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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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가 쓴 작품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책, 소설로는 세 번째.

 

제7일, 무언가 환상 속에 이야기가 펼쳐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중국어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에는 시작하기 전에 성경의 창세기 구절이 쓰여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된 제7일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이다. 모든 것이 완성되는 날, 그 날은 어떤 날일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시작부터 이상하다.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다. 주인공이 죽었는데, 죽은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분명 괴기스러운 소재인데, 전혀 괴기스럽지 않다.

 

오히려 읽어갈수록 마음이 따스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때 저절로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전개와는 다르게, 또 '가랑비 속의 외침'을 읽으며 참 어두운 분위기구나 하는 느낌과 다르게, 이 소설은 죽음 이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따스하다.

 

밝다.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사랑 넘침을 죽음 이후에 무덤 속으로 가지 못한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위하며 사는 사람들,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사람들. 빈의관이라고 쉽게 말하면 화장터에서조차도 권력과 금력에 따라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중국에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한 자들이 어떻게 떵떵거리고 사는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사회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이것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빈의관에서 귀빈석과 평민석이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것, 그들이 쓰는 화장로도 다르다는 것 정도가 나타나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보다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건사고를 감추는 모습이야 어느 권력이고 비슷하다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런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소설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주인공은 양페이와 그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 아니 더 가난한 사람들이다.

 

위화 소설이 지닌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의 비극이 무겁고 칙칙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이들은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을 긍정한다.

 

무덤조차 마련하지 못해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죽을 때가 되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철로에서 주워 키워준 아버지 양진바오, 그리고 자신을 떠난 여인 리칭, 가난한 셋집에 살던 우차오와 류메이, 아버지의 친구로 양페이를 돌봐준 리웨전 아줌마 등등.

 

모두가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죽어서도 서로를 위하며 지내는 사람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무덤조차 갖지 못하고 또 관료의 책임회피로 자신의 유골이 아닌 다른 유골을 매장한 상태로 지내고 있는, 그들이 모여 지내는 곳.

 

마지막으로 류메이가 무덤으로 떠나갈 때 들어온 우차오는 양페이와 함께 이곳에 간다. 양페이가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를 찾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날이 바로 '제7일'이다. 양페이가 이제는 편히 쉴 곳.

 

양페이가 의혹에 차 있는 우차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저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가 물었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내가 대답했다.      (314쪽)

 

이렇게 제7일은 끝난다. 가난한 사람들, 이들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쉼터인 무덤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끝이 아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산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작품에서 사람에게는 한 평의 땅, 죽어서 묻힐 그 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한 평의 땅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화장한 유골을 넣고 보관한 0.1평정도의 땅도 허용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죽음 이후에도 이들이 불행하게만 살아서는 될까. 아니다. 위화는 소설을 통해서 이 사랑이 넘치는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야 한다고, 죽음 뒤에도 불평등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죽은 사람인 양페이가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그렇게... 정말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죽음 앞에서조차 불평등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죽어서 서로를 위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통해 '제7일'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제7일'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삶에서 그런 '제7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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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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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소설로는 두 번째 읽은 책.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장면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고, 또 위화의 그 책에 나온 자신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소설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그 아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집안일과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자신들의 성장과정.

 

중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어찌보면 한 손씨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해준다고 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중국판 '삼대', '태평천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삼대'나 '태평천하'에서는 할아버지 세대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게 되고, 아버지 대에서 흥청망청 돈을 물쓰듯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도 쫄딱 망해버리는 상태로 나온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아버지 세대는 좌절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소설인데, 위화의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무지랑이에 해당한다는 것이 다르고...

 

그러나 아들 세대는 역시 배우고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대의 맨 마지막 세대의 눈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점에서는 위화의 이 소설이나 우리나라 '삼대, 태평천하'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위화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들 세대는 우리나라 아들 세대보다 더 세속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다르다.

 

이 소설은 이처럼 할아버지 손유원, 아버지 손광재, 그리고 그의 아들 셋 손광평, 손광림, 손광명의 이야기에 덧붙여 소설의 서술자인 손광림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본능에 충실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민초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가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을 끊지는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살이가 이토록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살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온갖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손광평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어쩌지는 못하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 도시로 갈 때 배웅해 주는 모습이라든지, 첫째 형을 닮았지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손광명이라든지... (그것이 비록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을지라도)

 

여기에 주인공의 친구들, 이들 역시 버림받거나 가난에 찌들어 살게 되는데... 그런 시대를 중국이 거쳐왔다는 것.

 

이 소설에도 도회지에 대한 부러움이 드러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창 개발이 될 때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듯이, 중국 역시 도시로, 도시로를 외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 위화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를 소설로 형상화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거쳐왔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그 시절을 잊지않도록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미 변해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시절이 지금의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소설. 이것이 위화의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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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일포 2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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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권이다. 1권에 이어서 뤄샤오통이 스님에게 하는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있다. 그런데 1권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어디서 믿을 만한 이야기가 시작되는지 알기가 힘들다.

 

분명 뤄샤오통이 어른들을 비판하고 있는 듯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뤄샤오통을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는 화자, 그를 통해 당시 어른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화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소설을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이 소설에서 주로 나오는 것은 돈과 성이다. 금력과 성에 대한 집착. 이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뤄샤오통이 고기에 집착하는 것도 역시 이 두가지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육욕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고기를 먹는 뤄샤오통의 모습에서, 다른 하나는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란씨를 통해서 보게 된다.

 

그렇지만 뤄샤오통은 고기를 끊는다. 그리고 그는 스님이 되려고 한다. 이는 그가 육욕에서, 권력에서, 돈에서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이런 뤄샤오통의 모습은 현대화된 중국이 물질만능주의로 흘러갔으며,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도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가 사회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소설 속에서 창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환상과 사실의 넘나듦이 너무 심해서 제목인 사십일포를 사십일개의 이야기, 사십일개의 과장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 시절 지녔던 환상을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내고 있다는 생각. 아이들은 사실과 환상을 교묘하게 섞어서 이야기를 한다.

 

사실 거짓을 말하려는 의도가 없이도 아이들은 사실에 허구를 섞어서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허구와 사실은 하나로 엮여서 그 자체로 진실이 된다.

 

이 소설 속 화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20대에 접어들고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화자가 성숙했다고 여기기가 힘들다.

 

그래서 화자인 뤄샤오통은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일들을 환상과 사실을 섞어서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진실 속에는 현대화를 추구하던 중국의 모습, 중국 인민들의 모습이 잘 담겨 있기도 하다.

 

언제까지 이런 물질만능, 육욕을 추구하는 생활을 할 수는 없다. 작가인 모옌은 이런 뤄샤오통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대 중국인이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기, 성, 돈, 권력을 추구하는 그런 것들에 41발의 대포를 쏘아대는 뤄샤오통, 그가 쏜 대포는 이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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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일포 1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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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하다. 사십일포라니... 대포를 41발 쏜다는 얘기인데...이 때 대포는 바로 이야기이다.

 

20대로 추정되는 사내 뤄샤오통, 그가 노스님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 이것이 바로 사십일포의 내용이다.

 

그가 10살 즈음에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육체는 컸지만 정신은 여전히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당시 중국의 생활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뤄샤오통은 고기라면 환장하는 아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생활이 어려워 먹을 것에 집착한다는 얘기가 된다.

 

중국혁명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되었지만, 만인이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특정한 집단만이 잘사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비판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 그들이 얼마나 평등하지 않고 또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지를 뤄샤오통이 사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문제적 인물을 내세워 문제적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삶은 달걀도 가짜로 만들어낸다는 중국인들답게 그 마을 사람들은 짐승에게 물을 먹여 파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한다.

 

그것도 마을의 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란씨의 주도하에... 란씨는 돈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 한다. 그에게 도덕과 비도덕은 의미가 없다. 그에겐 오로지 과거 자신의 조상이 지녔던 영광, 권력을 얻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뤄샤오통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배경이 1990년대쯤 되니, 이때는 이미 자본주의가 중국에 많이 들어와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념보다는 물질을 우선시하는 사회가 된 것이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란씨와 뤄샤오통의 어머니 량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돈, 돈... 사람의 자리를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존재. 그것을 추구하는 인물들. 이 인물들 모습과 달리 아버지 뤄씨는 애정을 좇는다. 그러나 그 애정은 성공할 수 없고...

 

1권에서는 아버지가 함께 도망갔던 여인의 죽음으로 딸만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힘을 쓰지 못하고 란씨에게 굴복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돈의 위력이 사랑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

 

이 장면을 어른이 된 내가 아이 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 먹을 것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육식이다.

 

고기의 폭력성이 아이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이런 고기의 폭력성, 권력 추구의 폭력성을 어른이 된 내가 노스님 앞에서 이야기하는 장면 장면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다 무너져 가는 절, 한없이 늙어버린 스님, 그 스님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스님이 되고자 하는 나, 뤄샤오통.

 

그가 이야기를 할 때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일들은 과거의 일만큼 여전히 폭력적이다. 육식의 폭력성, 당시 사회의 폭력성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폭력 앞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스님의 존재는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된다. 절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처럼. 다만 2권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겠는데...

 

26발의 이야기가 1권에서 펼쳐졌다. 권력을 추구하는 란씨에게 굴복해 그의 집으로 새해 인사를 간 장면까지.

 

여기까지는 중국인들이 처절하게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전만능주의. 이것을 어른이 된 뤄샤오통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들려줌으로써 우리에게 거리를 두고 읽게 한다.

 

금전만능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그런 형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당시 중국에 팽배한 물질주의, 금전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다음은 2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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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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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진(巴金), 이름만 듣다가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중국 소설가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가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그간 중국 소설 쪽에는 고전(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서유기)을 제외하고는, 루쉰의 작품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몇 작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있지만 (빨간 기와, 로빙화와 같은 작품들)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넘어갔었는데...(나중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옌의 작품을 읽을 생각)

 

최근 장아이링의 작품을 시작으로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세계문학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서양 쪽으로 치우친 독서 경향을 바로잡으려는 마음도 작용하기 시작했고.

 

바진은 중국 격동기에 살았던 작가다. 약력을 보면 그는 아나키즘에 많이 경도되었다고 하던데... 바진이라는 이름도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첫자와 끝자를 따서 지은 필명이라고 하고.

 

처음으로 읽은 '휴식의 정원'은 나름대로 읽을 만했다. 중국이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몰락한 한 가정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회는 변해가는데 자신은 과거에 얽매여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죽음에 이르는 양씨 집안 셋째와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그의 아들 양도령, 그리고 지금 부자로 지내고 있는 친구 라오야오와 그의 아들 샤오후. 이를 바라보는 소설가인 나, 라오리.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산다. 바로 양씨 집안의 셋째가 그렇다. 그는 재산을 탕진만 하고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축첩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든지, 체면에 얽매여 몸을 움직이는 일, 남 밑에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집안이 망해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과거의 습성에 젖어 있다. 반대로 그의 큰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생활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이미 근대인인 것이다. 그가 우정국(우리말로 하면 우체국)에 취업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족에게 쫓겨난 그, 하지만 그의 둘째 아들 양도령은 그런 아버지도 역시 아버지라고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양도령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있는 양씨, 그러나 그는 비렁뱅이로 지낼지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병을 고쳐 새로운 생활에 나아가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이 양도령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사라지고 만다. 죽음으로 영원히.

 

이것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또다른 과거의 인물이 등장한다. 양씨는 이미 어른인 과거라고 하지만, 작가의 친구인 라오야오의 아들 샤오후는 미래를 살아갈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그가 하는 행동은 양씨의 행동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미래를 살지 못한다. 아니 살아갈 수가 없다. 이미 양씨의 몰락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그래서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 과거의 인물이 발 디딜 곳이 이제는 중국에서도 없는 것이다. 이젠 과거의 인물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

 

친구와 재혼한 부인인 자오화가 임신을 한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도령도.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인물이 비극으로 사라져 줌으로써 미래의 인물이 희극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다.

 

바진의 이 소설은 그래서 비극적 삶을 다루고 있지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자오화가 소설가인 주인공에게 요구한다. 왜 소설에 비극만 있냐고. 소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해주면 안 되냐고.

 

이것이 소설가인 주인공에게 다른 결말을 지닌 소설을 쓰게 한다. 소설 속 소설과 이 소설이 함께 하면서 새로운 희망, 아름다움,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과거의 인물을 사라지게 한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사가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고,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소설가는 세상을 봄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수 있잖아요. 눈물 흘리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모든 이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요.' (75쪽)

 

라오야오의 아내인 자오화가 영화를 보고 오면서 작가인 라오리에게 하는 말. 이 말이 바로 작가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도 비극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희망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세상이 아무리 암흑일지라도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꼭 있다.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견뎌내고 어둠을 이겨내는 것이다.

 

바진의 이 소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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