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에 읽은 책이다. 그때는 사회-역사 지식이 부족해서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또다른 동물이 독재를 한다 정도로만 이해하고 말았던 책이다.

 

다시 나이들어 읽으면 그동안 살아온 것들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책 해설에서도 나오지만 책이 발간될 당시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풍자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소설이 발간된 지도 70년이 넘었고, 그만큼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고, 또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던 것이 이제는 종교 대립이나 경제 대립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지금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오웰이 풍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소련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바로 소련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의 반란은 민중들의 혁명이고, 정권을 잡은 돼지는 스탈린이며 쫓겨난 돼지는 트로츠키라는 것. 그리고 한없이 일만 하다 죽게 되는 복서(말)는 프롤레타리아를 의미한다는 것. 여기에 스퀼러라는 돼지가 나오는데, 이는 왜곡된 언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민중은 혁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그 혁명은 곧 몇몇 권력가들에 의해 배신당하게 되고, 민중들의 삶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

 

얼핏 보면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소설같지만, 사회주의라는 이념보다는 스탈린이라는 권력자가 사회주의 이념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 (어쩌면 그는 아나키스트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동물농장 말고 또다른 글이 두 편 실려 있는데, 한 편은 '자유와 행복'이다. 인간에게 자유와 행복은 양립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독재자들은 양립할 수 없고, 행복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롭지 않은 행복이 어떻게 행복일 수 있을까? 동물농장에서 다른 동물들은 서서히 자신들 자유를 잃어간다.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잃어가는데, 이들 삶은 점점 버거워지고 힘들어진다. 반면에 몇몇 권력자들은 점점 더 살찌게 되고.

 

그러니 우리는 자유와 행복은 양립해야 한다고,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이 점을 '동물농장'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동물농장'은 단순히 스탈린 체제에 있던 소련 사회를 풍자하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들이 잘살기 위해서 벌이는 일들이 바로 '자유와 행복'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는 일이라는 것.

 

인간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들은 그래서 자유를 획득했지만, 곧 자유는 구속당하고, 행복은 강요당한다. 강요된 행복은 왜곡된 언론에 의해서 진정한 행복인 것처럼 가려지지만, 그렇다고 진정으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점점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돼지와 인간들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많은 동물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혁명은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하다. 혁명 이후 발을 잘못 디디면 혁명 전과 같은 상황으로, 아니 더 나쁜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동물농장'에서 권력을 쥐게 되는 돼지들 말고, 다른 동물들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던 복서가 결국 팔려가, 권력자들 향연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이 소설이 씌어졌다고 보면 된다. 또다른 글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물농장'은 내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143쪽)

 

한참 세월이 흘렀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혁명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서 지금도 유효하다.

 

혁명 자체도 중요하지만,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함을 소설은 생각하게 한다. 혁명 이전의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소수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것,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언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민중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깨어 있더라도 참여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소설에서는 당나귀 벤자민이 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혁명 이후를 예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이 점도 경계해야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사회-역사와 관련지어 읽으면,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꿈꾸며 읽으면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4-23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3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칼의 아이 라임 청소년 문학 12
은이결 지음 / 라임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집단 생활을 한 다음에 전쟁이 없던 시기가 있었을까? 짧은 평화, 긴 전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다. 일방적인 폭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작은 전쟁들이 지속되기도 한다.

 

이런 전쟁들 속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과 아이이다. 그러면 여성 아이는 더 큰 피해를 본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사는 생물 중 가장 고등하다는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몸 속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이 얼마나 여성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전쟁 장면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은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여성 아이에게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단지 여성 아이뿐만 아니라 힘없고 약한 백성들에게는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감내해야 한다. 양반들과 달리.

 

비극적인 건, 어떤 사람들이 '화냥년'이란 말의 어원으로 '환향녀'라는 말을 들고 있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양반들, 권력자들, 자신들이 잘못해서 청나라로 끌려가게 해놓고, 이들이 돌아왔을 때 정조 운운하면서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한 말. 환향녀. 이 소설에서도 끌려갔다 돌아온 작은 마님이 결국 추운 겨울에 냇가에서 몸을 씻어야 하고, 결국은 차가움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비극들, '칼의 아이'라고 하는 제목이 언뜻 '에밀레종'을 연상시킨다. 종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쳤던 먼 과거의 일들. 이번에는 왕에게 바칠 칼 '사진검(四辰劍)'을 완성하기 위해 바칠 아이, 행이. 행이를 둘러싸고 청나라 사람들에게 누이를 빼앗긴 부칠이, 그리고 행이 쌍동이 동생 만우. 행이와 함께 지내는 옥란이라는 양반집 규수. 칼을 만드는 도검장.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왕, 그러나 그 왕을 잃으면 자신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왕이 권력을 쥐도록 신묘한 기운을 얻고자 하는 신하. 그 신하가 이야기한 검, 사진검.

 

사인검(四寅劍)은 있어도 사진검은 없다. 사인검이 호랑이 해 호랑이 달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만들어진 검이라면 사진검은 용 해에 용 달, 용 날, 용 시에 만들어진 검이다.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서 이때 태어난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다. 왕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 사람의 생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양반들의 모습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지금 정치권들 모습의 원조라 할 만하다.

 

소설은 행복한 결말, 인과응보로 어느 정도 가다보면 결말이 예측가능해진다. 이런 결말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소설 결말에 안도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조차 힘없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은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다는 사실.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그런 희생이 더 힘없는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힘있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겪는 삶은 마찬가지로 힘듦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최부사 댁 딸 옥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남독녀라고 오냐오냐 하면서도 정략적 결혼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것, 딸의 무참한 죽음 앞에서도 제 부와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최부사의 모습. 눈 먼 충성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판서. 여기에 여성이 한 사람으로 당당한 한 생명으로 존중받는 모습은 없다.

 

사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전쟁으로 인해 더욱 피해를 보는 여성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과거 오래된 역사를 배경으로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 돕는 모습, 결국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우리 삶도 이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4-2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0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은 하트 라임 청소년 문학 20
김선희 지음 / 라임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 한 번뿐인 삶. 그러나 이런 삶을 살아가는 데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은 얼마나 될까? 이상하게도 선택보다는 주어진 삶을 산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지 않는가.
 
선택할 수 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삶. 청소년기에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선택보다는 시키는대로 해야만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래야 해, 이것을 해야 해. 이것은 하면 안 돼. 우리는 이렇게 쉽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아정체성을 지니게 되는 시기라고 하면서도 막상 청소년들이 선택을 하려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신들을 따라 하라고, 자신들이 제시한 길로만 가라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작품들을 읽어보면 어른들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작가는 어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들이 많은데, 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명확한 결말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끔찍한 미래가 기다라고 있는데도 그 미래로 걸어 들어가는 청소년을 그리고 있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한때 일진이었다가 자신의 미래를 만나고 마음을 바꾼 검은 하트. 소설 제목이 된 검은 하트는 김요정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주인공은 배진익이라는 아이다.
 
진드기라는 별명으로 김요정에게 불리는 진익이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짜장면 집을 하는 진익이네, 엄마, 아빠, 외삼촌과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진익이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서술되고 있다.
 
한 학기 동안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자기 삶을 선택하게 되는 진익이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진익이의 성장을 돕는 인물로 김요정이 나온다.
 
김요정은 이름과 달리 초등학교 때 검은 하트로 이름을 날리던 일진 짱이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사는 삶을 선택한 평범한 중학생이다.
 
'우주로탈출프로젝트'라는 밴드를 결성한 친구들이 학교 축제에서 무대에 올라 신나게 연주를 하고, 그 영상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면서 김요정이 검은 하트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김요정은 이 일로 인해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밴드에서 탈퇴하게 되고 밴드 구성원들에게도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이때 선택의 기로에 선 진익. 그는 김요정을 감싸게 된다. 
 
과거는 과거일 뿐.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집요하다.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는데 학교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단단하게 뭉쳐 가해자가 되는 모습은 섬뜩하기만다.
 
그런 벽에 맞서는 진익 역시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동조받지 못하는 행동. 그러나 진익은 피해가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까. 고민을 통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까.
 
마찬가지로 김요정 역시 이런 행동을 취한다. 과거 자신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아이들이 괴롭히더라도 그 잘못한 값으로 여기겠다는 것. 그렇게 새로운 자신의 삶, 일진으로서 돈을 뜯을 때보다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마음은 더 편하다고 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
 
진익은 그런 김요정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게 된다. 어른들이 준 선택지 속에서 고르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살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물론 확실히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제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한 청소년이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해 간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성장은 집단의 힘 앞에서 무력할지도 모른다. 김요정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런 김요정을 지지하는 진익 역시 힘든 생활을 할 것이다. 
 
피해자임을 내세우면서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벽은 얼마나 단단한지, 이렇게 포용이 아니라 배제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이 아닌지, 소설을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희망이 느껴진다. 김요정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이고 진익은 많은 고민 끝에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 그것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고, 그런 삶 앞에서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을지라도 피하지 않을 대상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판본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1873년 브뤼셀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프랑스어 원본 수록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지음, 이한이 옮김 / 그여름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다. 랭보 시집인데 초판본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여기에 프랑스어 원본까지 실려 있으니 랭보 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시집이다.

 

그러나 랭보 시집이라고 해서, 많이 유명하다고 해서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 시집 역시 랭보가 젊었던 시절에 쓴 시집인데, 그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의 시집은 대부분 젊은 시절의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들이 실려 있다고 보면 되듯이, 직설적인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젊은 시절 삶은 희망으로 충만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으로 꽉 차 있기도 한다. 바로 랭보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시집에 나오는 절망들, 지옥이라는 말들이 젊은 날 랭보가 얼마나 고뇌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 시를 번역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지만, 사실 시는 번역불가능하고, 오히려 시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시가 세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바꾼 것인데,그것을 또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은 창작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두 번의 창작과정을 거친 시를 읽으면서 이해하기는, 또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참 어렵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시다.

 

무언가 감정과 욕망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내가 랭보의 시에서 알고 있던 모음에 색깔을 덧씌운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있었다는 것.

 

'망상2 - 언어의 연금술'에 이 시가 나온다. 아니 이 책은 시집이라고 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냥 읽으면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 그냥 그렇게 산문을 읽는데, 그 산문 속에 시가 들어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모음에 색깔을 부여한 것이 나중에 '모음들'이라는 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는 행구분이 전혀 없이 그냥 줄글로 나가고 있으니...

 

이렇듯 랭보를 유명하게 해준 시집을 읽었는데, 그다지 감흥을 못 느끼고, 왜 당시 사람들이 랭보의 시에 열광했을까 하는 생각.

 

당시 감정들을 감추고 속이고 온유하게 표현하는 풍조에서 자기 감정을 직설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랭보의 시가 충격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냥, 그렇게, 읽은 시집.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4-16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4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25 0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멧돼지가 살던 별 문학동네 청소년 36
김선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멧돼지. 요즘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는 동물이다. 산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사람이 사는 도심지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위협하는 동물. 그래서 허가 받은 사람들에 의해 사살되거나 포획되는 동물.

 

메나 뫼라는 말이 산이라는 말이니, 멧돼지는 산돼지라는 말이다. 사람이 길들여서 집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돼지가 아니라 산에서 자유롭게 사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멧돼지가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온다? 이유는 단순하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먹을거리가 없을까? 그 이유도 명백하다. 사람들이 모두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멧돼지가 살아가는 공간을 인간들이 하나하나 침범하고 그곳에 건물을 세우고, 숲을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멧돼지도 인간들이 좋을 리가 없을텐데도 사람 근처로 내려오는 이유는 그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 길을 막아놓아 살기 위해 내려오는데 유해동물이라고 피하고 또 죽이기까지 한다.

 

완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멧돼지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사람에게 투영한다면 어떻게 될까? 힘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가 멧돼지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잡아서 가두거나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죽여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것이 이 소설 "멧돼지가 살던 별"을 읽으면서 멧돼지 취급을 받고 사는 '유림'이란 아이에게서 느낀 점이다.

 

아버지 홍기수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자기가 아이에게 뭘 잘못했느냐고... 보호자로서 아이가 잘되게 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것 밖에 없다고.

 

그 폭력이 철저히 자기 입장에서만 판단한다는 점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휘둘러야지만 더 잘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를 패면서 아이에게 쓰게 하는 것이 바로 '명심보감'이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마치 독재정권이 어떤 독재를 해도 국민들 먹고 살게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처럼, 지금도 누구가 경제개발을 이루었다고 그가 저지른 폭력들은 별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처음에 유림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아빠에게 맞으면서 지내듯이, 그렇게 국민들도 지낼 수 있음을... 결코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면.

 

눈 뜨고 행동하는 사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다행히 유림이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 유림이는 캄캄한 세상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된다.

 

밝은 빛을 본 사람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만 살 수 없다. 이제 그 어둠에서 나와야 한다. 유림이가 목숨을 걸고 아빠에게서 탈출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유림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물, 멧돼지 산바가 등장한다. 소설의 처음-중간-끝에 산바는 유림이와 또 유림이를 돕는 주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물로 등장한다. 그 역시 유림이 아빠 홍기수에게 자식을 잃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슬픔들이 모여 서로 공명하여 관계를 이룬다. 이들은 공존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것.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이들은 서로 마음이 통한다. 마음이 통하니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가 없는 곳에서 폭력이 이루어진다.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정권이 독재를 하듯이, 대화가 없는 집에서 폭력이 일어나듯이, 홍기수 역시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화를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용당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런 폭력, 홍기수와 같은 직접적인 폭력은 이 사회에선 더이상 용납이 되지 않는다.

 

홍기수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더 큰 권력 '박대령'은 어떻게 되는지 나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는 세련된 폭력으로 살아남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세련된 폭력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경제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또다른 주인공 류화신은 홍기수와 같은 드러난 폭력에는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숨어 있는 세련된 폭력과 싸우기는 힘들다. 그래서 어쩌면 이를 피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일. 유림이 일을 통하여 류화신은 변한다. 아마도 그는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도 하겠지만, 세련된 폭력과 맞서는 일에도 참여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으로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류화신은 지금 삼청교육대로 추정되는 정화학교에서 3개월을 교육받는다. 무참한 폭력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류화신이 쓴 것도 바로 '명심보감'이다. 공권력이 얼마나 이런 책들을 이용했는지. 좋은 말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명심보감'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멧돼지, 아빠의 폭력에 죽어가는 아이, 가정이 해체되어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어른이 함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결국 멧돼지별로 가버린 산바지만, 그래서 멧돼지가 살던 별이 된 이곳이지만, 이제는 사랑으로 함께 공존하는 그런 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화를 하지 못하는 상황, 얼마나 비극적인지, 그리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서로가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