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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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를 한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일로부터 어떻게 소설을 쓸까?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리고 르귄은 내가 지니고 있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몇몇 작품을 읽은 결과, 르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게 됐다.

 

베르길리우스, 단테의 신곡에서 단체를 지옥과 연옥으로 이끈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시인. 그가 쓴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이탈리아로 건너와 그 후손이 로마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

 

아마도 로마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신화겠지만, 비너스의 아들인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아와 결혼하고, 그 자손들이 로마를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에서 라비니아는 결정권이 없는, 그저 남자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에 불과하다. 라비니아를 차지하기 위한 남자들의 전쟁. 그리고 승자가 라비니아와 결혼을 한다. 이게 끝? 그러면 도대체 여성은 무엇인가?

 

호전적인 남성들이 차지하는 전리품인가? 하긴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가 그리스군에서 이탈한 것도 전리품(?)인 여자 문제였으니, 그들 세계에서 여자란 값비싼 거래 물품에 불과했을 뿐. 특히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헬레네를 보라.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전쟁의 구실을 위해 필요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영웅 서사시의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를 지니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자들에 딸린 부속품이었을 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영웅서사시에서 여성들은 부속품으로, 무언가 자신의 일을 하더라도, 카르타고의 디도처럼 조연에 불과하다.

 

디도라는 카르타고의 여왕도 조연에 불과했는데, 로마에 정착해서 왕이 되는 아이네아스에게 라비니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정착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아이네아스가 성공했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전리품에 불과하다.

 

그런 라비니아가 르귄에게서는 주도적인 인물로 되살아난다. 주연으로 등장한다. 그렇다.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 발언권도 없던 라비니아를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남겨놓은 틈을 르귄은 라비니아로 하여금 채워넣게 한다.

 

그냥 빈 틈을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라비니아로 하여금 새로운 신화를 쓰게 한다. 여성도 당당하게 역사의 한 축이 됨을,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만 맡기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제 인생을 개척해나감을 라비니아를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 헌정한 소설이자, 그것을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킨 소설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라비니아를 통해서 말하게 하고 있으니...

 

조연으로 묻혀 있던 인물이 당당하게 주연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레서 전쟁을 통해서 파괴되는 면을,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지 않고, 그 과정에서도 탄생하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라비니아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운명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도 자신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행하려고 하는 모습. 그렇다. 결과는 바꾸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은 충분히 중요하다. 과정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조연이 되느냐는 큰 차이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소설은 [아이네이스]에서는 아주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는 인물인 라티움의 왕녀인 라비니아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시각에서 아이네아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왜 로마제국이 세계 제국으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제국으로 나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살았던 위대한 작가가 펴낸 훌륭한 작품을 이어서 쓴다는 것. 그 작품을 계승해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르귄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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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3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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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까기 오는 동안 서술자는 지위가 점점 떨어진다. 그렇다. 기프트에서 오렉은 지배층에 속하는데, 보이스에서 메메르는 식민지 지식인이다. 그런데 3권인 '파워'에서는 자유민에서 노예로 떨어진 가비르가 서술자로 나온다.

 

노예.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 스스로 행동할 권리도 없다. 오로지 그들은 주인에 의해 행동이 결정된다. 그렇지만, 그런 노예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는 길이 없을까? 있다. 바로 교육이다. 읽기다.

 

읽기는 그래서 작가가 쓴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다. 읽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 가고, 행동을 예비하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읽기는 위험하다. 특히 노예에게는.

 

노예가 읽기를 통해 자신을 깨닫게 되면 더이상 노예로 머물 수 없다. 물론 노예를 벗어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비르가 주인에게서 벗어나 숲 속에 들어갔을 때 폭력으로 노예들을 해방시키려는 집단이 있었다.

 

그러나 폭력만으로는 해방이 되지 않는다. 노예 해방의 지도자 역시 폭력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 하고, 그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교육을 하려는 노력을 힘껏 펼치지 않기 때문에, 이 숲 속 공동체는 지배층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진정한 자유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가비르는 자신의 가족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읽기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일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가비르. 그는 그 미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을 배우고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잃고 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려고 한다. 그런 복종으로 자유가 얻어질 수 있을까?

 

배움의 과정에서도 일방적인 복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가비르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가비르는 오렉에게 이른다.

 

3권 끝부분에 가면 오렉, 그라이, 메메르, 가비르, 그리고 가비르가 데리고 온 멜이 함께 만나다. 이들은 당분간 함께 지낼 것이다.

 

읽기라는,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간 것이다.

 

아무리 주인이 잘해줘도, 그것은 주인의 관점을, 이익을 대변한 행동이라는 것. 내 자유는, 내 권리는 남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데, 누나의 죽음까지 겪는 가비르.

 

그럼에도 가비르가 포기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그가 읽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읽기를 통해 그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읽기의 힘이다. 읽기 중에서도 문학의 힘이다.

 

문학,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삶을 살펴보고, 주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오렉과 메메르, 가비르. 세 권의 서술자를 통해 르귄은 이렇게 읽기의 중요성, 문학의 중요성을 우리게에 알려준다.

 

환상적인, 실제 존재하지 않는 서부해안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통해, 다른 존재들, 그리고 식민지, 주인과 노예 등을 설정해서 그런 환경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주인공들을 우리게에 보여주고 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그리고 너무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을 수 있게, 그렇게 서부해안 연대기에서 20세기, 아니 21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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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2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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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찌 르귄이 쓴 소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랴. 어떻게 르귄의 작품을 SF라는 틀에 가둬둘 수 있으랴? 시간과 공간이 현실 세계가 아니더라도, 상상 속의 그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도 더 생생하게 다가오니, 읽으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마음이 들고, 결말이 내 생각과 다를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해 하며, 마치 르귄이 사라마구가 쓴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와 같은, 이 작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토록 강렬한 주제를 펼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평화, 유일신을 믿는 종교과 여러 신을 믿는 종교, 남성 우위의 사회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 많은 것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예전 판본이 세 권으로, 각자 다른 단행본으로 나와, 순서를 잘못 읽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한 권 한 권을 그냥 따로 읽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도 드는, 그럼에도 새로운 판본에서는 세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서부해안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한 권으로 나왔음을 생각하면, 역시 순서대로 읽어야 제 맛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권은 두 번째 이야기... 자신의 선물을 인식하고 저지대로 그라이와 함께 떠난 오렉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술자가 바뀐다. 메메르라는 여성으로. 


식민지가 된 안술과 그들을 다스리는 아수다르의 알드인들... 안술 사람인 메메르는 알드와 안술의 피가 섞인 사람이다. 어머니가 알드 군인에게 강간당해 임신해 낳은 아이. 그러나 그에게는 안술의 정령이 깃들고, 그는 안술 사람으로 알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자, 흔한 이야기다. 식민지 지식인이 지배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전쟁을 통해 지배국 군인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 식민지 사람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지배자들.


하지만 이 소설은 이것과 다르다. 전쟁이 아니라, 어떻게 자유를 쟁취하는 것인지, 그 자유가 상대의 파멸을 통한 것이 아니라 상대와 공존할 수 있는 자유여야 함을 메메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왜 시인들이 이야기 속에 가사와 요리를 넣지 않는지 의아했다. 모든 위대한 전쟁과 전투는 결국 그걸 위한 게 아닌가? 저녁이 되어 평화로운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싸우는 게 아닌가? 설화는 만바의 군주들이 술 산 기슭으로 쫓겨나서 야영을 할 때 어떻게 사냥을 하고 뿌리를 모으고 저녁거리를 요리했는지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적에게 파괴되고 버려진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75쪽)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쉽게 사람을 숫자로 여기는 게 아닐까. 생명이나 살아 있는 몸으로 생각하기보다 숫자로, 마음속의 전장에 밀어 넣을 수 있는 마음속의 장난감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이런 추상화는 즐거움을 주고 그들을 흥분시키고 행동 자체를 위해 행동하게 해준다. 놀이말처럼 숫자를 조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신들에게, 그리고 그 놀이 속에서 고통받고 죽이고 죽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향심, 혹은 명예, 혹은 자유란 이름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랑, 명예, 자유 같은 말은 본래 성질을 잃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경멸하게 되고, 시인들은 그 말들에 본래 모습을 되찾아주기 위해 싸워야 한다. (296쪽)


메메르는 이런 의문을 품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전쟁은 남성적이다.(이런 말을 하는 것이 편가르기 같고 편견같지만, 맨박스라는 말이 있고, 그런 행동을 남성적이라고 하니, 보통은 폭력을 남성적이라고 하는 성별 구분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을 구분짓는 용어로 남성적-여성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전쟁과 달리 삶을 유지하는 행위들은 여성적이다.


그럼에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런 여성적인 활동이 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행위들이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메메르를 서술자로 내세운 것은 이런 이분법적인 폭력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시 오렉과 그라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메메르와 만난다. 메메르. 읽을 수 있는 여자. 읽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을 알고, 진실을 알리는 일이다. 책 속에 진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본능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것.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식민 지배자들은 읽기를 하지 못하게 한다. 책들을 불태운다.


불태우는 책, 진리를 감추려는 노력. 이것에 반하는 사람이 바로 오렉이다. 오렉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창작자의 작품을 찾아내어 읊고, 인쇄하고, 무시나 망각으로부터 복구하고, 빛나는 언어를 다시 빛나게 하는 것이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지요. (86쪽)


이런 오렉과 오렉을 지키며 함께 하는 그라이, 그리고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하는 메메르. 안술은 폭력으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움직임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소설에서 잘 전개되고 있다. 무기가 아닌 말의 힘으로... 그래서 제목이 '보이스'다.


지배자로 온 간드(통치자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간드라는 말은)인 이오라스가 시를 이해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오라스는 지배자로 왔기에 흉측한 인물로, 폭력적인 인물로 생각되지만 오렉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니 이런 인물과 안술의 수장이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그 역시 말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예전 동양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떠올렸는데, 분서갱유는 성공할 수 없다. 책을 불 태우더라도 모든 책을 불태울 수는 없으며,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책들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바로 메메르처럼... 읽을 수 있는 사람 모두를 없앨 수도 없으니.. 이는 진리는 감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진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임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얼마나 폭력일 수 있는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결국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을 제거해도 된다는 말이 되니, 이 말이 '나 이외의 다른 신들도 나처럼 섬겨라'라는 말로, 다른 신들도 포용하는 말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안술 사람들이 알드 사람들과 공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결국 나 이외의 다른 신도 받아들이는 포용성에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포용성은 메메르가 숨겨둔 책들을 꺼내 도서관을 만들기로 한 것에서, 즉 읽기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진리는 특정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것임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소설은 메메르가 도서관을 만들기로 하고, 또 오렉, 그라이와 함께 길을 떠나려고 한다는 데서 끝나고 있다.


이제는 3권으로 건너간다. 자, 또 무슨 일로 르귄은 우리의 시간을 잡아둘 것인지,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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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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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는 없는 땅이 나온다. 그러나 지구상에 없다고 현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바로 우리들이 겪는 일상임을 깨닫게 하는데 이 소설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제목은 '기프트'다. 우리말로 하면 선물인데... 어떤 선물? 바로 내게 주어진 능력이다. 그것은 선물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행할 때 대가로 주어야 할 것도 바로 선물이다. 선물은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선물에는 이미 양면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선물 하면 한쪽 면만 보는 경향이 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 둘이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선물이 지닌 의미가 산다. 단지 주고 받는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선물 자체도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에는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고원지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소위 환타지로 불리는 소설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인간들이 나오고, 이들과 대비되는 보통 사람들이 나온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보통 사람들이고, 특별한 사람들은 주술사나 그밖의 능력을 지닌 인간들로 나온다. 능력자들은 고지대에 살고, 보통 사람들은 저지대에 산다. 그리고 그들은 교류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단절된 세상.


그런데 이것이 환타지 소설에서만 나올까? 우리들 일상생활에서도 남들과 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경원하면서 다르게 살아가는 현실. 또 능력자들이라고 해도 그 능력으로 인해 성공하는 사람과 파멸해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그 능력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행로.


이것이 바로 이 소설 '기프트'다. 지구상에 없는 도시와 사람들을 등장시켰지만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기프트', 선물은 대부분 파괴적이다. 그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선물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만 전승이 된다. 이들은 이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주면 권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선물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진다. 너무도 뛰어난 '되돌림' 능력을 받았지만 파멸하고 만 주인공 오렉의 고조할아버지 카다드. 오렉은 이런 카다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의 파괴력에 대해 공포심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에 따라 선물의 의미를 파악하고, 공동체에서 생각하는 선물의 의미를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공동체가 생각하는 선물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자신은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하고 마는 것처럼 오렉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지낸다.


선물을 다른 방향으로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공동체 생활을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지도 못하니, 오렉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을 한 방향이 아니라 양 방향으로, 기존의 관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을 오렉을 통해 알려준다.


어찌보면 한 남자 아이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성장에 도움을 주는, 또 남성 주인공이 우여곡절을 거쳐 겨우 깨닫게 되는 것을 이미 깨우친 여성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물이 지닌 양면성을 지적한 것도,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하는 인물도 그라이라는 여성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오렉이라는 '되돌림'이라는 파괴의 능력을 계승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그 인물이 그러한 파괴 능력을 선물로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데, 그라이의 선물은 '부름'인데, 이는 동물을 불러내 사냥꾼들에게 넘기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동물의 마음을 읽고 동물과 함께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 점을 그라이는 깨닫고, 자신은 사냥을 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면 '되돌림' 능력은 어떻게 될까? 오렉은 이 파괴의 능력을 거부하려 한다. 자신에게 엄청난 파괴의 능력이 있다고, 눈을 가리기도 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파괴의 선물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는 언어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창작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가 받은 선물은 있는 것을 파괴하는 되돌리기가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되돌리기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데 그가 겪는 수많은 일들이 이 소설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이 파괴적인 능력을 진정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인가를 마음 졸이면서 읽게 된다.


여기에 이 소설의 묘미가 있다. 작가는 답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둔다. 그러다가 한 순간 한 단계 성장한 주인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한 사람이 지닌 능력이 이렇듯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결과를 이끌어낸다면, 집단이나 사회, 국가는 어떨까? 한쪽면만을 보고, 그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오히려 다른 면이 있음을 말하고, 그 다른 면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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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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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여러가지로 직조된 이야기들을 꿰어맞추느라 읽기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면, 2권에선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야기들이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 속 이야기 속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 소설에서는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전쟁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그보다는 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정작 우리 목숨을 끊는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일 수도 있다는 것.


아이리스의 동생 로라의 죽음에 얽힌 사연이 밝혀지게 되는 과정까지 소설은 긴박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은?


읽으면서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 속 소설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도대체 누가 눈먼 암살자인가?


우선 암살이라는 말 자체가 '모르게' 또는 '비밀스럽게'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자신의 행적을 알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눈먼'이라는 말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가 첨가된다는 생각이든다.


소설에서 주인공과 관련된 죽음은 셋이다. 동생 로라의 죽음, 남편 리처드의 죽음, 그리고 알렉스의 죽음.


알렉스의 죽음이야 전쟁으로 인한 죽음. 세상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는, 그것도 당시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젊은이라면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알렉스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기에, 그의 죽음에는 '눈먼'이라는 말이나, '암살'이라는 말이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또는 알릴 수 없는 죽음을 당한 인물은 로라와 리처드인데... 이들의 죽음이 알렉스의 죽음과 다르다고 하면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바로 '눈먼 암살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 단순하다.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이리스와 리처드의 여동생인 위니프리드뿐인데... 위니프리드는 오로지 서술되는 인물에 불과하니...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아이리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리스는 그야말로 어려운 시대, 집안을 지탱하기 위해 희생당한 우리들의 맏딸과 같은 역할 아니던가. 자의든 타의든, 아이리스의 결혼은 희생에 바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이리스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지, 그녀는 자신의 딸과 헤어지고 딸마저도 잃고 손녀도 어디론가 떠나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자, 눈먼 암살자는 누구인가? 자신이 죽이는 존재를 보지 못하는 암살자. 그런 눈먼 암살자를 꼭 사람으로만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생기 있는 인물은 아이리스와 로라를 보살펴주던 리니와 또 나이들어 거동이 힘들어진 아이리스를 끝까지 돌봐주는 리니의 딸 마이라가 아닌가. 


이들을 침범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돈으로 인한 비열함, 황금만능주의. 돈으로 권력까지 사려는 모습 등이 아니던가.


아이리스와 로라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비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리처드와 같이 돈만 지닌,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로.


그럼에도 소설은 희망을 지니게 한다. 아이리스가 글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또 동생 로라, 딸인 에이미의 비극을 글로 남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읽히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읽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을 넘어서고 있다. 사브리나라는 손녀 딸에게 읽히기 위해 쓴 아이리스의 글을 통해서.


이미 결말은 나와 있지만, 그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야기가 겹쳐 나오기에 읽어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결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눈먼 암살자'가 누구일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런 '눈먼 암살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1권에서 다루어졌던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의 이야기가 왜 계속되지 않는지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 했는데...


굳이 소설 속 소설의 이야기인 눈먼 암살자와 혀를 잘린 소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소설 속에서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들이 잘먹고 잘살았더라 하는 이야기는 필요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에게서 혀를 잘린 소녀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혀를 잘린 소녀는 말을 할 수 없지만 글을 쓸 수는 있다. 아이리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는 않지만 글로 남긴다. 그렇게... 진실을, 그리고 희망을, 당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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