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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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속았다. 아니, 번역을 한 제목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로 몇 개 철자만 바꾸어 뜻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영어와 전혀 다른 언어인 한글로 번역을 했을 때는 영어로 말하는 말장난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 희곡도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유명한 작가를 연상하고, 그를 두려워하랴라고 하면 도대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희곡인지 뭔지 생각하게 되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았다는 사실, 가정 생활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희곡 내용을 상상하는데...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나오는 장면은 노래에서밖에 없다.

 

해설을 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노래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돼지들이 '누가 늑대를 두려워하랴'라고 부르는 노래를 비튼 것이란다.

 

울프... 늑대... 발음에서 같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말로 번역을 해놓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버지니아 울프와 이 희곡 내용이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마사와 조지는 부부지만, 또 손님으로 나오는 허니와 닉도 부부지만 이들에게 사랑이 넘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 젊은 부부인 닉과 허니는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주인공인 마사와 조지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

 

가족이 이렇게 되면 파탄날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지, 상대를 한없는 나락으로 이끌어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희곡이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서로를 헐뜯고 서로를 화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없던 이야기(아이)도 만들어내는 부부.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한 다음 만났다면 이들이 서로 상처를 주는 관계만을 지니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극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이런 관계에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우리가 꿈꾸는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가정에 대한 환상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한 관계, 그런 장소로 가정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만이 지닌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

 

자기 울타리를 지니고 상대방을 울타리 밖으로 자꾸만 몰아내는 말들, 그런 행동들을 하면 가정은 유지되지 않는다. 자기가 지닌 울타리에 문을 내고, 길을 내고, 서로 받아들여야지만 가정이 유지될 수 있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마사와 조지. 이런 가정이 지금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가장 평화롭고 사랑이 넘쳐야 할 가정이 비난과 폭력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적어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들 울타리에 문을 내고, 문과 문 사이에 길을 내야 하는데, 또 그 사이에 함께 할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는 말들만, 행동들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희곡이 오래 전 미국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들도 이 부부들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타산지석(他山之石)이어야 한다. 이 희곡을 읽으며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인지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삭막한 가정은 아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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