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날개>
"이쪽으로 앉으세요. 어디가 불편하신지?"
"그게요. 우리가 요 옆의 길벗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술도 고기도 잘 먹던 이 친구가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뒹굴더니 나와서 토하는데 결국 피까지...."
마늘 냄새가 탁하게 끼친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냄새를 피한다. 배우지 못하고 능력도 없어서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 그들은 말할 기회를 얻기만 하면 불필요한 말을 공연히 길게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진단에 필요한 증상, 사실 전달만 하면 되는데 끓는 찌개 위에 뜨는 거품처럼 장황한 군더더기 말이라니. 그는 거품을 걷어내듯 말을 끊는다.
"어디 한번 봅시다. 피가 많이 나왔나요?"
"그건 아닌데요, 그래도 피가 섞이니까.."
"위염이네요. 우선 주사 한 대 맞고, 약 드시고, 나가다 내시경 예약 잡으세요."
"내시경은 무슨...그냥 약이나 지어주쇼."
p.145
책을 읽다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랐다. 아니, 내 생각이 왜 여기에!
배우지 못하고 능력도 없어서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을 빼버리면 말이다. 내가 겪는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되려 많이 배우고, 돈도 많은 사람이 더 많으니.
생각을 하는 당사자는 의사다. 스무 몇 살의 젊은 시절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쳤음이 분명하고, 의대 인턴, 레지를 거쳤겠고, 군복무 대신 군의관을 지나 개업한 내과 개인의다. 직원으로 사무장, 간호사, 보조 업무 보는 사람이 있겠고, 일 처방 70건 정도의 무난한 수준의 환자 확보가 된 상태일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 의사 가운을 입고 매일 듣는 소리는 여기가 아파요, 저기가 아파요, 일 것이다. 환자가 말하는 아파요, 에 대응하는 의사의 속생각이 잔인해 보이는가?
어느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왜 나는 어떤 환자와는 깊은 공감을 하면서 말을 한 시간이고 들어주면서,
또다른 어떤 환자에게는 귀를 닫고 싶을 때가 있는지.
이 양자간의 차이에 대한 고민은 내가 개업을 하고부터다. 사실 개업을 하기 전, 남 밑에 있을 때는 주는 약을 최대한 정확하게 주는 것에 집중을 했지, 약을 먹는 당사자의 입장에 서보는 일이 힘들었다. 그러니 저런 고민 자체가 내 속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진료와 치료를 하는 의사 역시, 아픈 당사자의 입장에 서 보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을 해보고자 하나, 인의를 펼쳐보고자 하나, 무릇 세상 모든 일은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내가 그나마 어떤 환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부터다. 약자일 수도 있다, 가 아니라 약자 그 자체, 라는 사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의 시선 처럼,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대할 때의 그 눈빛 처럼, 기득권자의 눈은 가지지 못한 자의 마음을 뚫어보지 못한다. 그 마음을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비기득권자가 되어 보는 것이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 마음을 내어보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나는 그럼 비기득권자란 말인가, 혹은 비기득권자가 되어 봤단 말인가. 그래서 (몇 명에게나마) 공감을 하게 된 거란 말인가.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한 부분은 다른 사람의 고민에 맡기고, 나의 고민이 이 지점이니 이것만 이야기해보자.
천민 자본주의가 극에 다하는 요즈음에는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직종 또한 언제 어느 때 나락으로 떨어질 지 모른다. 내가 아는 약사님 한 분은 개업 후 2년도 안 되어 문을 닫았지만 그 손실액은 몇 억에 달했고, 개인 파산과 이혼이라는 선택을 강요 당했다. 또다른 의사 한 분은 종합병원에서 개업의로 나섰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처방 건수로 인해 불면과 두통, 고혈압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또다른 한 의사는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었다가 떼인 후 몇 년간이나 일하는 족족 빚갚기를 하더니 급기야 스트레스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자신이 기득권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의 '나락'은 더 위험하다. 머니의 단위가 크기도 하지만, 자존심의 상처 또한 만만찮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경쟁 원리에 대해 쑥맥인 채로 (그야말로 공부만 하다) 세상에 나왔으니 더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 파산 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남이 보기에 성업 중이라 생각하겠지만, 초창기의 나는 꽤 고전했다. 직원 월급이라도 제대로 줘야 될텐데..라는 수준까지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는 개업 후 금방 알아버렸다. 자영업자들의 애타는 마음도 알게 되었으며, 덩달아 환자, 아니 고객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저절로 되어 버렸다.
저기는 불친절해서 말야..라는 곳은 먹고 살 만한 곳이거나, 장사 때려치우려고 마음 먹은 곳이다. 자신 뿐만 아니라 직원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되는 상태에서는 불친절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런 말이 있다. 동네에 안과가 하나 밖에 없다면 불친절할 수 있다. 하나 뿐이니 불친절도 감수할 수밖에. 그러나 안과가 하나만 더 생겨도 불친절했던 과거는 기억도 나지 않는 저 먼 과거의 산물이 된다. 불친절했던 안과가 급친절로 바뀌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암튼, 그래서 나 역시 불친절할 겨를이 없이 항상 얼굴에 미소와 친절한 멘트와 더불어 이런저런 서비스를 해주게 되었다. 언젠가의 경우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쳐서 무릎이 까인 사람이 글쎄, 다친 부위에서 나온 진물이 무릎에 딱붙어 바지를 벗지도 못하게 된 상태로 온 것이다. 병원에 가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막무가내다. 알고 봤더니 초기에 다치자마자 병원을 갔으나,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찰과상은 원래 다치자마자는 아프지도 않고 환부의 상태가 심각하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욱신거리기도 하고, 진물이 나오기도 하면서 상태가 심각해지는 법이다. 초기에 병원을 갔으니 찰과상의 그런 진전 상황에 대해 미처 생각을 못하고 대충 드레싱만 해주고 보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병원에 갔다 왔으니 할 도리를 다했는데 이상하게 상처 부위는 점점 심해지니 병원을 기피하게 되고, 급한 김에 약국이라도 들러본 것이다. 소독약과 거즈와 습윤밴드 등을 사긴 했는데, 손님은 암담한지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다. 이 상태로 뒀다간 상처가 더 심각해질 것 같아 집에 가서 이런 식으로 드레싱 하라고 설명을 해봤지만 계속 멍한 상태다. 도저히 안되겠어 상처를 보기나 하자는 심사로 진물로 덕지덕지한 청바지를 떼내보기라도 하자, 싶었다. 그러나 고름이 청바지에 엉켜 붙어 굳어버려 청바지가 떼어지지 않았다. 식염수를 부어 가며 청바지를 조금씩 떼어내니 손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엉겨 붙은 청바지가 거의 뜯겨나갈 즈음에는 손님은 남자로서의 긍지는 커녕 아파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마무리까지 하고 나니, 손님은 다시 얌전해졌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비칠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상처를 환자와 내가 동시에 들여다 보는 이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열어주었다. 말로만 듣던 여기 아파요, 저기 아파요, 가 실지 공감상황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후로도 다쳐서 온 사람들은 많았고, 나는 계속 공감상황이 늘어났다. 그러더니 어느날인가부터는 말로 하는 아파요, 에도 공감되는 순간이 왔다. (너무 길어서 이 부분 생략) 그러나 이 공감은 복불복이어서 언제 올 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공감을 하고파도 안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빨리 대화를 마치고자 하는 생각으로 말을 끊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몰입하게되어 나도 모르게 깊은 공감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복불복의 상태는 아주 불안정하다. 엔드로피가 어디로 튈 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기치않는 불상사가 곧잘 생긴다. 아니, 내가 저렇게 속으로 생각을 하는 자체가 불상사다. 저렇게 생각을 하기 싫은데도, 피곤하기 때문에라든가 손님이 너무 무례하기 때문에라든가 하는 갖가지 이유를 핑계로 들며 자꾸 저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이 싫은 것이다. 저 상황은 나의 현 상황 임과 동시에 피하고픈, 혹은 극복하고픈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바쁜 시간들이 가고 좀 쉬고 싶을 때, 하필이면 그 시간을 맞춰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 사람이야 그 시간을 일부러 맞추지는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그 시간에 오는 사람은 대개가 같은 행태를 보인다.) 소설 속 의사 역시 퇴근 시간 직전에 오는 환자는 받지 않으려 한다. 칼퇴근을 하려는 개인의 이기심? 처럼도 보이지만, 나는 의사가 이해된다. 하루종일 지친 속에서 이제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으로 팽팽한 신경줄을 느슨하게 만들며 이제 더는 못하겠어, 라는 마음가짐 일텐데 급하다며, 니가 퇴근시간이건 말건 나와는 상관 없어, 내가 아프다는데 감히 진료를 안봐, 나더러 지금 다른 병원에 다시 가라는 말이야? 등의 말을 들으며 진료를 가외로 본다는 건 분명 지치는 일이다.
역치를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 퇴근 시간 즈음이다. 퇴근 시간을 넘어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금방까지도 팔팔했던 몸이 축 늘어지며 더이상 하다가는 쓰러지겠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혹은 다음날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의사 역시 그런 느낌을 알 것이다. 마지노선. 자신이 내일 진료를 또 봐야 되는 상황에서, 그 마지노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지키고 산 그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탕탕탕.
늦은 밤. 자신의 불 꺼진 건물 내려진 샤시를 두드리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길래 크게도, 애타게도 아니고, 소심하게 샤시를 두드리는 걸까.
그 누구의 존재가 누구였나에 따라, 남자의 삶이 바뀐다. 그러나 기실은, 그 존재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존재의 상태가 어땠냐가 아니었을까. 그 상태가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던 의사는, 샤시를 내리치던 청각의 소리를 유죄 확정! 의 탕탕탕!!! 소리로 바꾸어 가슴 속에서 평생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나 역시 유죄 확정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저런 고민을 하는 것이겠다. 내 고민의 결과가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