현실이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가 있고, 발표의 자유도 있으니,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서 발표 당사자가 부끄러워서 차마 발표를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들어 반박해야 하는데...

 

안다는 것. 그것도 제대로 안다는 것이 필요한 지금 시대다. 우리나라 극우는 일본 극우와 통한다. 주장도 비슷하다. 많은 자료 중에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자료만 쏙쏙 뽑아 인용하면서 주장한다. 전체적인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그 자료들에서 입맛에 맞는 말들만 뽑는 것은 학자의 양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학문 윤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은 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도 서울대를 나와 서울대 교수를 했다는 사람들이 할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나 역사학과 교수들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서울대 출신들이 이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이런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이 책을 통해서 반일 종족주의자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에 이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책을 읽은 셈. 호사카 유지 교수가 제시하는 근거도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제시하는 근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 이유는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들이 전거로 삼은 책이나 자료를 정독하고, 그 자료들에서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하는 근거를 찾아내면 효과적인 반론이 되기 때문이다. 두 책은 그런 점에서 성공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네 칼로 너를 치리라인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이 인용한 책에서 누락한 부분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고, 그들이 누락시킨 내용이 그들 주장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같은 자료인데 주장이 달라지는 것이다.

 

누가 옳은가? 그것은 자료를 정확하게 인용한 사람이 옳을 확율이 높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는 사람보다는.

 

'강제 징용, 군 위안부, 독도' 세 분야에 대해서 반일 종족주의자들이 얼마나 자료를 왜곡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왜곡만이 아니라 이들은 의도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짜깁기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주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어서 어떤 근거로 반박하고 있는지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같은 자료를 인용하는데 주장이 확 달라질 수 있음을, 학자라는 명함을 걸고 자료를 왜곡할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잘 보게 된다.

 

일제강점기라는 말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식민지였음이 분명한 시기를 우리가 거쳤는데,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식민지 시대라고 해서 다 못살고, 모두가 힘들게 산 것은 아니다. 식민지 권력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도 많으니... 하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시대는 미화될 수가 없다. 식민지 시대는 인류가 거친 불행한 역사이고, 청산해야 할 역사이며 되풀이 해서는 안 될 역사인 것이다.

 

철저한 반성이 따라야 한다. 사죄하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도 모자라는 것이 식민지를 만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이 큰소리 칠 일이 없다. 자신들은 충분히 용서를 구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제국주의다. 책임 회피다. 그런데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에서 그 나라 최고 학부를 나와 그 학교 교수를 했다는 사람이 제국주의 국가를 운영했던 자들과 같는 논리를 펼친다는 것, 그런 것이 학문의 자유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학문의 자유에 앞서 학문의 윤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료를 취사선택해서 왜곡하고, 견강부회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이 하는 일이 그렇다. 그들이 어떻게 자료를 비틀었는지,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와 [신친일파] 이 두 책을 읽으면 잘 알게 된다.

 

알아야 대응을 한다.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어야 이런 엉터리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지 않는다. 아니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부끄러워서. 역사는 해석이라지만 이때의 해석은 자료를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게 골라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호사카 유지, 이제는 한국인이 된 일본인. 그가 이런 책을 쓴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두 나라가 다 소중한 나라일테니. 그가 태어난 나라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극우 집단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것이고, 스스로 선택한 나라에서는 일본 극우파를 따라하는 집단들이 큰목소리를 내는 것이 안타까울 것이다. 그런 것이 그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을 것이고...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반일 종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버젓이 나오고 있음에 부끄러워 해야 한다. 더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더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게 우리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친일파들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음을 호사카 유지가 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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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반일 종족주의> 비판
김종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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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민족적이다.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는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는가? 그 점에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 친일파에 관한 문제에서는.

 

[반일 종족주의]를 쓴 저자들이 '반일 민족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들이 보수를 자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에게는 반일을 통한 민족주의를 비판적 의미로 쓰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반대해서 똘똘 뭉친다고 한다. 합리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냥 싫다는 이유로 뭉치는 것, 이것이 종족주의다. 그러니 이런 종족주의에는 보수든 진보든 그러한 이념이 작동하지 않는다.

 

종족주의는 우생학과도 연결이 되고 혐오 감정과도 연결이 되며,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배제의 원리만이 존재한다. 유럽에서 이런 종족주의가 심하게 발현된 것이 바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다. 유대인이라는 종족에 대해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으려 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러니 제목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붙인 것은 바로 이런 유대인에 대한 혐오, 탄압들이 잘못된 것이었듯이, 일본에 대한 반감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려고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제목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이 보수임을 드러내면서 그것에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장치가 바로 '민족주의'라는 말 대신 '종족주의'란 말인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와는 다르다. 물론 다른 민족을 대타로 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이념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민족만큼 다른 민족도 인정해 줄 때 제대로 된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반대한다.

 

그렇다면 [반일 종족주의]란 말 자체는 이미 문제가 있다. 정당한 비판을 종족주의라는 틀에 가두고, 합리적 비판을 비합리적 비판으로, 맹목적인 비판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논거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친일 청산에서부터, 위안부 문제, 징용 문제, 독도에 관한 영유권 문제, 그리고 일제 강점이 우리나라를 근대화 했다는 논리까지 [반일 종족주의]에서 주장한 것을 근거를 들어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을 친일파라고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가 왜 잘못인지를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다.

 

어차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어떠한 논리에도 설득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했던 일본을 우리나라를 도와준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 앞에서는 논리가 잘 작동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설득할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읽을 만한 사람이 그에 대해 비판하는 책도 읽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라고 의문을 지닌 사람들에게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하나하나 비판하는 것, 이 책은 그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있다. 그래서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어떻게 자료를 이용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굳이 [반일 종족주의]를 읽지 않아도 이 책을 읽으면 그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어떻게 자료들을 곡해하고 있는지, 또 통계를 어떻게 악용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여기에 더해 그들이 일본의 극우세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들의 이런 움직임이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극우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누구나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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