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2021년 봄보다는 뒤에 나온 계절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하긴 소설을 꼭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 계절에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소설을 실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이 계절에 따라 읽기 적합성을 띤다면, 그 소설이 어떻게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겠는가? 좋은 소설은 계절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들 아니던가. 그래야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 될텐데.


이 책에도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편집자들이 엄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이번 책에도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이 한 편 있다. 그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김멜라가 쓴 '나뭇잎이 마르고'란 소설이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소설. 단편임에도 첫 문장을 보자마자 아, 읽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소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든데, 여성이자 장애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체를 받아주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


왜 체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에서 양귀비 씨앗을 뿌릴까? (이들이 뿌리는 씨앗이 양귀비 씨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와 관련지어서 양귀비 씨만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예전에는 약으로도 쓰였던 양귀비라는 식물이 아편의 재료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재배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 되었는데, 양귀비는 그대로인데, 그가 어떤 시대에 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이 사회에서 양귀비나 체나 변두리로 밀려나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체는 당당하다.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산다. 그렇다. 양귀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띠는 곳에서는 재배를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자라게 된다.


우리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을 더 많이 보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사람의 신체조건이라든지 사회, 경제, 교육 상황 등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우리가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낯설게 보게 하기.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낯선 세상을 만난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세상이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위수정이 쓴 '은의 세계'가 바로 그렇다. 지환에게 낯선 환경(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에서 다가온 하나. 그 하나와 함께 살지만 하나의 가족(사촌)은 또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하나 역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또 하나의 낯선 세계,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상황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낯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환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환. 이는 정말 낯선 세상이다. 서로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서로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지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하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낯설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나인가?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은 끝나는데...어쩌면 단편소설이 지닌 매력일 수도 있다. 여백이 많은 소설들. 그 여백을 독자가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다른 작품에서 그 여백을 채우고 또다른 여백을 남기는 그런 과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렇게 두 작품은 주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읽어가면서 빨려들어가는데,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소설이 바로 나일선이 쓴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다. 1959년과 2018년이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제목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또 우리나라 소설이면 우리나라 말로 제목을 달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갈고 닦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 너무 고루한 생각인 듯 싶다가도 작가들 마저 이렇게 영어를 제 나라 말인양 쓰면 나중에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이 남아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우겠지만.


지금 노래들을 보면 영어가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설에도 이렇게, 비록 제목만이기는 하지만, 들어왔으니,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토막토막, 무의식 속에 있던 일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열된 느낌. 어쩌면 그런 나열 속에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야 하겠지만, 마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을 곱씹어야 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런 소설은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들의 현란한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원재료가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에게는 아니다. 그냥 이상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독자처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니, 궁금한 사람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을 읽어보거나 직접 작품을 읽어보기를...


그래도 이렇게 짧지만 계절마다 꾸준히 소설이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좋겠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분량이나 가격 면에서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 별 사이 - 소년소녀 X SF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동식 외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소녀xSF'라고 한다. '청소년xSF'라고 하지 않은 편집자의 고심이 느껴진다. 특정한 성이 특정 연령대를 대표하고 있다는 느낌을 청소년이라는 말은 준다. 그렇다고 청소녀라는 말을 쓰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언어가 사고를 대표한다고 하면, 청소년이라는 말에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남성중심주의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특정한 연령대를 독자로 상정하고 작품을 내놓은 출판사에서 용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소년소녀xSF'라고 했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 네 편의 주인공들은 주로 중고등학생 정도의 연령이라고 보면 된다. 중학생 정도의 연령 13세에서 18세 정도를 사춘기로 잡으면 사춘기에 들어선 사람들이 주요 등장인물이고, 독자들도 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여기면 된다.


그렇다면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주로 경험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 친구 관계, 또 성장통(소위 사춘기 반항이라고 하는), 성적(공부), 사랑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쓴 소설도 많지만, 이 소설은 SF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상상이 발현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상상력에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SF소설의 매력이다.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고, 그 거리만큼 현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주영이 쓴 '별 별 사이'는 친구 관계를 다루고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 온라인 수업은 부유층 아이들이 주로 하고, 오프라인 수업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주로 하는. 


같은 학교 학생이지만 서로 별과 별처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그런 사이들. 이렇게 먼 존재들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친구가 되어야 함을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엄마의 가출, 부유한 친구의 제안, 그 친구는 엄마와 아는 사이 등등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예전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욕을 하면 경고가 나오고 어쩌고 하는 장면을 이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발한 상상력으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친구는 경제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서로가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부딪치며 지내는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친구가 된다. 그런 과정... 예전 어른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친구가 되려면 밥을 함께 먹고, 목욕을 같이 하고, 잠을 같이 자야 한다고. 그렇게 경제적 차이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SF라는 형식을 빌려 작가가 보여주고 있다.


김동식 소설 '이상한 미래의 사춘기'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발한 상상력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화학요법에 의존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그런 세상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지의 가족을 통해서.


사춘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그 격정적인 감정을 이용해 감정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다는 발상, 그러나 모든 아이가 사춘기를 거치지는 않는다는 사실. 아니 사춘기가 있다면 거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를 보내는 모습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예지 역시 사춘기를 요즘 말로 하면 쉽게 보낸다. 


소설 속에서 의사가 말하는 어려운 집안 아이들은 가족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춘기도 빨리, 조용히 넘긴다는 말은 슬픔을 자아내지만, 그렇지만 그런 집안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면서 웃으며 지내는 가족이 있음을, 마냥 슬프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예지와 예지 엄마의 관계 역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냥 웃으면서 읽을 수도 있지만, 소설 속에는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가 몇 있다. 과연 인간의 감정을 외부 요인에 의지해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한 그런 감정조절이 된다면 왕따와 같이 피해를 보는 학생에게 기쁨 에너지를 쏘여 기분 좋게 하면 일이 해결되는가? 사춘기와 갱년기라고 꼭 지칭하면서 특정한 행동을 하리라고 예측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등등.


전삼혜가 쓴 '토끼와 해파리'는 슬프다. 물론 소설은 전혀 슬프지 않다. 이게 SF소설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분명 슬픈 내용임에도 읽으면서는 슬픔을 느끼기 어렵다. 다만 읽고 나서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어렸을 때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 자기 또래와의 생활을 건너뛰고 어른이 된 모습. 그러나 지식의 발전 속도(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면 천재라고 찬탄을 하다가, 성인이 되어서 남들보다 특출하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가 어렸을 때와 달리 어른이 되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아이를 설정한다.


자기 또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또래 아이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건너뛴 아이를 천재라고 찬탄만 해야 하는지... 오히려 그런 아이일수록 또래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 '어메이징 메리'를 보라. 무엇이 행복인지,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소설은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홍지운이 쓴 '그냥 그런 체질이라서'는 사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 이야기다. 사랑에 빠지면 흥분하기 쉽고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그 점을 용족과 결혼한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반인반수도 아니고, SF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그렇지만 재미 있다. 과거 우리나라 왕족들은 대부분 용들의 자손이 아니던가. 그러니 SF라고 없던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 전통의 계승이다. 이 소설은) 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불을 뿜어낸 소년 이야기다.


그냥 웃음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사춘기의 사랑은 앞뒤 안가리고 불붙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웃음을 유발하면서 넘기고 있지만, 자신이 조절 못하는 사랑으로 상대가 다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끝내는 소설이 아니다.


네 편 모두 사춘기에 겪을 만한 일들을 주제로 다양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읽기보다는 웃으며, 깔깔거리며 읽을 수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설정이다.


그렇게 웃으며 읽다가 무언가를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네 편의 소설에는 웃음 속에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SF소설은 전혀 현실과 같지 않은 상상력 속에서 현실을 바로보게 하고 있으니...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 소설집에는 재미 있게 읽고, 웃으며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 사춘기를 겪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작품들이 실려 있으니,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 또는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 읽으면서 낄낄거렸으면 좋겠다. 낄낄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올라올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고양이들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들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 둘 중 하나의 대우를 받게 된다. 칭송이나 박해. 칭송이나 박해 모두 다름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이다. 칭송이 좋을 듯하지만, 가끔은 다른 존재에게 어떤 특별함을 요구할 수 있다. 다른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기대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다른 존재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 막내 제인은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어느 아저씨 집에 들어간다. 이 아저씨는 날개 달린 제인을 보고 배척하지 않지만 그 특이함을 이용한다. 제인에게는 '귀여운 애가야'라고 하면서, 언론에 알려 신문과 방송에 제인이 나오게 한다. 그리고 제인이 쇼를 하게 한다. 제인이 자기를 떠나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아놓고. 이게 과연 칭송일까?

 

칭송도 이럴진대 박해는 어떨까? 그것은 생명을 위협한다. 엄마 고양이인 제인은 날개 달린 고양이들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잡혀서 동물원에 가거나 서커스를 하는 등, 고양이들이 원하지 않게 갇혀 지낼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 아이들이 안전한 곳으로 떠나가게 한다.

 

우리가 보통 다른 존재를 대할 때 지니는 태도인데, 사실 다른 존재를 대할 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어린이들은 지니고 있다. 다름을 인식하지 않고 그대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 동화에서 그 역할을 행크와 수잔이 해주고 있다. 이 어린이들은 날개 달린 고양이 네 마리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개 달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심지어 자신의 부모들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고양이들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남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 고양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고양이들과 함께 한다. '함께'라는 말이 중요하다. 가두지도, 억지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냥 함께 어울린다.

 

이렇게 아이들만큼 고양이들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나온다. 바로 엄마 제인과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 이 할머니는 창문을 걸어 잠근 아저씨와는 달리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제인이 그것을 더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농장에 있는 네 마리 날개 달린 고양이와 도시에 살고 있는 제인이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다른 공간에 있지만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여기에 날개가 없는 고양이, 약간은 허황스러운 알렉산더라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자신이 잘난 줄 아는 고양이. 세상에서 모험을 하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이루고자 하지만 트럭에 놀라고, 사냥개에게 쫓기고, 나무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알렉산더.

 

제인이 구해줘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알렉산더 역시 날개 달린 고양이를 칭송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지낸다. 그렇게 다름을 대하는 방식.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일. 그래서 그는 처음에 말을 못 하던 제인이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알렉산더에게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날개 달린 고양이를 집에서 함께 지내는 고양이가 아닌 야생에서 지내는 고양이로 바꾸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날개 달린 고양이들이 다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듯이 들고양이들도 우리에게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야 한다.

 

환상적인 동화지만 다름을 인식하고 함께 지낼 때 서로가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보다 : 겨울 2020 소설 보다
이미상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보다>는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문지문학상 후보작)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1년에 네 권씩 출간됩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설 보다> 봄, 여름, 가을, 겨울호가 있는 셈이고, 이들 소설 중에서 문지문학상이 나온다는 얘기일테다. 그렇다면 한 해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소설이 실린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소설이 나오는 중에 독자들에게 읽을 소설을 고를 때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읽어봤는데,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임현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전하영 소설은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도 실렸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아마도 이 소설이 평론가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나 보다. 


그 작품을 빼고 이야기를 하면 이미상이 쓴 소설은 제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지하철 할 때'라니... 잘못 읽었나 싶어서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 분명 '탈 때'가 아니라 '할 때'다. 지하철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는데, 답이 없다. 


상황 설정도 현실적이지 않다. 얼굴리 쪼개지고, 그 얼굴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본래 사람과 함께. 그래서 얼굴 둘과 주인공, 이렇게 셋이서 지하철을 탄다. 아니, 지하철을 한다. 한다는 말은 능동적인 행위를 나타낼 때 쓴다고 하면, 위험한 세상에 그냥 숨어 있지 않고 나와서 행동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둘로 쪼개진다는 의미, 여성이 하나의 얼굴로 살아가지 못하고, 여러 얼굴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만큼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많음을, 때와 장소에 따라 여성에게 다른 얼굴을 요구하고 있음을 이 소설에서 쪼개진 얼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여러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형상화는 여성들이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얼굴로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 예기치 않은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지하철에 내려서 "살았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고작 지하철을 탄 20분이 하루 종일 한 일이라는 사실. 그만큼 이동하는 시간에 어떤 위험을 겪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임현의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는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세계라는 뜻으로 읽힌다. 위계가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는 학문을 하는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학문을 함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진리 추구는 둘이 아닌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길에서 하나로 될 수 없음을,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결코 하나일 수 없는 관계는 서로 조심을 해야 한다. 아무리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아니듯이, 그 사람에게 나인듯 말을 해서는 서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면서 지켜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에게 말할 때 '상처줄 것이 거의 분명한 말들인데도 상처주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99쪽) 소설 속 연재처럼 해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내가 살아가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상, 그 세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 보다> 겨울 2020에 실린 소설들, 세 편 모두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타인에게 상처주는 말이나 행위들을 하고 있는, 또는 그런 모습을 모른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이렇게 소설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BC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4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순녀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을 놓기가 힘들다.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삽화를 통해 보여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덫을 놓고 크리스티는 전혀 다른 인물이 범인임을 밝혀낸다.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다음 희생자는? 단순하다. 알파벳 순서대로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읽는 내내 그렇게 읽어간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순서대로가 아님을 알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둔다.

 

그 마지막 살인사건으로 인해 알파벳 순서대로 살인이 일어나는 살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살인광이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파벳 순서는 트릭이다. 그 사이에 진정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동기를 가리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 그 점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거의 끝부분에 가서야 아, 그렇구나 하게 된다. 포아로의 설명으로 우리는 얽힌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욕망이 살인까지도 갈 수 있음을, 거기에는 형제도 소용없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추리소설이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포아로의 모습, 그리고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긴장을 풀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드러내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수다를 통해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탐정의 모습인데, 이처럼 우리가 놓치기 쉬운 작은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여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 모습에서 추리소설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크리스티는 끌부분에 이르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가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반전의 매력이 더 잘 느껴진다. 진범으로 오인받아 잡힌 사람에게서 의문점이 생기게 제시하고, 뒤이어 포아로의 결정으로 나아간다.

 

또한 포아로는 범죄자가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지 않도록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 인과응보를 느낄 수 있는데, 이미 범인을 파악하고, 그가 벌을 받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소설을 전개하는 크리스티의 모습에서 정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범인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을 우리에게 먼저 제시하고, 우리도 하여금 포아로와 함께 그가 범인임을 증명해가도록 이끌어가면서, 결말 부분에서 전혀 다른 인물을 범인으로 제시하고, 왜 그가 범인인지를 설명해주는 전개 방식... 이처럼 크리스티는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소설을 이끌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