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 인디언에게 배우는 자유, 자치, 자연의 정치
박홍규 지음 / 홍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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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놀랍고,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들고, 설마? 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지... 수긍도 하다가,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하다가, 아냐,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하면서도, 그래도? 뭔가 미심쩍어 하면서 읽었는데...

 

민주주의의 원형을 우리는 흔히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는데, 이 책에서 박홍규는 민주주의의 원형은 인디언 사회에 있다고 한다.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에서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많고, 그들의 피부색과 우리들의 피부색이 비슷해서 우리는 어쩌면 같은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도 수긍을 하지만, 서양의 민주주의,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가 영국이나 유럽의 민주주의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인디언에게서 배운 것이라니...

 

이렇게 파격적인 주장을 할 수가 있나,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으로 읽어 갔다. 인디언들에 대해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한 생각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렇게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그들에게서 연원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아서 흥미도 있었지만 반신반의 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책 내용에 점점 더 빠져들어가게 된다.

 

법학자답게 근거를 들어서, 특히 사회계약이라든지 법률 쪽에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읽다 보면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어가면서 기존 지식이 무장해제된다. 기존에 내가 지니고 있던 생각이 서양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이래서 교육은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여 지도자라고 하여도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수 없으며, 지도자이기 때문에 개인의 재산이나 권력을 축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고, 그래서 그들은 작은 집단끼리 자치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자치를 바탕으로 하여 서로 연합하는 연맹체의 제도를 마련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은 사실은 침략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이들의 침략으로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자유롭게 자치했던 인디언 사회가 멸망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번은 들어보았던 이름, 라스카사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줘 같은 서양인이지만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가 콜럼버스와 라스카사스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이방인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이 라스카사스는 영화 '미션'의 모델이라고 보면 된다. 주인공과 신부 둘 다 합친)

 

이들이 이렇게 자유와 자치를 중심으로 자연과 함께 하는, 그렇다고 자연에 매몰된 삶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 그리고 남녀 평등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유럽의 법률에도 인디언 사회의 제도가 많이 반영이 되었다고 법률적 조항들을 예로 들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인디언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자유ㅡ자치의 모습인 '호데소노니 연방회의'는 가장 적절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미국의 연방 헌법이 이 '호데소노니 연방회의'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저자는 미국의 헌법 학자들은 이를 믿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는 페인, 제퍼슨, 프랭클린의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쳐가고 있다.

 

미국의 연방 헌법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보다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방향이 중요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호데소노니 연방 회의'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미국의 초기 학자들, 정치가들이 인디언들과도 잦은 접촉을 했을테니, 이를 몰랐을 리 없고, 영국으로부터 독림하여 자신들의 헌법을 만들 때 참조했을 가능성은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거의 영향력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이 이미 오래 전에 실시했던 그러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의 연설문이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특히 이 구절, 정말 지겹도록 외웠던, 그러나 잘못 생각하면 국가주의로 머물 수만 있는 그런 구절인데.. 이 구절을 아니키 민주주의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네디가 워낙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대통령이고, 그의 연설문은 영어로 또 번역본으로 많이 읽히고 있으니...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어 주십시오.

친애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다 같이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주십시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으라는 얘기는 국가만 바라보면서 국가가 국민들을 위해서 어떻게 복지정책을 펼치를 바라만 보지 말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 각자가 자유롭게 노력해서 국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말로 바꿀 수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오로지 중앙정부만 바라보면서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우리 자신들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치적으로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가자고 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게 바로 우리가 요즘 말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다.

 

그러니 이것은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제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율, 자치, 협동의 삶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 이것이 아직은 국가를 없애기는 힘들지만 국가와 함께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에게 배우는 민주적 아나키즘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국가를 위해라는 말에서 국가란 존재하는 실체라고 보기보다는 자치적인 삶들의 총합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케네디가 이런 뜻으로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가는 개인들 위에 군림하는 리바이어던이 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라는 말은 개인적이고 자치적인, 자율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뒷구절은 그대로다, 강대국을 바라보지 말자. 세계의 시민들은 각자가 인류의 자유를 위해,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먼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실천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럴 때 세계 연합이 성립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국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G2니 뭐니 하면서 강대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아나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 자치적인 집단들의 연합, 이것이 오래 전부터 인디언들이 실천해왔던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나키 민주주의라는 점.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아나키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실현되었던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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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고함 - 130여 년 전 한 아나키스트의 외침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홍세화 옮김, 하승우 해설 / 낮은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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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에 나온 글이라고 한다.

 

'상호부조론'으로 잘 알려진 크로포트킨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짧막한 글이지만 한 세기도 더 전의 글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도 맞는다.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은 이 소책자를 읽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29쪽)

 

이 말로 시작하는데, 이 시작 부분을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의 청년들 중에서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책을 읽으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 청년들이 사회에 관심이 있을까? 이건 크로포트킨이 생각하는 것 하고는 다른데, 그는 사람들을 믿었는데, 그 믿음으로 협동, 상호성, 자치를 이야기했는데...

 

왜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했을까?

 

아마도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기 전에(일제시대에는 일본어로 발간이 됐을 거라고 추측을 하는데... 이 책의 앞부분에 홍세화의 글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일본어로 된 이 글을 읽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고, 일제시대에 크로포트킨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가 되었으니) 우석훈이라는 경제학자가 유행시킨 책 "88만원 세대"에서 '그는 청년들이여, 토플 책을 버리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했는데, 그 반향이 미미했으며, 그 다음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인 노혁명가인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가 출판되어 엄청나게 읽혔음에도 변화는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신자유주의(나는 이게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데)의 광풍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서로 단결하기보다는 각자 살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능 수시시험장 풍경을 보라. 대학에 입학하려는, 이제 성인이 되려는 학생들이 대학에 시험을 보러 오는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온다는 사실. 그래서 수시 시험날이 되면 학생 반 부모 반인 풍경이 펼쳐지는 우리나라 대학가 풍경.

 

도대체 성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십대의 끝에서 그들은 아직도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청년들은 늙었다기 보다는 어리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늙었다. 대학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그 불안한 마음에 부모를 대동하고 시험장에 오는 모습, 그것은 젊은이의 모습이 아니라 실패는 곧 끝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 늙은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은 학교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들은 소리는 대학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전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이 그랬기에 그들의 늙음을 탓하기 전에 그렇게 만든 우리를 반성해야한다. 또 소수이긴 해도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들도 있고,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두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청년들은 이미 크로포트킨이 하려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소수의 행동을 돌출행동으로 보지 않고 청년들이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연이 당연이 아닌 돌출이 되어 버린 사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이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앞에 놓은 첫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입니다.'(29쪽)

 

'그동안 쌓아 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청년의 의무이자 권리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권리,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의무.

 

이 다음에 그는 의사가 되려는 청년, 법조인이 되려는 청년, 엔지니어가 되려는 청년, 교육자가 되려는 청년, 학문에 전념하려는 청년, 노동자가 된 청년, 노동자의 가족인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다.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에게는 그 위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어야 바람직한지, 개인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공부를 하게 해준 사회 각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지낼 생각을 하라고 당부한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일, 그것은 이 글을 시작할 때 홍세화가 자신이 평생동안 다짐했던 것 중에서 지켜왔다는 '장교가 되기 보다는 사병이 되자'는 말. 남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당부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남보다 좋은 조건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 남보다 좋은 위치에 올라 남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무엇이 함께 사는 길인가?를 고민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는 그의 당부.

 

이것이 어찌 130년 전만의 일이겠는가. 이런 당부는 지금 우리의 청년들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크로포트민의 글이 워낙 짧은 글이라 책으로 내기 위해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부분에 홍세화의 글. 이것은 우리나라 상황과 또 그가 겪은 상황과 연결지어 읽으면 더 좋고,

 

그 다음에 크로포트킨의 글... 많이 생각하면서 읽으면 되고, 이것이 단지 신체적 나이의 청년들이 아닌, 세상이 올바르게 바뀌기를 꿈꾸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모두 청년들이라 할 수 있으니, 마음이 늙지 않은, 아직도 좋은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것이고, 특히 교육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고 적어도 이런 글이 있다는 얘기를 중고등학생에게 해줬으면 좋겠다.

 

마지막 부분은 하승우의 크로포트킨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으리라.

 

이런 외침을 들은 청년들이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여기에 나 역시 늙지 않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내가 설 자리를 잘 찾아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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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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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

 

나도 이 사람의 책을 두 권이나 읽을 정도이니(제3의 침팬지, 총·균·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의 장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읽어도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쓰고, 가능한 한 자료들을 모아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것.

 

그래서 책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본인은 자료들을 발췌해서 책을 냈다고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보다 두 배는 두껍다.

 

무려 680쪽에 달한다. 주나 보충설명까지 더하면 700쪽이 넘는다. 사람들이 읽기에는 우선 분량에서 질린다. 그럼에도 읽기 시작하면 잘 읽힌다.

 

숱한 예화들과 구체적인 자료들이 제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세계다.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자신이 조사할 수 있는 대상을 조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책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직접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지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글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는 지구화, 세계화 되어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삶을 어제까지의 삶이라고 하고 살펴본 책이 이 책이다.

 

왜 어제까지의 삶일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 인류의 발생초기에 살았으리라 추측되는 삶들을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현대문명을 만나지 못해 예전 방식 그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왜 '까지'냐면 이제는 그런 삶을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존재한다. 국가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국가는 간섭하고 통제하고 교화하려 한다. 또 그들 역시 현대 문명을 접하고는 현대 문명을 동경한다.

 

어제까지처럼 산다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과 굶주림과 위험에 처해 있는 삶이라는 얘긴데, 현대 문명은 이들을 없애버리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에 이들은 어제에서 나와 오늘을 살려고 한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이제는 사라져 버릴 세계. 그러나 어제란 오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늘에 살아남지 못하는 어제는 어제로 기억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세계는 오늘의 세계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된다. 오늘의 세계를 더 잘 살게 해주는 안내서가 된다.

 

하여 이 책은 과거의 삶을 사는 소수 민족을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 삶에서 지금 우리가 들여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과거가 암울했다고 해서 과거를 통째로 잊자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빛과 어둠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의 어둠은 제거하고, 빛을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식생활이다. 또 친밀감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식생활로 인해 고혈압, 당뇨병 등 온갖 성인병이 난무하는데, 우리가 살아온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는 이런 식생활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우리의 유전자는 지금의 식생활에 견딜 수 있는 몸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그래서 저염식, 채식 위주,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는 어제까지의 세계가 습관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말.

 

또 서로의 얼굴을 보며 집중하면서 이야기하는 태도. 그리고 아이들을 업을 때 업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게 업는 것, 또 함께 자는 것 등등. 그리고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는 것.

 

여기에 무엇보다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건설적 편집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심하는 태도.

 

안전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어제까지의 세계의 모습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은 사라지겠지.

 

방대한 분량에 비해서 결론이 너무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정답은 늘 가까이에 있는데, 그걸 멀리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어제까지의 세계는 바로 오늘의 세계와 맞닿아 있고, 어제까지의 세계가 우리에게 내일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미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존재했었고, 오늘에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오래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 다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도 말한다. 과거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무조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충분히 우리 눈 앞에 좋은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계속 유지하자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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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의 재구성 -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
브루스 액커만 외 지음, 너른복지연구모임 옮김 / 나눔의집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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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허경영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래도 한 때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 그는 갖가지의 기행으로도 유명한 사람인데,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 내건 공약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허황된 소리를 한다고 했었다.

 

그의 공약 중에서 위키피아에 있는 것 몇 가지만 보면 지금 보아도 앞서가도 너무 앞서 갔다.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수당 매월 70만원씩 지급

결혼수당 남녀 각 5000만원씩 지급 (재혼 제외)

출산수당 출산시마다 3000만원씩 지급

 

이것이 그의 공약 중 유명해진 것들이다. 다 복지에 관련되는 것들인데,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75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만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것을 앞서 간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 수당은 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출산수당은 이야기되고 있지만, 결혼 수당은 아직(몇몇 지자체를 제외하고는 실시하고 있지 않다. 여행 다니다 어느 동네에서 플래카드에 결혼을 하면 결혼 장려수당으로 얼마를 준다는 내용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이야기가 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 때는 저런 미친 사람, 하고 손가락짓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무상급식이라 불리는 의무급식이 시행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누리교육과정을 나라에서 책임지겠다고(말로는 그래놓고, 지자체, 또는 교육청에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하고 있지 않은가.

 

반값 등록금 이야기도 나왔었고,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반값 등록금으로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그에 준하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공약도 현 대통령 공약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어버려 문제가 많아졌지만, 이렇게 그런 공약이나마 내걸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갑자기 왜 허경영 이야기냐고?

 

요즘 계속해서 기본소득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 모두에게 조건없이 일정액을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허경영의 공약처럼 실현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하냐고,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다.

 

유토피아, 그냥 유토피아가 아니라 가능한 유토피아라고 해서 '리얼 유토피아'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분배의 재구성"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분배의 재구성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분배의 재구성으로 사람들은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게 된다.

 

이들은 평등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고, 당당한 한 개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무엇으로도 차별받지 않고 말이다.

 

다만, 기본소득으로 달마다 얼마를 주어야 하냐 하는 금액과 어디서 재원을 마련하느냐는 재원 마련의 문제, 그리고 기본소득과는 성격이 좀 다른 '사회적 지분'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어느 정책을 지지할 것이냐 하는 점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반 빠레이스와 사회적 지분을 지지하는 액커만과 알스톳의 주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둘은 목표에서는 비슷하기도 하지만 과정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급이 지속적이냐 일시적이냐, 소액이냐 거액이냐의 차이 말고도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것이 더 우리나라 상황에 합당하냐를 지금은 따질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들이 일어난다는 사실들이 기본소득이 먼 미래가 아닌 곧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복지가 계속 뒤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번역되어 이미 몇 십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관해서 논의를 하고, 그 주장이 실현될 수 있게 구체화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나라 복지에 대해서 냉철하게 판단하는 눈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 사람들이 실질적 자유를 누리면서 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득은 필수적이니, 그런 삶의 소득을 재분배해주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정당이 있고, 또 기본소득에 관해서 이론을 만들고 홍보도 아닌 단체도 있는데, 기본소득에 대해서 또는 사회적 지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기본소득이 왜 필요한지, 무엇인지, 또 사회적 지분과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것이 더 자신에게 와닿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이 더 생기면 기본소득네트워크에 한 번 들어가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http://basicinco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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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기본소득 - 논쟁과 전략의 탐색
이명현 지음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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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쟁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세월호법이 통과되자마자 이제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야겠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인지,그도 아니면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지 '복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그것도 공약인데, 공약을 지켜야지가 아니라, 내 공약이지만 너희가 지켜라라는 아주 이상한 쟁점이다.

 

누리교육과정 예산에 대한 논의가 무상급식(엄밀한 의미로 쓰면 의무급식이어야 한다. 의무교육에에는 급식 역시 포함되어 있다.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엄포까지 놓으면서 학교로 애들을 오게 만들어 놓고 밥은 돈을 내라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논의로 번져가고 있다.

 

몇 년 동안 잘 시행이 되고 만족도도 높고 정착이 되어가고 있는 급식 문제를 누리교육과정과 연관지어,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의 말처럼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이상하게도 언론에서 연일 이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교육청의 잘못인 듯한 어감을 풍기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가, 왜 언론을 장악하려고 하는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는 중인데...

 

한 번 자유를 맛본 사람은 부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한 번 복지의 장점을 경험한 사람은 복지 폐지를 견딜 수 없다.

 

무상급식(의무급식) 역시 마찬가지고, 이는 기초노령연금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사항이다. 이것을 가지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후진적이다.

 

앞으로 한참 나아가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뒤로 가려는 복지정책. 이것을 언론이 다뤄줘야 하는데...

 

학생들만이 아니라 청년들, 그리고 노인들, 여기에 중장년들까지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는지 왜 이렇게 정책이 거꾸로 가는지 모르겠다.

 

지금 세계는 복지를 놓고 논의중이고, 이 복지 중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선별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 하면서 의무급식조차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우리나라로서는 다른 나라의 기본소득에 관한 움직임이 부럽기만 한데...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에 관한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소수이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의 책임이 여기서 또 대두된다.

 

기본소득은 대표적인 보편 복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는 정책이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은 생계의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게 된다. 이 자유는 노동시장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가 된다.

 

근대에 들어 국가는 노동자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자본과 결탁한 국가의 초기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다 노동자들의 생계 문제가 자본의 증식에도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국가는 복지를 도입한다.

 

물론 선별적 복지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이들을 그대로 두면 사회 문제가 되고, 그 처리 비용이 더 드니, 이들에게 최소한의 호구책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선별적 복지다.

 

이렇게 선별적 복지로 세월이 흘러갔는데, 이는 자본이 성장을 구가할 때나 가능한 복지 정책이었다. 자본이 세계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러한 선별적 복지를 위한 세금이 잘 걷히지 않게 되었을 때 자본과 국가가 선택한 길.

 

아니 자본과 국가가 선택하게 만든 길이 바로 보편적 복지다. 보편적 복지는 현대 국가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선별적 복지가 근대국가의 몫이었다면 보편적 복지는 현대국가의 몫이다. 이러한 보편적 복지의 대표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직 국가적으로 실행이 되고 있는 국가는 없지만, 시도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곳은 있으며, 기본소득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세계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선별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에서 머물고 있다.

 

이미 보편적 복지인,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앞서 간다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또 연구들도 많이 되었으며, 책으로도 많이 출판되었는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르쇠로 자신들의 무식을 자랑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보편적 복지의 대표격인 "기본소득"에 대해서 이론 및 쟁점,그리고 실현 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살핀 책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이념에 따른 기본소득 논의, 나라에 따른 차이 등을 세세하게 잘 밝혀 놓고 있어서 기본소득에 관한 체계적인 정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기본소득은 환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주장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충분히 가능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허니, 우리 정치권이 뒤로 가게 하지 말자. 앞으로 가도 모자랄 판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더 나은 정책들, 우리가 실현해야 할 정책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미 잘 되고 있는 것들을 흔들려고 하는 집단을 경계하고, 그들을 멀리하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꿈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하자. 그런 공부를 하자. 그런 논의를 하자.

 

이 책은 그런 논의가 지금, 필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온 기본소득, 구체적인 실현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니...

 

기본소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의 직업을 선택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지만,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약속한다.
...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영업이나 협동조합 기업을 시도하기도 하고 원하는 분야의 시간적 작업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쾌한 정규직에 종사하도록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기본소득이 지향하는 사회는 책임과 자율 같은 사회적 기반을 중요시하며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이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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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근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기 시작했어요.
요새는 구 사회당(현 노동당) 사람들 외에 녹색당 사람들도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 책도 찜해둬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