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스 불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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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소설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결론을 바꿀 수가 없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읽는데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작가가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메워넣기에 더 흥미롭고 재미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역사 소설이나 또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지만 그 과정을 채워넣는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고골이 쓴 소설 '타라스 불바'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나는 지금까지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다. '타라스'라는 말을 '대장'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던 것. (소설 시작 전에 있는 일러두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타라스 불바]는 [대장 불리바]로 번역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까지도 '타라스'에 '대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타라스는 인물의 이름이고, 불바는 인물의 성이다. 6쪽)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한데,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본 율 브린너가 부리바 역으로 나온 영화가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가 그래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을 해봤더니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고, 이 소설의 말미에 번역자가 영화도 소개하면서 영화와 소설이 지닌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눈이 부리부리한 율 브린너의 연기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율 브린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영화를 먼저 본 나에게 불바는 율 브린너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바의 이미지가 꼭 그렇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다. 소설에서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카자크 족. 그들은 이교도들, 특히 폴란드와 타타르인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소설에 또 하나의 축 유대인이 나오는데,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버는 그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익스피어의 샤일록이 얀켄이라는 이름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유대인으로 나오는데,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끝없은 미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카자크 족은 야만인이었는데, 아니었다. 소설을 읽어보니 이들은 그리스정교를 독실하게 믿는 신앙인이었다. 마치 십자군 원정을 유럽 기사들이 떠났듯이 카자크 족은 그리스정교를 믿지 않는 가톨릭이나 이슬람교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공존하지 않으려 한다.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자식들에게 카자크 족의 용맹을 일깨워주려는 불바. 결국 이들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전쟁 중에 아들들의 용맹을 확인하고 흐뭇해 하는 불바.

 

참 호전적이다. 이들에게 용서는 없다. 오로지 학살과 약탈뿐이다. 이런 그들이기에 평화로울 때는 먹고 마시고 논다. 그것이 다다. 미래를 위한 저축, 그런 것은 없다. 이상하게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죽을 때 신에게 의탁하면서, 평소 생활은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욕망에 충실한 자유인이다. 다만 그들 자유를 위해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하고, 과거에 이런 전쟁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니, 꼭 이들을 탓할 것은 아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들은 결국 해체되고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이렇게 호전적인 집단이 계속 존재한다면 인류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이런 불행을 불바의 두 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버지와 똑 닮은 큰아들 오스타프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하는데, 전사답게 당당하게 죽게 된다. 반면 둘째 아들 안드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 카자크 족을 배신하고 폴란드 군에 서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불바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불바는 두 아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는다. 이들이 아무리 전투를 좋아해도 자기보다 먼저 자식들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이미 이 사실을 예견하듯이 불바와 떠나는 두 아들을 눈물로 보내게 된다.

 

어떻든 전쟁은 비극이다. 전쟁은 눈물을 부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용담으로 남을지 모르겠찌만, 가족들에게는 비탄만 남기게 되는 행위이다. 

 

불바의 죽음으로 카자크 족은 더이상 호전적인 전투를 할 힘을 잃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바의 부대가 패배해 부하들이 간신히 도망가고 불바는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불바는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가 된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불바를 영웅으로 만든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서 결국 불바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쟁이란 비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에서는 고골이 죽은 다음에 더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또 종교로 인한 분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타라스 불바도 전쟁을 벌이는 원인이 바로 종교 아니던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이편 저편을 가르고 그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사랑은 끼어들 틈이 없음을 '타라스 불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평화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멀다.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라 할 수 있는 불바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일으키는 비참함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카자크 족들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 소설은 단순히 영웅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의 비극을 알려주는 소설로 읽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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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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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 다섯 편이 묶여 있다. '코, 외투, 광인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라는 소설이다.

 

이 중에 '코와 외투'는 많이 들어봤다.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이 참에 읽어야지 하면서 읽었는데... 고골이 쓴 작품 중에 '감찰관'이 희곡으로서 지금 상황에도 잘 들어맞는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은 상당히 환상적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소설로 쓰고 있는데, 소설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쓰는 이유는 현실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코'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어느날 코가 없어진다. 그 코가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 되어 나타나고, 코를 찾고자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던 코가 다시 돌아온다.

 

참 별 내용 아니다. 코가 없어진 사람, 그리고 다시 코가 돌아온 사람. 무엇일까? 코가 하는 역할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코는 얼굴 중심에 있다. 코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무언가 허전할 것이다. 여기에 코는 냄새를 맡는 역할을 한다. 냄새만이 아니다. 코는 성기의 역할도 대신한다. 그렇다면 코는 욕망을 의미한다.

 

코가 사라졌다는 말은 하급관리가 자기 욕망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러시아가 근대화 되는 시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고착된 신분 사회다. 그런 신분 사회에서 다른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려는 사람은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코'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외투'도 마찬가지다. 외투는 겉옷이다. 겉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하급관리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새 외투를 장만했고 그것에 매우 만족하고 즐거워하지만 그는 곧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죽는다. 죽은 그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설정.

 

외투, 계급을 상승시키려는 욕망, 좌절. 코가 없어지고 외투를 빼앗기고. 하급관리들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다른 욕망을 품으면 죽거나 상실하고 만다.

 

아마도 코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그가 다른 계급을 욕망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테고, 외투를 빼앗긴 하급관리가 유령이 되어 다른 사람, 그것도 고급관리의 외투를 빼앗은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곪아버린 사회가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도 하지 못하는 하급관리는 미쳐버리고 만다. '광인일기'다. 그는 욕망을 실현할 수가 없다. 자신의 성적 욕망도 실현하지 못하고, 신분 상승이라는 욕망도 실현하지 못한다. 정신병원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닫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골의 소설에서는 근대에 이른 러시아 사회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하급관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주로 그들은 파멸한다. 그것이 당시 러시아 모습이기도 하리라. 이런 혼란의 상태, 부패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네프스끼 거리'란 소설이다.

 

네프스끼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소설의 소재로 삼고 있는데, 창부에게 새로운 삶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자살한 화가와 독일인 유부녀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중위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아름다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일, 즉 젊은이들이 겪는 성에 대한 욕망, 여기에는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생각밖에 없다. 처녀든, 유부녀든 상관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하는 젊은이들이 개혁에 대한 열망이 좌절한 상태에서 육체적 욕망에 침잠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소설에서 구한말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들어서 개인적인 욕망 추구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이 좌절된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술과 여자 속으로 숨어든다. 그런 사회 모습을 고골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성향이 다른 소설이 하나 '초상화'다. 인간이 지닌 욕망이 어떻게 작품에 나타나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을 수가 있는데,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2부를 읽으면 1부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가 더 쉬운데...

 

어쩌면 고골은 자본이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이 환상적인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상화 주인공이 고리대금업자라는 사실이 2부에 나오니 말이다. 그리고 1부에서는 가난한 화가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얼마나 순수함에서 멀어지는지, 결국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지,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화가와 초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다. '카프카' 소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카프카 소설이 환상적이지만 거기서 우리가 끊임없이 현실을 불러낼 수 있듯이 고골의 소설들도 환상적이기에 읽으면서 오히려 현실을 환기할 수 있다.

 

현실과 멀어졌기에 현실을 바로볼 수 있게 한다고나 할까? 고골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사람이다. 그런 그는 자본주의 초창기에, 신분제가 강력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신분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시대에 살았던 그가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공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좌절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두하는 자본의 횡포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집에서 만날 수 있다. 소설의 생명은 그 시대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은 시대를 따라 유유히 우리 삶에 들어온다. 이것이 고골의 소설이 여전히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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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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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다. 서양 신화와 역사와 철학과 문학이 모두 나오는 듯하다. 그냥 읽어서는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주를 보면 참... 너무도 방대한 서양 문화가 종합되어 나온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파우스트, 파우스트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서양문화를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에게는 이 책은 그냥 책에 불과하다. 내 정신에 충격을 주거나 마음을 뒤흔들어 놓거나 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책읽기는 의무가 된다.

 

한번 잡았으니, 끝까지 가봐야지 하는 오기가 생긴다. 어차피 책읽기는 잘못읽기라면 그냥 읽으며 내 멋대로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다 싶기도 하다.

 

1부에서 개인이 겪는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 범위가 확장된다. 정치 사회로까지 나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으니,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정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그 세계로 인도한다. 그런 정치사회라고 해봐도 사랑이 빠질 수가 없다.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있는 '헬레나' 가 등장한다. 물론 그 전에 파우스트의 제자가 창조했다는 작은 인간 '호문쿨루스'도 나오지만.

 

호문쿨루스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생명체를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파우스트의 제자인 바그너는 그런 인간을 만든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다. 아주 작은 생명체, 그것도 유리 안에 있어야 할 존재다. 그러니 만족할 수는 없다.

 

이런 호문쿨루스 이야기를 지나 헬레나로 넘어간다. 과거 신들을 소환하라는 왕의 명령,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헬레나를 지상으로 데려오자 파우스트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아이까지 낳는다. 전쟁까지 일으킨 여인과 행복하게 사는 것.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있을까?

 

아이는 죽고, 헬레나는 돌아가고. 이것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욕망이다. 이룬다고 해도 영속할 수 없는 욕망이다. 영속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고 '멈추어라' 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다른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서 해안선을 받게 된다. 이것을 간척하는 사업을 하고, 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는 드디어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잡히게 되지만 그는 구원받는다. 바로 그레트헨으로 인하여. 여성성, 사랑이 영원함을 여기서 보여주는데...

 

그 유명한 구절이 파우스트 마지막에 나온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실현되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올리도다. (388-389쪽)

 

남성성이 욕망으로 가득찬 세계라면 여성성은 사랑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은 이런 남성성의 세계가 아니라 여성성의 세계라는 것.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영혼을 빼앗기게 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그 장면은 남성성, 여성성 어디에 속하는가.

 

해안을 개척하고, 그곳에 사람을 이주시키는 것, 이건 남성성이라고 해야 한다. 무언가를 정복하고, 그 정복된 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욕망.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 바로 이것이 남성성이다.

 

이런 남성성이 충족된다고 해도 우리 영혼은 신에게 가지 못한다. 그것은 악마에게 갈 영혼일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끝부분을 읽으며 그가 쫓아내는 노인부부 이야기는, 서양이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쫓아내는 원주민들의 모습과 겹친다.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곳에 자신의 깃발을 꼽고 여기가 바로 내 땅이다. 자유로운 땅이다. 이리로 와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는 것, 남의 눈물을, 피를 바탕 삼아 세운 땅이 어찌 자유롭고 행복한 땅일 수 있을까?

 

그러니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는 욕망에 멈추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좋은 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로 인해 파멸에 이른 그레트헨이 그를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용하는 정신, 마음이 바로 여성성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내 멋대로 읽은 파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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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9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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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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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대충 알고, 제목은 너무도 많이 들어봤지만 제대로 읽은 적은 없는 책. 요약본으로 읽거나, 산문으로 고친 책을 읽어나 했는데...

 

이번에 장거리 여행을 떠나면서 버스 안에서 읽을 책으로 골랐다. 이 참에 읽어봐야지 하면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 신이 내기를 한다. 인간 '파우스트'를 두고서. 그 내기에서 누가 이길까를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지만...

 

괴테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하는 생각은 했다. 인간은 신의 영역에까지 도달하고 싶어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고 만족했다고 하니, 만족, 거기서 멈출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신의 경지에까지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너머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메피스토펠레스는 말한다. 신이 뛰어난 인간은 인간적 욕망을 넘어 신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의 길에 다가가 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 속에 자신의 영혼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우스트 박사를 두고 내기가 벌어진다. 파우스트 박사를 찾아간 메피스토펠레스, 그가 파우스트 박사에게 제시한 다음 파우스트 박사가 받아들이는 장면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95쪽)

 

이 부분.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추구한다는 자신, 그 욕망은 채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 왜냐하면 인간은 신을 따르려 하니까. 신이 아니니까. 신은 늘 가까이에 있는 것 같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테니.

 

이렇게 시작된 내기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영혼을 갖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한다.

 

1부는 바로 인간이 지닌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욕망이 채워졌을 때 어떤가? 인간은 만족하는가? 여기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파우스트와 첫번째로 가는 곳이 바로 술집이다. 술, 우리 인간 영혼을 헤매게 하는 존재 아닌가. 술을 마셨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하지만, 곧 술은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술꾼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정도로 파우스트를 결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가는 곳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자 궁극적인 욕망 아닌가.

 

사랑 때문에 벌어진 전쟁도 있으니, 이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만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파우스트는 마르가레테(그레트헨)를 만나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이들의 사랑, 불붙는 사랑.

 

자신의 영혼을 상대에서 모두 주는 사랑, 영원히 멈출 것 같은 사랑,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오빠를 죽이고, 그레트헨은 자기 어머니와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된다.

 

파멸로 끝난 사랑, 어쩌면 파우스트는 자기 욕망을 위해 한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했겠지만 상대를 구원하지 못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 그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1부다. 인간 욕망이 끝나는 곳은 술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이들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가? 그것이 있다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이제 2부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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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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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읽기 힘든 소재다. 세월호는. 소설을 읽으며 마음은 계속 심해로 가라앉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데, 이미 세월호는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똑바로 세워졌는데도 여전히 마음은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배만 올라왔을 뿐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책임져야 할 자들은 쏙 빠져나가고 소위 잔챙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처벌을 받았다. 
 
여기에 처벌이나 비난을 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비난을 받기도 했고. 진실을 바닷속에 묻어두려고 했는지, 계속되는 진실규명 요구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정권이 몰락했다. 그건 몰락이다. 국민들이 마음으로 쫓아낸 부패한 권력. 그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생목숨들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그 시간에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는 사람이나 재난구호 책임자이면서도 제대로 사태 파악도 하지 못했던 장관들이나 관계 부처 관료들, 그리고 방송이나 제대로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는데, 그것도 하지 않은 배와 해경 관계자들... 여기에 정부에서 하는 말만 그대로 받아썼던 소위 기레기들.
 
기레기들 말만 믿고, 또 유언비어만 믿고 피해자들을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 
 
소설이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니다. 소설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다. 세월호는. 소설 제목이 '거짓말이다'다. 
 
무엇이 거짓말일까? 정부의 발표, 언론의 발표, 사람들이 들었던 일들이? 그렇다. 많은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여전히 세월호에 관한 진실은 안갯속에 있다.
 
안갯속에서 세월호를 꺼내야 한다. 아니, 안개를 몰아내야 한다. 안개를 몰아내는 방법, 그것은 진실을 밝히는 일밖에 없다.
 
이 소설은 민간잠수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수색작업을 했던 사람들.
 
누구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보상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지닌 능력으로 바닷속에 있는 사람들을 모시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권력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기에, 마치 전쟁 때 의병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났듯이, 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또 해야만 할 일이었기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바다로 달려왔다. 
 
그리고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한 명이라도 더 모시고 나오기 위해서. 데리고가 아니다. 모시고다. 소설에서는 분명 모시고 온다고 표현되어 있다.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가? 비록 목숨이 끊어졌다고 해도 소중한 존재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모셔야만 하는 그런 존재.
 
하지만 그런 민간잠수사들에게 나라는 어떠했는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다.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이 생활할 수는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참담하다.
 
나라 존재가 무엇인지, 위정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 점을 소설은 허구로 파고든다.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 꾸며냄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다. 4년이 지났음에도 세월호는 진행형이다. 밝혀야 할 사실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해결해야 할 일도 많고.
 
소설을 읽으며 최명란이 쓴 시 '베짱이'가 생각났다. 지금도 이런 베짱이들이 국회에 드글드글하니, 세상 일은 반복이 되는지. 학습효과가 없나 보다. 아니면 기레기로 통하는 언론들이 국민들의 귀와 눈을 막은 정도가 아니라 뇌 깊숙이까지 점령했는지도.
 
   베짱이
 
너 전생에 정치인었나 보구나
늘 같은 소리로만 울어대니 말이야
 
최명란, 결혼, 맛있겠다. 문학수첩. 2001년 초판. 35쪽.
 
한결같음이 짜증날 때가 있다. 십 년 넘게 한결같이 헛소리만 하는 정치인들을 보며, 그들을 소환할 방법도 없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하다.
 
소설에는 정치인은 나오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투로 국회의원들이 잠깐 언급되기는 하지만, 세월호 사건 때 정치인들은 제 역할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4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지. 같은 소리만 반복한 정치인들이다.
 
이 소설은 유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를 통해 세월호에 다가가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분명 구조 작업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는 골든 타임이 지난 다음에 그들이 배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엇하고 있었나? 민간잠수사들이 올 때까지 배 속에 있던 사람들을 구할 잠수사가 우리나라에는 없단 말인가. 그런 구조 팀이 나라에 없단 말인가. 분명 아닐텐데... 따라서 소설에서 주인공은 구조 작업이 아니라 희생자를 모시고 오는 작업이라고 한다. 너무 슬프게도)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단지 세월호 유가족들뿐만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고통받고 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진실을 밝히는 것뿐이다. 진실이 밝혀져야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누가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그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밝힌 다음 사람들 마음을, 몸을 치유해야 한다. 또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땜질 식 처방이 아니라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 
 
먹먹함 속에서 읽어나가는 소설. 하지만 읽어야 할 소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진실은 멀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소설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 이렇게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왔으면, 우리가 희망을 잡고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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