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3대 논쟁
이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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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가끔씩 이런 의문이 들곤 한다. 같은 일을 두고서 책과 책 사이에 다른 의견을 접할 때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간하기 힘들 때면 무엇을 근거로 삼아서 그 진위에 접근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에 담긴 내용에 앞서 우선 그 책의 저자에 대한 정보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 다양한 경로로 접한 저자의 책이나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살펴 그 저자를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가치관이 더욱 중요한 ‘역사의 해석’에 관한 내용이라면 저자의 중요성은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역사해석에 관한 문제의 중요성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과 일부 학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역사논쟁이 그것이다. 동일한 사건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다른 해석의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재호의 ‘조선사 3대 논쟁’을 통해 다시 접하게 된다. 이 책은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사칠신 묘소가 있는 이유,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의 진위 여부, 의도적으로 폄하된 이순신에 대한 평가’ 등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담고 있다.

 

'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는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어용학자들이 사육신 중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는 역사 날조극을 자행했고 1978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 조성 당시 권세가(김문기의 후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작용으로 기존 사육신의 묘와 함께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를 추가로 봉안함으로써 사칠신 묘소가 되었다는 것, 또한 ‘율곡 이이는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 했나’는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한 ‘율곡전서’에 수록된 김장생의 ‘율곡행장’, 이정귀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송시열의 ‘율곡연보’ 등 몇몇 기록에서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서애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 누가 진정한 구국의 명장인가’는 ‘인물한국사’와 ‘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책에서 기존의 이순신과 원균의 이미지를 뒤집는 일이 있어났다.

 

왜 이처럼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나 폄하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사물을 보게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보고 싶은 것 만’을 보게 된다. 그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역사 왜곡의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제한된 기록물을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시각으로 바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이 틈이 역사해석의 어려움이며 또한 왜곡이 발생하는 지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를 이용하는 학자라면 그 사람이 이미 학자로써의 이미 자존심을 버린 사람일 것이다. 한 개인의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치더라도 역사는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 책 ‘조선사 3대 논쟁’에서는 세 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 역사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그 역사를 잘 못 이해하게 만드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역사를 이어 받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결국 개인과 역사를 함께하는 한 민족의 미래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역사를 올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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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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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과 미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맛 집으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딜 가든 맛있는 음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음식점들이 부지기수다. 먹을거리가 넘쳐나는데도 막상 무엇을 먹을지 난감할 때가 많다. 음식이란 사람의 삶을 영위하는데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의식주 중에 하나다. 하지만,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에게 음식이란 그저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정도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피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된다면 꼭 맞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탐식이나 미식가들이 그들이 아닐까? 아니 그들은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하고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사람들이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다. 즐기는 것을 넘어 즐긴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음식을 탐하는 경우를 ‘탐식가’라고 한다.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 음식의 맛을 찾아다니며 것을 두고 왈가불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친 것은 피해야 옳다는 말이다. 맛을 찾아다니거나 음식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경우는 현대에 들어 생긴 일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다양한 시대에 지나친 음식에 대한 몰두가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정적을 제거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서양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경우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음식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탐식가’와 ‘미식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김정호의 ‘조선의 탐식가’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음식 또한 제한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살생을 금했던 불교국가였던 고려이후 조선에 들어서면서 고기에 대한 금기가 풀리면서 음식문화에 대한 폭이 넓어졌다. 그것이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 음식을 탐하는 문화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계급에 의해 12첩 반상이니 9첩, 7첩, 5첩 등으로 밥상까지 규제했던 사회에서도 탐식가들은 있었다. 조선의 탐식가들 경우 저자에 의하면 김안로와 윤형원과 같이 권력과 부의 맛을 밥상에서 느끼려 한 경우와 서거정과 허균처럼 진귀하고 맛난 음식을 찾아 먹고 기록한 이른바 '맛집 탐방형'도 있었다. 이들이 주목했던 음식으로는 우심적이나 두부, 순채 등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소박한 밥상론의 이덕무나 정약용처럼 소박한 식단을 지키며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의 음식철학을 구현한 사람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살았던 사대부들 보다는 이덕무처럼 ‘중인’ 신분인 사람들이었다.

 

정약용과 개고기, 어쩜 부적절한 조합이 아닐까? 하지만 정약용은 형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생활에서 몸이 상했다는 것을 알고 개고기를 추천하며 그 요리법까지 알려주고 있다. 홍길동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은 귀양을 가면서도 먹고 싶은 것이 있는 고장으로 가게 해달라고 했다. 개고기를 뇌물로 받고 사람을 추천한 김안로도 있다. 모두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다.

 

소중화로 자처하며 중국의 문화를 따라하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음식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누가 무엇을 먹었다는 기록의 의거하여 자신들도 그것을 좋아했다. 우심적이나 두부 등이 그 대표적인 음식이다. 또한 중국의 열구자탕이나, 일본으로부터 승기악탕과 같은 외국음식들도 당시에 유행했다는 것을 통해 당시 음식문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저자는 소박하고 담박해야 할 성리학의 밥상을 뒤엎은 조선 시대의 탐식과 미식을 파고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전국 곳곳이 맛 집이지만 ‘맛’에만 집중할 뿐 음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는 드문 것이 현실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 보다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이 책 ‘조선의 탐식가들’은 각종 기록을 찾아 조선 시대의 음식문화를 살필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음식의 가치와 의미를 살필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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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 -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이건창 지음, 송희준 옮김 / 글항아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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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아야 할 진정성은 무엇일까?

수 많은 문학가들 중에 유독 그 문학가의 작품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특정 작가의 글은 빼놓지 않고 찾아서 읽을 정도로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소설이나 시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인문학 분야의 글에도 그러한 현상은 나타난다. 무엇이 이러한 현상을 불러오는 것일까? 우선은 그 작가나 학자의 글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용에 앞서 작가나 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독특한 글 맛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조선의 역사와 사람들에 주목하면서 관심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조선의 후기를 살았던 이덕무로 그의 책과 글에 대한 관심이 조선 역사를 알가가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조선과 현대인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는 이덕일이 그 사람이다. 이덕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이를 독자들과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는 시대도 하는 일도 다르고 두 사람의 글에서 느껴지는 글 맛도 다르지만 강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들의 글을 대하다 보면 지금 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글이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기에 글은 글을 쓴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가지는 진정성이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조선의 마지막 문장 ’을 통해 만나는 사람 이건창은 글쓰기와 관련되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우선 ‘이건창’(1852~1898)은 어떤 사람일까?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건창은 강화도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 김택영(1850~1927), 황현(1855~1910)과 함께 구한말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또한 김택영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수한 고문가 9명을 뽑았던 가운데 들어가 ‘여한구가’에 속했을 정도다.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 ‘조선의 마지막 문장’은 그런 이건창의 문집인 ‘명미당집’을 저자 송희준이 번역하고 이 속에서 이건창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뛰어난 명편들과 당대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을 선별해서 역고 자신의 해설을 붙여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건창의 다양한 면모 중에서 ‘문장가’로 주목되는 부분과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편집되어 있다. 문장 이론을 모은 제1부, 논설과 평론을 모은 제2부, 충성과 절의와 관련된 글을 모은 제3부, 가족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 산문을 모은 제4부, 백성들의 삶을 기록한 제5부와 제6부, 다양한 문체를 엿볼 수 있는 걸작들을 모은 제7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건창은 ‘문장이란 뜻을 얽는 것이기에 뜻이 연속하고 관통하게 하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하고 뜻을 통하게 하려다보면 “어조사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구사할 겨를이 없으며, 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고 강조한다.’이는 저자 송희준이 이건창의 문장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다. 나아가 ‘언어를 다듬는 법’, ‘敵意로 主意를 공격케 하는 법’, ‘말과 뜻이 서로 넘침이 없게 하는 법’, ‘소리와 리듬을 울리는 법’ 등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담긴 글들을 통해 이건창의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글로 여겨진다.

 

이러한 문장론을 바탕으로 다양한 글에서 보여 지는 이건창의 삶과 글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부와 3부의 글들은 관료와 학자의 시각으로 본 당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보여준 그의 태도가 글쓰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글은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진다는 특성을 한껏 발휘하여 백성들의 삶을 기록한 모습도 그의 삶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현실의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고 싸운 흔적이 역사를 상고하고 문예를 비평하고 정책을 논하고 취미를 완상하고 삶을 철학하는 과정에 순고정대하게 녹아있는 것’, 이것이 이건창의 글이며 삶이라는 저자는 ‘그가 글쓰기의 온갖 요소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전개한 그 귀하고 아까운 현장이 아직 우리의 현재와 접속하지 못했고, 이 시대의 문장론 속으로 갈무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러한 저자의 안타까운 심정은 이건창이 남긴 몇 편의 글 속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어 공감을 불러온다. 하여 이건창의 평전이나 전기가 나와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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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승부사들 -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돌파한 사람들
서신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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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불문하고 통하는 개인의 열정과 집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이를 두고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으며 가진 자 만이 용이 된다고 한다. 전자는 개인의 조건이나 사회적 환경보다는 개인의 노력 여부에 의해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의미가 현대에 와서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 후자다. 시대가 변한 것이 그렇게 같은 말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의미 없다고 과소평가하고자 하는 의미는 더욱더 아니다. 신분이나 지위, 경제적 부, 학력 등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조건을 확실하게 허물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개인의 노력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대접받고 있으며 그런 사람이 한 자리에 우뚝 섰을 때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다 통하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제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닌 역사 이래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뚝 선 그 사람의 과정과 노력을 보지 않고 당장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만 주목하여 부러워하면서도 때론 시기와 질투를 넘어 아애 목숨까지 빼앗는 경우가 일어나기도 했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지난 역사의 과정을 살피다 보면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저자 서신혜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열정과 집념으로 운명을 돌파해내고 당당히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삶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시의 적절성까지 살핀다.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이 바로 ‘조선의 승부사들’들이다.

 

‘조선의 승부사들’에는 과학기술자 장영실, 상례전문가 유희경, 역관 홍순언, 의원 허준, 비파연주가 송경운, 박물학자 황윤석, 천문학자 김영, 목민관 김홍도, 국수 정운창, 출판전문가 장혼 등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낫선 사람도 눈에 띈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방법으로는 정사라고도 부르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다양한 기록들을 살펴 각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그렇개 모은 기록들 속에는 상식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것과는 상반된 것들도 존재한다. 그처럼 기록에 근거한 확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역사를 올바로 조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열 명의 사람들은 장영실이나 유희경처럼 대부분 서자나 노비, 천민 출신들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며 조선 최고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환경이나 개인의 조건을 넘어 확실히 성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 중에는 박물학자 황윤석처럼 어엿한 가문의 출신으로 충분히 당대 출세가도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이를 마다하고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들도 있다. 특히, 유희경의 경우 부안의 매창과 관련되어 시문에 능한 선비로 알고 있었는데 상례전문가라는 다소 의외의 모습까지 모망하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후자의 경우가 어쩜 더 어려운 과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살다보면 한번 꼬인 일이 엉킨 실의 매듭처럼 풀기 어려운 경험이 있다. 이리저리 궁리해 봐도 도무지 풀 기미를 찾지 못할 때 오는 절망감은 대단하다. 하지만 날 때부터 그런 매듭을 지닌 경우라면 그 삶의 미래는 어떨까? 이런 조건을 극복하여 당대 전문가로 우뚝 선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사회적 환경이나 개인의 조건을 극복한 열정을 찾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 결국 개인의 이러한 노력은 존중받아야 할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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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
권오영 지음 / 소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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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지천명에 이르는 동안을 살아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큰 뜻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던 청춘시절 생사고락을 함께하자던 사람들은 이제 내 주변에 없다. 사람의 됨됨이 보다는 그 사람이 품은 뜻에 의해 만난 사이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물욕과는 거리가 멀어 오랫동안 일상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열정을 다해 만났던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 둘씩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 있다. 책이며 꽃과 나무를 비롯한 자연이 그것들이고 평생을 담쌓고 살 것 같은 음악에 대한 도전이고 또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내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들로 채워진다.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움’, 그것은 첫사랑의 주인공이나 살던 고향, 떠난 부모님처럼 특정한 어떤 것이라는 대상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다. 물론 그리움의 특별한 대상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특별한 대상이 차지하는 그리움보다 더 깊고 더 광범위한 범위를 차지하는 것이 대상없는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리움을 철학자나 심리학자 또한 인간의 본성에 관심을 갖는 사상가들은 나름의 규정으로 표현하고 있겠지만 어설픈 내 생각으로는 ‘자연’또는 ‘자연으로의 회귀본능’ 이 그 특별한 대상이 아닌가 싶다. 하여,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토록 계절이 바뀔 때 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산으로 들로 그것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 혹 그 반증은 아닐까? 젊은 사절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꽃이나 나무와 같은 것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 아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여기 그런 사람이 또 한사람 있다.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의 저자 권오영이 그 사람이다. 우선 저자 권오영은 어떤 사람일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특정한 상이 잡히는 것이 없다. 심지어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각한 오해다. 그녀는 한때 전시회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 화실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모든 것을 날려버린 사람이다. 그로부터 스스로 지은 블로그 아이디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그런 저자가 스스로 삶의 통로를 개척한 것이 ‘글쓰기’였다고 한다. 그렇게 쓴 글을 모아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를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는 글, 주변에서 만나는 식물이야기,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분노하며 지켜본 동물이야기, 떠나온 고향에 대한 이야기, 저자의 예술에 관한 지식과 미학관을 보여주는 전시회 관람기 그리고 저자의 모사그림과 마우스그림을 글과 함께 묶은 것들이다.

 

저자의 글 그 중심에 ‘그리움’이 있다. 삶의 굴곡을 견디며 살아가다 보니 삶의 모든 중심에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그리움은 ‘그림에 대한, 작은 것에 대한,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이는 저자 권오영에게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공통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 권오영의 이야기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의 글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속내를 공감하기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이 가지는 힘이 아닌가 한다.

 

삶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 삶의 굴곡을 돌아와 스스로를 돌아본 것이 인생의 오후 네 시쯤이 아닐까? 네시라면 내 삶의 어디쯤일까? 권오영의 글 속에 담긴 나와 자연 그리고 이웃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나이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권오영의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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