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로 된 무지개 - 다시 읽는 이육사
도진순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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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무지개'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지개인데 강철로 되었다니, 이 말로 안되는 역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이육사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고심을 했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교과서에서 통용되는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쓴 도진순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바로 무지개에 대한 해석. 이 시에 나오는 무지개를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형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해석하는 단초를 찾아온 것.

 

흰무지개. 이는 반역이라는 것. 당시 일제시대에 흰무지개라는 표현은 금지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육사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한 것은 겨울이 일제시대를 가리킨다면 강철로 된 무지개는 이런 일제시대를 깨부술 아주 강한 무기 또는 신념이라는 것이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사는 일제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는데, 시에서 일제에 굴복하는 듯한, 절망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겨울로 상징되는 혹독한 시련은 오히려 그 시련을 이겨낼 의지를 벼려내고, 무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작동한다고 이육사가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이육사였을테고, 그런 삶을 시로 표현한 것이 '절정'이고, 절정의 마지막 부분 표현이 바로 이런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 '청포도, 절정, 광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워서 읽으면서 감탄을 할 때가 많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때문이다. '청포도'에서 '청'자에 관한 문제... 푸른 포도를 의미하지 않고 '풋'이란 의미를 지닌 아직 익지 않은 포도라고 하는 것. 결국 청포도는 미래를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글자가 하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참,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광야를 넓은 들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고...

 

결코 광활한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고 삶을 살아가던 터전인 광야라는 것. 이 광야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다시 찾아 먼 미래에 그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

 

좋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단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육사가 한시에,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 이런 면을 이육사 시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새롭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 더 시를 꼭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사를 전공한 학자가 이육사 시가 지닌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알려주는 책이니,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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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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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아, 쌍용이구나!'하는 신음이 튀어나오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다시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 나온다. 이제는 좀 잊혀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니... 여기에 지금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지엠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들도 희망퇴직을 받고 있으니...
 
근 10년이 되어가는 그때의 일들을 소설을 읽으며 상기하는 일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되고, 또 이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니,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서 제목만 가지고는 쌍용차 파업 사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쩌면 노동자들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경영에서도 배제되었고, 또 파업을 할 때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 안정을 해치는 집단으로 매도되지 않았던가.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게 그들을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았던가. 그 고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 소설은 용역의 시점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오, 김무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씨 성을 따고, 이름은 무오다. 한자어인지, 한글인지 모르지만 제목과 연결을 시키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제목과 연결을 시키면 무오는 한자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무오(無吾), 내가 없는 사람. 즉 자의식이 없는,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 이런 무오같은 사람이 많으면 노동자들은 점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연결이 된 선이나 면, 입체가 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여기서 무오는 그렇게 나온다. 그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다.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이 없는 그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그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이부. 이름 참, 고약하다. 이부라니...
 
그냥 뜻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기껏 생각하면 두 번째 아빠나 다른 아빠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없는 무오에게 용역일을 시키는 사람. 무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 그러니 그는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이다. 
 
무오가 용역으로 파업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파업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인데,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무오는 자의식을 만들어가게 된다.
 
비록 점으로 있는, 사회에서 점 취급을 받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고립되어 가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이 그 점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유대를 맺고 있음을 무오는 점점 깨달아 간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이런 무오의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되기에 소설 속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이 한 다리 건너서 전해진다.
 
공지영이 쓴 "의자놀이"에서 아프게, 마음 속으로 콕콕 찍어 박히던 그런 아픔과는 다르게 소설은 거리를 두고 파업 현장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자의식이 없는 무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효과다. 그렇다고 파업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파업 주동자였던 이자희가 무너져 가는 과정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해고는 살인임을, 이들이 얼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어떻게 사람이 망가져 가며, 가정이 해체되어 가는지를 이자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을 만들고, 면과 면이 모여 입체가 되어 자기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우리는 파업 노동자들이 계속 점으로만 지내게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통해 이자희의 모습을 작가 시점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현실임을.
 
이제 개정될 헌법에서(발의가 될지 안 될지 아직은 미지수지만)는 근로란 말을 노동이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사회가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이 정당함을, 그들이 결코 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됨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먹튀 자본가는 있어도 먹튀 노동자는 없으니, 그런 먹튀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함을, 이 소설, 용역의 눈으로 파업 현장을 서술한 이런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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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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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곱 명의 소설가가 각자의 작품을 써서 엮은 책이다. 그렇다고 모두 여성이 피해를 본다든지, 여성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든지 하는 주제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꼭 여성의 권리 운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역시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권리를 이야기하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첫소설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에 의해 약한 존재,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서 깨치고 나오게 되는지를 편지 형식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보호해야만 할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들을 따라야 할 존재로만 여기고 행동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남성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행동들 중에 많은 부분이 여성들을 그런 틀에 가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부수고 나오는 것, 어쩌면 몇 배로 힘든 일일지 모른다.

 

우선 자신들이 약하고 보호받을 존재로 규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지만 꼭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고.

 

첫소설인 '현남오빠에게'에서 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면, 두번째 소설에서는 그렇게 깨고 나왔어도 주변의 틀이 여전히 공고함을 주인공인 유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신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습을 대물림하려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독립해 나왔음에도 여전히 가족의 틀에서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진의 모습을 '당신의 평화'란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인의 문제에서 이제는 가족의 문제까지 확장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여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리 천장과 유리 벽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년'이라는 작품은 여러 가지가 섞였다. 그럼에도 여성을 중심에 놓는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엿볼 수가 있다.

 

'청소년 성'에 대해서도 남학생과 여학생을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그런 모습, 여전히 가시고 있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런 왜곡된 성의식과 성적지상주의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우리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양성불평등 사회로 이끄는지 너무도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읽으면서 조금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화성의 아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여성이 핍박받는 모습을 서술하지 않고 잘못된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응해 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사람의 모습이 부각된다. 페미니즘이 남성-여성의 이분법 구도에 갇혀 있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 인간답게 사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주제로 이런 소설이 묶이는 것도 어색하다고 할 수 없단 생각을 한다.

 

이 작품집에서 섬뜩한 작품이 있다. 공포물이나 폭력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러나 추리물에도 가까운 그런 소설,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여장 대회에 참가한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소설. 소설에서 남성 주인공은 마지막에 '히파티아'를 떠올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찢어죽임을 당한 수학자. 마찬가지다. 그만큼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박해가 있었는지, 거기에 무슨 합당한 이유를 댈 수가 없다.

 

소설 속에서 초대받은 남성들은 여성을 차별하거나 성추행을 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그래도 약간의 이유가 있지만, 역사 속 여성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추방, 감금, 죽임을 당해왔다.

 

그런 모습을 거꾸로 표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주인공을 성추행 경력이 없는 사람으로 삼았다는 것. 그가 친구를 대신해 참가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방관자인 남성 역시 가해자일 뿐이라고, 그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난 아니야 하고 발을 빼고 있는 남성들에게 이 소설은 너희들도 같은 족속이라고,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방관은 동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하나로 엮여 있지만 내용은 다 다르다. 이만큼 페미니즘이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이렇듯 페미니즘을 꼭 여성주의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은 인간주의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 이 사실에는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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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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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이 바뀌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대학 때 등산동아리에 속했던 주인공이 만났던 여자 선배 차승연이 했다는 말.

 

등산 동아리에서 여자 회장이 나오는 걸 보겠다... 결국 10년이 걸렸다는 말로 전개가 되지만, 대학 동아리 회장을 여성이 하는 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대학을 졸업한 김지영이 입사한 회사에서 여성들이 처한 위치는 이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 여성 팀장은 김은실 팀장이 지내온 과정은 여성을 지우는 과정이었고, 그 팀장이 여성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건 개인의 노력일 뿐이고, 회사에서 구조적으로 양성평등을 이루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무려 2000년대에.

 

19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른이 되면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대학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이 태어난 때인 1980년대 생들이 사회 생활을 할땐 이들이 사회의 주축이었다.

 

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룬 시대에 과연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은 변했는가? 양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본이라면, 과연 그러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봇물터지듯이 나오는 #미투 운동 역시 우리 세상이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여성의 삶을 파노라마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설에서 느끼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 인물과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보고서, 다큐멘터리 대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한 여성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기까지 사회가 가한 폭력에 대한 보고서.

 

나중에 의사인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해 이런 느낌을 더 전해주고 있는데, 그래서 어떤 긴장감 없이 그냥 주욱 읽어나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이 살아오고 또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소수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편견에 차 있고,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절반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그들을 소수자로 늘 배제하고 편할 때만, 필요할 때만 자신들에게 끌어오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름 여성의 삶을 이해해 준다는 남편 정대현과 아내 김지영이 임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절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게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나, 나도……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 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136-137쪽)

 

이런 차이가 있다. 남자는 자신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집안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남자보다 좀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소설 속 정대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집안일은 돕는 것이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은 당연히 아내인 김지영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하다. 그리고 사회 역시 변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공무원이나 교사를 직업으로 원하는 이유는, 육아 문제에서 그래도 조금은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분야에서 일한다고 전적으로 양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다른 직업 분야보다는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정도 되는 직업이 우리 사회 모든 직장이 지닌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바로 소설의 서술자인 정신과 의사가 하는 말. 김지영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이 남성의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175쪽)

 

김지영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여성이 어떻게 해서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는지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인 남성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양성평등을 개인에게만 미루어서는 안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82년생 김지영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김지영을 둘러싼 남성들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고.

 

#미투 운동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양성평등에 대해서, 진정한 민주화에 대해서, 적어도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된 사회에서, 또 그들 뒤에 기성세대가 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본은 양성평등, 소수자 차별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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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2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탄잘리 열린책들 세계문학 151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지음, 장경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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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고 있는 작품이 참 많다. 그냥 너무도 많이 들어서 마치 읽은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 그래서 이 작품들을 끝까지 읽기는 힘들다. 그냥 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너무 친숙한 느낌을 주는 책.

 

타고르의 '기탄잘리'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학생 때 동양인으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일제시대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작가. 그가 쓴 대표작으로는 '기탄잘리'가 있다고 배웠다. 이게 다다.

 

시 제목인 '기탄잘리' 뜻도 모른 채.

 

이런 작품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한다. 우선 '기탄잘리'의 뜻. 이 책 옮긴이의 말에 잘 나와 있다.

 

'『기탄잘리』는 103편의 시로 이루어진 영문 시집으로,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 자신이 벵골어로 된 자신의 여러 시집에서 일부를 뽑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한편, 시집의 제목으로 남아 있는 벵골어의 단어인 <기탄잘리>는 <노래>를 뜻하는 <기트git>와 <바침>, <올림>을 뜻하는 <안잘리 anjali>를 합친 것이다. 즉, <기탄잘리>는 <노래를 바침>의 뜻을 갖는데, <바침>의 대상이 절대자 또는 신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신에게 바치는 노래>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205쪽)

 

이게 시집 기탄잘리의 뜻이다. 언뜻 읽어보면 사랑시같지만 그 사랑이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 즉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 한용운이 생각난다. 한용운이 낸 시집 '님의 침묵'에 나오는 수많은 님들... 그 님들을 해석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통상 세 가지로 나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님, 또 하나는 조국, 또 하나는 부처님(절대 진리)이라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사랑시이자 애국시이고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시가 되기도 한다.

 

타고르의 이 시들도 마찬가지다. 님이 나오는데 굳이 이 님을 한 가지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다양하게 해석이 되기에 더 넓고 깊은 울림을 주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첫번째를 보자. 시에는 각자 숫자가 붙어있는데 1부터 103이다.

 

1

 

  님은 나를 언제나 새롭게 하시니, 여기에 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빈약한 이 그릇을 님은 비우고 또 비우시며, 언제나 신선한 생명으로 채우고 또 채우십니다.

  언덕 넘어 골짜기 넘어 님이 가지고 다니는 이 작은 갈대 피리는 님의 숨결을 받아 영원히 새로운 가락을 울려 왔습니다.

  님의 불멸의 손길에 내 작은 마음은 기쁨에 젖어 그 한계를 잊고, 표현 불가능한 것들을 말로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님이 나에게 주는 무한한 선물은 오로지 아주 작은 이 두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님은 나를 채워 주시지만, 나에게는 아직 채울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23쪽)

 

그렇다. 님에게 나는 한없이 작은 그룻에 불과하겠지만, 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님의 사랑은 내 그릇과 상관없이 늘 내게 베풀어진다. 영원히 쉬지 않고.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님을 기리는 노래, 님에게 바치는 노래. 그것은 자신이 삶을 잘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기만 하는 님, 늘 채울 자리가 비어 있는 내게는 삶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삶은 정해지지 않았고, 끝나지도 않았으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끊임없이 님을 생각하며 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님이 사람이든, 신이든, 나라든 상관없다. 이런 마음, 이런 태도를 지니면 된다. 그것이 삶에 충실한 자세, 님을 사랑하는 자세다.

 

이런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기리는 시를 썼다고 한다.

 

일즉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빗나는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비치 되리라  

 

1929(68세) 조선에 관한 시 한 편을 [동아일보]에 보냄. 주요한의 번역문이라고 이 책 213쪽에 실려 있다.  원문 그대로 표기했다. 이 책에 보면 영인한 사진이 나온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천천히 한편 한편을 읽어보면서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보자. 비록 번역문이지만 말의 울림으로도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의미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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