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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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천천히 읽게 된다.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가 늙어가듯이 소설도 그렇게 천천히 전개된다. 우르비노 박사가 죽은 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과정이 하나하나 펼쳐진다.

 

열정적인 사랑, 죽을 것 같은 사랑 속에서도 페르미나를 잊지 못하는 플로렌티노는 페르미나를 잊지 않기 위해 육체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그가 관계한 여성이 6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 중에 열정적인 관계를 맺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남자가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것. 확인을 다른 여자의 몸을 통해서 하는데, 여기에 단순히 몸만을 취하지는 않는다.

 

몸을 취한다는 것은 마음을 취한다는 것과 연결이 된다. 몸만을 추구하는 사랑은 돈이 매개된 사랑이다. 돈으로 제 욕정으로 해소하기 위해 사는 관계, 그것이다. 그러나 플로렌티노는 돈으로 여자를 사지 않는다.

 

물론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인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여인은 직접 돈을 받지 않는다. 저금통에 돈을 넣고 마는 것, 또 플로렌티노가 힘들어할 때 찾아가 위안을 받는 것.

 

이렇게 그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도 늙어가는데, 유일하게 관계를 맺지 않는 여인이 있다. 흑인 여성인 레오나 카시아니. 이 여인은 플로렌티노가 자려고 할 때 그를 아들로 생각한다고, 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이 여인은 플로렌티노가 선박 회사의 회장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데,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 레오나는 어머니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 결국 자살하고 마는 아메리카 비쿠냐, 십대의 나이에 플로렌티노와 관계를 맺는 그녀는, 마치 롤리타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플로렌티노가 페르미나로 인해 그녀와 관계를 끊자 자살하고 만다.

 

십대 여인이 칠십 대 노인과 사랑에 빠진다? 소설은 이게 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세상에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이런 나이가 상관없음이 바로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에서 나타난다. 노인들의 사랑을 추악한 것으로 여기는 페르미나의 딸과 아들과 달리 며느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에는 신분도 나이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 하는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사랑만은 아니다. 육체적 사랑도 가능하다.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는 나중에 육체 관계를 갖는다. 처음에는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지만, 이들은 서로가 만족할 만한 육체 관계를 찾아낸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했을 때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른 때는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다. 그렇게 잔잔한 만남, 잔잔한 사랑으로 변해간다.

 

이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89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불처럼 이는 사랑으로 결혼에 이르렀다고 해도, 이들의 생활은 반복으로 점철된다.

 

반복되는 삶, 지겨움이다. 이 지겨움을 이겨낼 때 부부 생활은 지속된다. 하지만 지겨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일탈이 일어나거나 부부 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우르비노 박사와 페르미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르비노 박사 역시 바람을 피우고, 그런 관계를 통해서도 이들의 결혼 생활은 계속 유지된다. 한때의 바람, 이것은 부부 생활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몇 십년 동안 지속되는 비슷한 일상이 얼마나 지겹겠는가. 사랑에 빠졌을 당시에는 새로움의 연속이었지만,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일상이 시작된다.

 

일상의 연속, 이것은 지겨움이고, 바로 '별것'이었던 사랑이 '별것 아님'이 되고 만다. 이렇게 별것 아닌 사랑 속에서도 결혼 생활은 지속되는데, 이런 지속이 바로 사랑을 '별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별것'이  '별것 아닌 것'이 되었다가 다시 '별것'이 되는 과정이다. 이 '별것'에 한 사람과의 사랑이 자리잡을 수도 있고, 또 사별을 한 뒤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는 페르미나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이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데... 한 순간도 페르미나를 잊지 못했다는 플로렌티노의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할 때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는 그렇게 페르미나를 기억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하고 결국은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페르미나와 맺어지는 것.

 

환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다. 현실로 꽉 찬 그런 삶이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사랑에 환상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무려 53년을 기다려 맺어진 사랑이라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일상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적나라한 인생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별것' 아닌 삶을 '별것'인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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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0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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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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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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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작품으로는 두 번째 작품 읽기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느꼈던 환상적인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는 없다.

 

그냥 우리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제목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콜레라 시대, 지금은 사라진 시대다. 그렇다면 과거 시대의 사랑이라는 말일까. 왠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들의 사랑이 지금으로부터 따지면 과거에 해당하겠지만, 사랑은 시대를 넘어 공통된 무엇이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열병을 앓듯이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목숨을 바칠 것처럼 푹 빠져 있고, 그 사랑에 전염되어 다른 것은 생각도 못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콜레라가 이미 과거 질병이 되었고, 이제는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도 잘 알려졌듯이, 사랑 역시 과거의 어떤 일로 사라지고 만다.

 

자신을 달뜨게 하고, 들뜨게 하고, 사랑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그런 열병같은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고 결국 생활밖에는 남지 않게 되는 상황. 결국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콜레라에 걸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게 지속되면 안 된다는 것.

 

1권의 마지막 대사가 바로 이것이다. "별것 없더라고요." (286쪽)

 

신혼여행에서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돌아온 페르미나 다사가 한 말이다. 사랑은 빠져 있을 때는 별것이다. 정말로 특별한 무엇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별것 아닌 것이 된다.

 

이렇게 별것 아닌 것이 되었을 때 사랑은 생활 속에 녹아들어 더 이상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사랑으로 살지만 나중에는 정으로 산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페르미나 다사와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 역시 정으로 살아간다. 이들은 50여 년을 함께 살지만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즉 페르미나 다사가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게 되는 것, 그러나 결혼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그를 다르게 보게 되는 것. 그리고 현실에 안주해 결혼 생활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죽을 것 같은 사랑은 없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별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은혼식, 금혼식, 금강혼식(다이아몬드식)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함께 25년, 50년, 75년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처음엔 불붙는 사랑이 있겠지만, 콜레라와 같은 열병을 앓겠지만, 콜레라가 지속되면 삶은 유지될 수 없으니, 곧 정신차리게 된다.

 

그 다음에는 생활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다.

 

소설은 나이 든 후베날 우르비노 박사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죽게 되는 사건이 소설의 앞부분을 차지한다. 그 다음에 우르비노 박사의 부인인 페르미나 다사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편지로 서로에게 환상을 키워가는 그런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편지로 만나는 사랑, 그것은 상대에 대한 환상을 키우게 된다. 이런 환상은 실물을 보는 순간 깨지게 된다. 환상이 깨지면 그때부터 현실이 들어온다. 현실이 들어왔을 때 페르미나 다사가 선택하는 것은 결혼이다.

 

상류층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우르비노 박사와 결혼하는 것. 이들의 결혼으로 충격을 받은 아리사는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파리로,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아이를 임신한 페르미나가1권 마지막에서 하는 말 "별것 없더라고요."

 

이 '별것 없더라고요'가 바로 '별것이더라고요'가 된다. 우리 삶은 이런 별것 없는 것이 바로 별것인 삶이다. 그렇게 삶은 유지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소설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2권에서는 결혼한 페르미나가 어떤 현실을 살아가는지, 페르미나를 사랑하는 아리사가 어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펼쳐질 것이다.

 

내 삶,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삶이 바로 별것이라는 생각을 소설을 읽으면서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별것 아닌 삶이 소설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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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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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속았다. 아니, 번역을 한 제목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로 몇 개 철자만 바꾸어 뜻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영어와 전혀 다른 언어인 한글로 번역을 했을 때는 영어로 말하는 말장난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 희곡도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유명한 작가를 연상하고, 그를 두려워하랴라고 하면 도대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희곡인지 뭔지 생각하게 되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았다는 사실, 가정 생활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희곡 내용을 상상하는데...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나오는 장면은 노래에서밖에 없다.

 

해설을 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노래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돼지들이 '누가 늑대를 두려워하랴'라고 부르는 노래를 비튼 것이란다.

 

울프... 늑대... 발음에서 같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말로 번역을 해놓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버지니아 울프와 이 희곡 내용이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마사와 조지는 부부지만, 또 손님으로 나오는 허니와 닉도 부부지만 이들에게 사랑이 넘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 젊은 부부인 닉과 허니는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주인공인 마사와 조지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

 

가족이 이렇게 되면 파탄날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지, 상대를 한없는 나락으로 이끌어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희곡이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서로를 헐뜯고 서로를 화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없던 이야기(아이)도 만들어내는 부부.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한 다음 만났다면 이들이 서로 상처를 주는 관계만을 지니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극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이런 관계에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우리가 꿈꾸는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가정에 대한 환상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한 관계, 그런 장소로 가정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만이 지닌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

 

자기 울타리를 지니고 상대방을 울타리 밖으로 자꾸만 몰아내는 말들, 그런 행동들을 하면 가정은 유지되지 않는다. 자기가 지닌 울타리에 문을 내고, 길을 내고, 서로 받아들여야지만 가정이 유지될 수 있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마사와 조지. 이런 가정이 지금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가장 평화롭고 사랑이 넘쳐야 할 가정이 비난과 폭력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적어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들 울타리에 문을 내고, 문과 문 사이에 길을 내야 하는데, 또 그 사이에 함께 할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는 말들만, 행동들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희곡이 오래 전 미국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들도 이 부부들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타산지석(他山之石)이어야 한다. 이 희곡을 읽으며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인지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삭막한 가정은 아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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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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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읽은 책이다. 그때는 사회-역사 지식이 부족해서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또다른 동물이 독재를 한다 정도로만 이해하고 말았던 책이다.

 

다시 나이들어 읽으면 그동안 살아온 것들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 해설에서도 나오지만 책이 발간될 당시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풍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소설이 발간된 지도 70년이 넘었고, 그만큼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고, 또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던 것이 이제는 종교 대립이나 경제 대립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지금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오웰이 풍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소련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바로 소련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의 반란은 민중들의 혁명이고, 정권을 잡은 돼지는 스탈린이며 쫓겨난 돼지는 트로츠키라는 것. 그리고 한없이 일만 하다 죽게 되는 복서(말)는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는 것. 여기에 스퀼러라는 돼지가 나오는데, 이는 왜곡된 언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민중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 혁명은 곧 몇몇 권력가들에 의해 배신당하게 되고, 민중들의 삶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

 

얼핏 보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소설같지만, 사회주의라는 이념보다는 스탈린이라는 권력자가 사회주의 이념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 (어쩌면 그는 아나키스트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동물농장 말고 또다른 글이 두 편 실려 있는데, 한 편은 '자유와 행복'이다. 인간에게 자유와 행복은 양립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독재자들은 양립할 수 없고, 행복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롭지 않은 행복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을까? 동물농장에서 다른 동물들은 서서히 자신들 자유를 잃어간다.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잃어가는데, 이들 삶은 점점 버거워지고 힘들어진다. 반면에 몇몇 권력자들은 점점 더 살찌게 되고.

 

그러니 우리는 자유와 행복은 양립해야 한다고,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이 점을 '동물농장'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동물농장'은 단순히 스탈린 체제에 있던 소련 사회를 풍자하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들이 잘살기 위해서 벌이는 일들이 바로 '자유와 행복'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는 일이라는 것.

 

인간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들은 그래서 자유를 획득했지만, 곧 자유는 구속당하고, 행복은 강요당한다. 강요된 행복은 왜곡된 언론에 의해서 진정한 행복인 것처럼 가려지지만, 그렇다고 진정으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점점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돼지와 인간들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많은 동물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혁명은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하다. 혁명 이후 발을 잘못 디디면 혁명 전과 같은 상황으로, 아니 더 나쁜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동물농장'에서 권력을 쥐게 되는 돼지들 말고, 다른 동물들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던 복서가 결국 팔려가, 권력자들 향연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이 소설이 씌어졌다고 보면 된다. 또다른 글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물농장'은 내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143쪽)

 

한참 세월이 흘렀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혁명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서 지금도 유효하다.

 

혁명 자체도 중요하지만,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함을 소설은 생각하게 한다. 혁명 이전의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소수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언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민중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깨어 있더라도 참여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소설에서는 당나귀 벤자민이 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혁명 이후를 예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이 점도 경계해야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사회-역사와 관련지어 읽으면,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꿈꾸며 읽으면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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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0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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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1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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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아이 라임 청소년 문학 12
은이결 지음 / 라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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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집단 생활을 한 다음에 전쟁이 없던 시기가 있었을까? 짧은 평화, 긴 전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다. 일방적인 폭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작은 전쟁들이 지속되기도 한다.

 

이런 전쟁들 속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과 아이이다. 그러면 여성 아이는 더 큰 피해를 본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사는 생물 중 가장 고등하다는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몸 속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이 얼마나 여성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전쟁 장면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은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여성 아이에게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단지 여성 아이뿐만 아니라 힘없고 약한 백성들에게는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감내해야 한다. 양반들과 달리.

 

비극적인 건, 어떤 사람들이 '화냥년'이란 말의 어원으로 '환향녀'라는 말을 들고 있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양반들, 권력자들, 자신들이 잘못해서 청나라로 끌려가게 해놓고, 이들이 돌아왔을 때 정조 운운하면서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한 말. 환향녀. 이 소설에서도 끌려갔다 돌아온 작은 마님이 결국 추운 겨울에 냇가에서 몸을 씻어야 하고, 결국은 차가움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비극들, '칼의 아이'라고 하는 제목이 언뜻 '에밀레종'을 연상시킨다. 종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쳤던 먼 과거의 일들. 이번에는 왕에게 바칠 칼 '사진검(四辰劍)'을 완성하기 위해 바칠 아이, 행이. 행이를 둘러싸고 청나라 사람들에게 누이를 빼앗긴 부칠이, 그리고 행이 쌍동이 동생 만우. 행이와 함께 지내는 옥란이라는 양반집 규수. 칼을 만드는 도검장.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왕, 그러나 그 왕을 잃으면 자신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왕이 권력을 쥐도록 신묘한 기운을 얻고자 하는 신하. 그 신하가 이야기한 검, 사진검.

 

사인검(四寅劍)은 있어도 사진검은 없다. 사인검이 호랑이 해 호랑이 달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만들어진 검이라면 사진검은 용 해에 용 달, 용 날, 용 시에 만들어진 검이다.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서 이때 태어난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다. 왕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 사람의 생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양반들의 모습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지금 정치권들 모습의 원조라 할 만하다.

 

소설은 행복한 결말, 인과응보로 어느 정도 가다보면 결말이 예측가능해진다. 이런 결말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소설 결말에 안도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조차 힘없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은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다는 사실.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그런 희생이 더 힘없는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힘있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겪는 삶은 마찬가지로 힘듦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최부사 댁 딸 옥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남독녀라고 오냐오냐 하면서도 정략적 결혼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것, 딸의 무참한 죽음 앞에서도 제 부와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최부사의 모습. 눈 먼 충성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판서. 여기에 여성이 한 사람으로 당당한 한 생명으로 존중받는 모습은 없다.

 

사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전쟁으로 인해 더욱 피해를 보는 여성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과거 오래된 역사를 배경으로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 돕는 모습, 결국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우리 삶도 이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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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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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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