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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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를 한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일로부터 어떻게 소설을 쓸까?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리고 르귄은 내가 지니고 있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몇몇 작품을 읽은 결과, 르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게 됐다.

 

베르길리우스, 단테의 신곡에서 단체를 지옥과 연옥으로 이끈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시인. 그가 쓴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이탈리아로 건너와 그 후손이 로마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

 

아마도 로마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신화겠지만, 비너스의 아들인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아와 결혼하고, 그 자손들이 로마를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에서 라비니아는 결정권이 없는, 그저 남자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에 불과하다. 라비니아를 차지하기 위한 남자들의 전쟁. 그리고 승자가 라비니아와 결혼을 한다. 이게 끝? 그러면 도대체 여성은 무엇인가?

 

호전적인 남성들이 차지하는 전리품인가? 하긴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가 그리스군에서 이탈한 것도 전리품(?)인 여자 문제였으니, 그들 세계에서 여자란 값비싼 거래 물품에 불과했을 뿐. 특히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헬레네를 보라.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전쟁의 구실을 위해 필요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영웅 서사시의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를 지니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자들에 딸린 부속품이었을 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영웅서사시에서 여성들은 부속품으로, 무언가 자신의 일을 하더라도, 카르타고의 디도처럼 조연에 불과하다.

 

디도라는 카르타고의 여왕도 조연에 불과했는데, 로마에 정착해서 왕이 되는 아이네아스에게 라비니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정착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아이네아스가 성공했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전리품에 불과하다.

 

그런 라비니아가 르귄에게서는 주도적인 인물로 되살아난다. 주연으로 등장한다. 그렇다.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 발언권도 없던 라비니아를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남겨놓은 틈을 르귄은 라비니아로 하여금 채워넣게 한다.

 

그냥 빈 틈을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라비니아로 하여금 새로운 신화를 쓰게 한다. 여성도 당당하게 역사의 한 축이 됨을,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만 맡기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제 인생을 개척해나감을 라비니아를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 헌정한 소설이자, 그것을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킨 소설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라비니아를 통해서 말하게 하고 있으니...

 

조연으로 묻혀 있던 인물이 당당하게 주연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레서 전쟁을 통해서 파괴되는 면을,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지 않고, 그 과정에서도 탄생하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라비니아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운명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도 자신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행하려고 하는 모습. 그렇다. 결과는 바꾸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은 충분히 중요하다. 과정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조연이 되느냐는 큰 차이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소설은 [아이네이스]에서는 아주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는 인물인 라티움의 왕녀인 라비니아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시각에서 아이네아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왜 로마제국이 세계 제국으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제국으로 나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살았던 위대한 작가가 펴낸 훌륭한 작품을 이어서 쓴다는 것. 그 작품을 계승해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르귄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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