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별들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박일환 지음 / 우리학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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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소설은 내가 살지 않은 삶을 등장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실제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도 소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소설은 나로 하여금 다른 인생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며, 다른 인생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소설을 읽게 만든다. 비록 마음을 힘들게 할지라도 소설을 통해서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세월.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약인 '망각'이 작동해서 고통도 약해지고, 슬픔도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세월은 우리를 치유로 이끈다. 이마저도 없다면 우리 인간은 슬픔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고 말리라. 

 

이처럼 세월이 우리를 치유로 이끄는데, '세월호'는 여전히 우리를 슬픔으로 이끈다. 지속적인 슬픔. 아직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여전히 미수습자로 남은 사람들이 있기에... 비록 3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월호는 망각이라는 약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통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에는 망각이라는 약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약이 통해야 한다. 그 약을 우리는 평생 간직해야 한다. 그 약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겠지만, 오히려 그 약이 바로 세월호의 슬픔을 이겨내는 힘이다. '망각이 아닌 기억'

 

하여 세월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만났다. 그럼에도 읽기에 망설여진다. 쉽게 책장을 펼치지 못한다. 여러 번 마음을 추스린다. 다잡는다. 읽어야 할까, 말까... 공연히 읽어서 눈시울을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 분명 읽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떨글텐데... 아직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가.

 

제목에서 슬픔이 뚝뚝 묻어난다. 별들이 하늘로 가지 않고 바다로 갔으니, 그래서 읽어야 한단 생각을 한다. 별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바다로 간 별들"이라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던 별이 바다로 떨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주인공은 민지는 생각한다.

 

너희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게 아니라 거꾸로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너희를 삼킨 바다 위로 말이야. 한꺼번에 바다로 간 별들, 그게 바로 너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지난 4월의 바다는 슬픈 바다, 통곡의 바다가 되었던 거고. 그렇다면 하늘의 별을 보며 너희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바다로 가 버린 너희의 영혼을 먼저 건져 올려야 하는 게 순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209-210쪽) 

 

읽기로 마음을 정한다. 바다로 간 별들의 영혼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슬픔을 외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눈물 방울이 더 떨어져 눈물의 힘으로 건져 올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눈물을 흘려도 좋으리란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때로는 이들의 좋았던 추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간 그 사건에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며, 살아남은 친구들의 슬픔에 공감을 하기 한다.

 

그렇게 소설은 주인공 민지를 중심으로 중학교 때 만났던 아이들이 등장한다. 친했던 친구 수경, 민지를 좋아했던 남학생 민석, 민지와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하지만 같은 반이었던 경호. 그리고 '오죽하면'이라는 팀이름으로 함께 춤을 추던 친구들.

 

이 중에 단원고로 진학한 수경, 민석에 대한 이야기를 민지를 중심으로 펼쳐가고 있다. 단원고 학생이 아니었음에 살아남아 친구를 잃어야 했던 민지, 그 민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친구들. 이런 민지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민지가 겪었던 일들을 함께 겪게 된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기억하게 된다.

 

어른의 관점이 아닌 친구의 관점에서 세월호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겨나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바로 이들의 이야기이고, 이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민지를 통해 '세월호'를 겪어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극복해가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하여 슬픔을 통해 슬픔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민지는 잊지 않기로 한다. 기억을 해야 한다. 슬픔 역시 외면하지 않는다.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슬픔을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야만 세월호는 잊히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

 

그러나 아무리 슬픔을 이기려 해도 소설 속 슬픔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거부해서도 안 된다.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자. 그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마음 먹고 소설을 읽는다.

 

작가 역시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이 소설을 너무 슬픔으로만 읽어 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슬픔을 넘어 그들이 미처 펼치지 못한 꿈들을 받아안고, 그들을 대신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223-2224쪽)

 

세월호에 관련된 소설... 그렇다. 소설을 슬픔으로만 읽지는 않는다. 슬픔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바꾼다. 슬픔을 '기억'으로 바꾼다. '기억'을 '행동'으로 바꾼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기에...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책임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게 '행동'해야 함을, 소설을 통해 온몸으로 느낀다.

 

소설의 끝부분, 민지의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잊지 않을 거야. 내 친구들을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간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눈물이 나지만 참을 거야.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그건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눈물이 될 거야. 속으로 뇌고 또 뇌었다. 울컥, 하는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지겠지만 그런 순간들조차 슬픔을 넘어서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 줄 거였다. (218쪽)

 

이 소설, 그런 디딤돌이 될 것이다. '바다로 간 별들'이 이제는 하늘에서 영롱히 빛날 수 있게, 그들의 영혼이 하늘로 갈 수 있게, 우리가 기억하고 행동하게 하는 디딤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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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5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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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의 [작가의 객석]을 읽다가 윤중호를 발견했다. 발견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는 그를 수필가나 또는 기자로서 문학판의 주변을 관찰하고 글로 써서 남기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책에서 윤중호가 시인이라는 사실, 그 시가 왜 가슴을 울렸는지, 무언가 슬픔이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그런 시를 만났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소개로 윤중호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윤중호의 글을 통해서 만나야 한다. 시인이니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을 만나는 태도다. 어떤 시를 만나는가는 독자의 마음이니, 나는 그의 유고시집을 골랐다.

 

제목도 '고향 길'이다. 고향, 그리움을 자아내는 말. 그러나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들이지 않은가. 이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없다. 고향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현대인들은 뿌리뽑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고향 길'이라는 시가 마음에 와 닿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물리적인 고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는 모두 마음의 고향이 있다. 그런 고향에 대한 정서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고,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와야만 하는 미래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다.

 

하여 '고향 길'이라는 제목은 아득함과 아늑함을 동시에 주고 있다. 시집을 읽으면 시 한 편 한 편이 마음을 파고든다. 시집 뒷부분에 있는 김종철이 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시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쓰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충청도 사투리가 여과없이 드러나 있는 시가 있음에도 시들이 모두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냥 그렇게 아득한 과거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아늑함이라니.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시.' ('영목에서' 부분. 10쪽)

 

이게 젊었을 때 우리 모습 아닌가. 과거를 치열하게 부정하며 오직 현재와 미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젊은시절. 산업화로 과거를 모두 밀어버리던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습. 그러나 이런 시는 없다. 이런 삶은 없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 티나지 않은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삶은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고 물 흐르듯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영목에서' 부분. 10쪽)

 

'아무 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영목에서' 부분. 11쪽)

 

이게 바로 이 시의 핵심이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흔적을 억지로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 삶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자연스러움은 산업화된 현재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끼리 함께 살던 공동체가 살아 있던 과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니다. 단지 과거가 아니다. 이 과거는 바로 미래다. 오래된 미래. 윤중호는 나이를 먹어서야 이 오래된 미래를 보았다. 우리게에 보여줬다. 이 시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 것도 이룬 바 없는 사람, 이것은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자연스럽게 살아왔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의 삶은 자연과 사람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시인은 완두콩에서 바로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을 본다.

 

  완두콩

 

콩깍지 속에

새파랗게 빛나는 완두콩 여섯 개

곰실곰실 누워 있다가

콩깍지를 터니, 부시시 깨어나

서로 몸을 기대며 웅크립니다.

무심코 콩깍지를 훑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완두콩마다, 콩깍지에

허연 탯줄을 달고 있었거든요.

 

윤중호, 고향 길, 문학과지성사. 2005년. 초판 2쇄. 65쪽.

 

이토록 아름다운 시라니. 완두콩에서 발견하는 공동체, 또한 생명의 모습. 어떻게 감히 생명을 하찮게 여길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시인이 함부로 무엇을 이루려고 할 수 있을까.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 그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나. 단 몇 분도 흙을 밟지 못하는 삶, 하늘을 올려다 볼 시간을 거의 갖지 않는 삶.

 

주변 사람을 돌아보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는 삶.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들은 모두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판단하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시인의 이 시집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탯줄은 무엇인가. 우리는 탯줄을 아무 생각 없이 잘라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고향 길... 단지 떠나온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는 얼굴들 모두 신작로 따라 대처로 떠나고, / 이제 내가 아는 얼굴 되어, 신작로 끝 / 빈집, 불 밝혀야 하나.'('고향 길 2' 부분. 23쪽)라고 하고 있다.

 

시인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이제는 고향 길에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빈집, 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윤중호, 그는 뜻하지 않게 갔지만, 그의 시는 남아서 이렇게 우리에게 불을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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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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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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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0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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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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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홍성담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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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그의 죽음 뒤로 음악이 흘렀다

 

홍성담의 글 제목이다. 이야기라고 해도 좋고, 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 사회를 꼬집고 있는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의 모습이 난장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고, 이런 사회를 고쳐가는 모습이 바로 난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제목이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던 우리 사회를 난장을 통해 바로잡지 않았던가. 민중들의 난장과 지배자들의 난장은 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홍성담의 제목에서 우리는 이 두 개의 난장을 읽을 수 있는데, 결국 민중들의 난장이 지배자들의 난장을 몰아낸다는 쪽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죽음 뒤로 음악이 흘렀다'라는 또다른 제목이 심상치 않다. 죽음과 음악이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 책의 중간을 넘어서면서 갈 길이 막힌 영혼들이 탈출하기 위해서 벌이는 난장 속에서 바로 음악을 발견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꼭두무사들 역시 죽은 뒤에 상여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월호로 죽은 아이들의 영혼 역시 음악을 듣지 못했다. 이런 비극적인 죽음 뒤에는 음악이 없다그러나 죽음 뒤에는 음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혼들을 보내주는 행위다.

 

세월호의 어린 영혼들이 상여소리를 부르면서 음악이 시작된다. 그들은 이 음악을 자신들만이 아닌 꼭두무사들과 함께 한다. 곧 난장이 된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음악 속에 빠져든다.

 

음악은 영혼을 위로해주고, 영혼이 제 자리를 찾아가도록 해준다. 그런데 이런 음악을 거부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억울한 죽음은 풀어주어야 할 무엇이 아니고 감춰야 할 무엇에 불과하다. 하여 민중의 난장에는 음악이 있지만, 지배자들의 난장에는 음악이 없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오현주를 쫓고 제거하라고 하는 '검은손'이라고 불리는 지배세력, 검은손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검은손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 이기심들이 만들어낸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두려움을 없애고,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이런 검은손은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신랄한 풍자가 돋보이는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해원이 되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책을 통해서 세월호 영혼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홍성담이 목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난장을 벌이는 지배자들을 또다른 난장으로 몰아내는 일.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 마냥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풍자를 통해 그들을 우리에게 불러오는 일, 우리들의 난장에 그들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그들의 영혼이 하늘로 가게 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홍성담의 이 난장, 통쾌하다. 이렇게 통쾌한 글, 예전에 김지하의 '오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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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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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경기에서 승부차기를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승부차기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너무도 큰 불안감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페널티킥을 얻어 차는 선수 역시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골키퍼는 막으면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고, 막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반면에 차는 선수는 골을 넣으면 당연한 일이고, 넣지 못하면 그것도 못 넣느냐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페널티킥 앞에서 누가 더 불안을 느끼겠는가. 골키퍼가 아니라 차는 선수여야 한다. 그런데... 제목은 반대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골키퍼다. 왜 그럴까? 주인공이 골키퍼 출신이어서?

 

아니다. 골키퍼는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불안에 떤다. 삶에서 지킬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이기도 하지만 불안이기도 하다.

 

그 점을 골키퍼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인공은 블로흐는 골키퍼 출신으로 어느 날 직장을 그만둔다. 이상하게 현장감독이 해고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지레 짐작으로 직장을 그만둔다.

 

현장감독이 아무 소리 안 한 것을 해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와 소통을 하지 않고, 자신이 판단해 버리는 것, 그것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들이 하는 일이다.

 

차는 선수와 골키퍼, 이들은 서로를 속여야 한다. 서로가 소통이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서로 지레짐작으로 이러겠거니, 저러겠거니 하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다.

 

어쩌면 삶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다. 블로흐가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도 소통의 부재이지만,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도 그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다.

 

극장 매표원과 하룻밤을 자지만, 그녀를 죽여버리고, 죽였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사람들 누구하고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국경 근처 마을까지 가서도 그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는 문장을 생각해 내고 완성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문장을 완성한다는 것, 그것은 소통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과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소통을 하지 못한다.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꾸만 어긋날 뿐이고, 그의 행동 역시 제대로 되지 못한다.

 

술집에서의 싸움, 자꾸만 어긋나는 통화, 그리고 대화... 이런 관계들...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모습은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고 하지만, 이제 블로흐에게는 지켜야 할 무엇이 없다. 지켜야 할 것이 없으니, 상대의 의도를 읽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않으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누구와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블로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최소한 지킬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사회 속에서도 겉돌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결국 우리는 소통을 해야 한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완성된 말로 남에게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블로흐가 아니라, 문장을 완성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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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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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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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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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가정을 꿈꾸는 부부. 때는 1960년대. 이들은 아이를 많이 낳고, 전원주택에서 대가족의 삶을 꿈꾼다. 마치 중세의 귀족 가족들이 자신들만의 성에서 삶을 살아가듯이.

 

남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 지금 시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부에게는 많은 아이와 함께 살며 다른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습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나, 둘, 셋, 넷. 이때까지만 해도 부인인 해리엇은 지쳐가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은 유지한다. 표면상으로 이들은 아직은 행복한 대가족이다.

 

시대는 이미 1970년대가 되었다. 중세의 삶에서 멀리도 온 때. 이 때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이 아이는 임신 때부터 다르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1970년대는 인구 억제정책을 쓰는 때다.

 

많은 아이가 자랑인 시대가 아니라 부끄럼인 시대다. 이런 모습을 해리엇의 동생이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다는 얘기로 형상화된다. 정상성을 벗어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운증후군 아이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 명확하게 장애임이 표가 나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원하는 가족은 이렇게 표가 나는 상태는 아니다. 그냥 이들은 많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행복은 지속될 수 없다. 다섯째 아이는 지나치게 크고 힘이 센 상태로 태어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상적인, 아니 의사가 판단하기엔 정상범주에 드는 아이지만 이 가족의 기준에 다섯째 아이는 정상이 아니다.

 

아이에게 정상의 시선을 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를 내치지 못하는 모성. 이 아이 하나로 인해 친척들이 멀어져 간다. 나머지 아이들도 하나하나 가정을 떠나간다. 남편 역시 가정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어머니인 해리엇 역시 가정의 행복에서 멀어진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저 다섯째 아이가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 뿐인데, 가정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 해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집을 팔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가정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다름이 비정상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버리든지, 다른 아이를 포기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 선택도 행복한 가정이 될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은 이미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름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 이미 정상의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에서 벗어난 아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아이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지 않고, 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는 오히려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가족은 다름을 포용하고 함께 하는 것인데, 다름을 배제로 바꾸어버리는 순간 이 가족은 깨질 수밖에 없다. 해리엇이 모성으로 아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 모성을 다른 가족들은 자신들에 대한 배제로 받아들이지만, 해리엇조차도 다섯째 아이(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섯째 아이인 벤은 가족을 해체한 아이, 남과 다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아이에게는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지 않는다. 소설은. 그게 더 소설답다. 결론은 없다. 이 결론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름을 우리는 배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다름이 있는지... 그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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