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2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어찌 르귄이 쓴 소설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으랴. 어떻게 르귄의 작품을 SF라는 틀에 가둬둘 수 있으랴? 시간과 공간이 현실 세계가 아니더라도, 상상 속의 그 세계가 현실 세계보다도 더 생생하게 다가오니, 읽으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마음이 들고, 결말이 내 생각과 다를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해 하며, 마치 르귄이 사라마구가 쓴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와 같은, 이 작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토록 강렬한 주제를 펼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평화, 유일신을 믿는 종교과 여러 신을 믿는 종교, 남성 우위의 사회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 많은 것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예전 판본이 세 권으로, 각자 다른 단행본으로 나와, 순서를 잘못 읽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한 권 한 권을 그냥 따로 읽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도 드는, 그럼에도 새로운 판본에서는 세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서부해안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한 권으로 나왔음을 생각하면, 역시 순서대로 읽어야 제 맛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권은 두 번째 이야기... 자신의 선물을 인식하고 저지대로 그라이와 함께 떠난 오렉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서술자가 바뀐다. 메메르라는 여성으로. 


식민지가 된 안술과 그들을 다스리는 아수다르의 알드인들... 안술 사람인 메메르는 알드와 안술의 피가 섞인 사람이다. 어머니가 알드 군인에게 강간당해 임신해 낳은 아이. 그러나 그에게는 안술의 정령이 깃들고, 그는 안술 사람으로 알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자, 흔한 이야기다. 식민지 지식인이 지배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전쟁을 통해 지배국 군인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 식민지 사람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지배자들.


하지만 이 소설은 이것과 다르다. 전쟁이 아니라, 어떻게 자유를 쟁취하는 것인지, 그 자유가 상대의 파멸을 통한 것이 아니라 상대와 공존할 수 있는 자유여야 함을 메메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왜 시인들이 이야기 속에 가사와 요리를 넣지 않는지 의아했다. 모든 위대한 전쟁과 전투는 결국 그걸 위한 게 아닌가? 저녁이 되어 평화로운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싸우는 게 아닌가? 설화는 만바의 군주들이 술 산 기슭으로 쫓겨나서 야영을 할 때 어떻게 사냥을 하고 뿌리를 모으고 저녁거리를 요리했는지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적에게 파괴되고 버려진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75쪽)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쉽게 사람을 숫자로 여기는 게 아닐까. 생명이나 살아 있는 몸으로 생각하기보다 숫자로, 마음속의 전장에 밀어 넣을 수 있는 마음속의 장난감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이런 추상화는 즐거움을 주고 그들을 흥분시키고 행동 자체를 위해 행동하게 해준다. 놀이말처럼 숫자를 조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신들에게, 그리고 그 놀이 속에서 고통받고 죽이고 죽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즐거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향심, 혹은 명예, 혹은 자유란 이름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랑, 명예, 자유 같은 말은 본래 성질을 잃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경멸하게 되고, 시인들은 그 말들에 본래 모습을 되찾아주기 위해 싸워야 한다. (296쪽)


메메르는 이런 의문을 품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전쟁은 남성적이다.(이런 말을 하는 것이 편가르기 같고 편견같지만, 맨박스라는 말이 있고, 그런 행동을 남성적이라고 하니, 보통은 폭력을 남성적이라고 하는 성별 구분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행동을 구분짓는 용어로 남성적-여성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전쟁과 달리 삶을 유지하는 행위들은 여성적이다.


그럼에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런 여성적인 활동이 이야기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행위들이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메메르를 서술자로 내세운 것은 이런 이분법적인 폭력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시 오렉과 그라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메메르와 만난다. 메메르. 읽을 수 있는 여자. 읽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을 알고, 진실을 알리는 일이다. 책 속에 진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본능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것.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식민 지배자들은 읽기를 하지 못하게 한다. 책들을 불태운다.


불태우는 책, 진리를 감추려는 노력. 이것에 반하는 사람이 바로 오렉이다. 오렉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창작자의 작품을 찾아내어 읊고, 인쇄하고, 무시나 망각으로부터 복구하고, 빛나는 언어를 다시 빛나게 하는 것이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지요. (86쪽)


이런 오렉과 오렉을 지키며 함께 하는 그라이, 그리고 이제는 그들과 함께 하는 메메르. 안술은 폭력으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움직임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소설에서 잘 전개되고 있다. 무기가 아닌 말의 힘으로... 그래서 제목이 '보이스'다.


지배자로 온 간드(통치자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간드라는 말은)인 이오라스가 시를 이해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오라스는 지배자로 왔기에 흉측한 인물로, 폭력적인 인물로 생각되지만 오렉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니 이런 인물과 안술의 수장이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그 역시 말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예전 동양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떠올렸는데, 분서갱유는 성공할 수 없다. 책을 불 태우더라도 모든 책을 불태울 수는 없으며,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책들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바로 메메르처럼... 읽을 수 있는 사람 모두를 없앨 수도 없으니.. 이는 진리는 감금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진리는 당장 눈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임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얼마나 폭력일 수 있는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결국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을 제거해도 된다는 말이 되니, 이 말이 '나 이외의 다른 신들도 나처럼 섬겨라'라는 말로, 다른 신들도 포용하는 말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안술 사람들이 알드 사람들과 공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결국 나 이외의 다른 신도 받아들이는 포용성에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포용성은 메메르가 숨겨둔 책들을 꺼내 도서관을 만들기로 한 것에서, 즉 읽기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진리는 특정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것임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소설은 메메르가 도서관을 만들기로 하고, 또 오렉, 그라이와 함께 길을 떠나려고 한다는 데서 끝나고 있다.


이제는 3권으로 건너간다. 자, 또 무슨 일로 르귄은 우리의 시간을 잡아둘 것인지,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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