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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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보다는 뒤에 나온 계절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하긴 소설을 꼭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 계절에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소설을 실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이 계절에 따라 읽기 적합성을 띤다면, 그 소설이 어떻게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겠는가? 좋은 소설은 계절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들 아니던가. 그래야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 될텐데.


이 책에도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편집자들이 엄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이번 책에도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이 한 편 있다. 그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김멜라가 쓴 '나뭇잎이 마르고'란 소설이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소설. 단편임에도 첫 문장을 보자마자 아, 읽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소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든데, 여성이자 장애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체를 받아주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


왜 체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에서 양귀비 씨앗을 뿌릴까? (이들이 뿌리는 씨앗이 양귀비 씨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와 관련지어서 양귀비 씨만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예전에는 약으로도 쓰였던 양귀비라는 식물이 아편의 재료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재배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 되었는데, 양귀비는 그대로인데, 그가 어떤 시대에 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이 사회에서 양귀비나 체나 변두리로 밀려나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체는 당당하다.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산다. 그렇다. 양귀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띠는 곳에서는 재배를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자라게 된다.


우리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을 더 많이 보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사람의 신체조건이라든지 사회, 경제, 교육 상황 등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우리가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낯설게 보게 하기.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낯선 세상을 만난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세상이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위수정이 쓴 '은의 세계'가 바로 그렇다. 지환에게 낯선 환경(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에서 다가온 하나. 그 하나와 함께 살지만 하나의 가족(사촌)은 또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하나 역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또 하나의 낯선 세계,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상황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낯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환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환. 이는 정말 낯선 세상이다. 서로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서로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지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하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낯설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나인가?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은 끝나는데...어쩌면 단편소설이 지닌 매력일 수도 있다. 여백이 많은 소설들. 그 여백을 독자가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다른 작품에서 그 여백을 채우고 또다른 여백을 남기는 그런 과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렇게 두 작품은 주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읽어가면서 빨려들어가는데,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소설이 바로 나일선이 쓴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다. 1959년과 2018년이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제목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또 우리나라 소설이면 우리나라 말로 제목을 달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갈고 닦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 너무 고루한 생각인 듯 싶다가도 작가들 마저 이렇게 영어를 제 나라 말인양 쓰면 나중에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이 남아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우겠지만.


지금 노래들을 보면 영어가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설에도 이렇게, 비록 제목만이기는 하지만, 들어왔으니,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토막토막, 무의식 속에 있던 일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열된 느낌. 어쩌면 그런 나열 속에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야 하겠지만, 마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을 곱씹어야 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런 소설은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들의 현란한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원재료가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에게는 아니다. 그냥 이상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독자처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니, 궁금한 사람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을 읽어보거나 직접 작품을 읽어보기를...


그래도 이렇게 짧지만 계절마다 꾸준히 소설이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좋겠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분량이나 가격 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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