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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
권오영 지음 / 소동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나의 시간은 어디쯤일까?
지천명에 이르는 동안을 살아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큰 뜻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던 청춘시절 생사고락을 함께하자던 사람들은 이제 내 주변에 없다. 사람의 됨됨이 보다는 그 사람이 품은 뜻에 의해 만난 사이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물욕과는 거리가 멀어 오랫동안 일상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열정을 다해 만났던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 둘씩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 있다. 책이며 꽃과 나무를 비롯한 자연이 그것들이고 평생을 담쌓고 살 것 같은 음악에 대한 도전이고 또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내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들로 채워진다.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그리움’, 그것은 첫사랑의 주인공이나 살던 고향, 떠난 부모님처럼 특정한 어떤 것이라는 대상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다. 물론 그리움의 특별한 대상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특별한 대상이 차지하는 그리움보다 더 깊고 더 광범위한 범위를 차지하는 것이 대상없는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리움을 철학자나 심리학자 또한 인간의 본성에 관심을 갖는 사상가들은 나름의 규정으로 표현하고 있겠지만 어설픈 내 생각으로는 ‘자연’또는 ‘자연으로의 회귀본능’ 이 그 특별한 대상이 아닌가 싶다. 하여,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그토록 계절이 바뀔 때 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산으로 들로 그것도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 혹 그 반증은 아닐까? 젊은 사절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꽃이나 나무와 같은 것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 아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여기 그런 사람이 또 한사람 있다.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의 저자 권오영이 그 사람이다. 우선 저자 권오영은 어떤 사람일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특정한 상이 잡히는 것이 없다. 심지어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각한 오해다. 그녀는 한때 전시회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 화실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모든 것을 날려버린 사람이다. 그로부터 스스로 지은 블로그 아이디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그런 저자가 스스로 삶의 통로를 개척한 것이 ‘글쓰기’였다고 한다. 그렇게 쓴 글을 모아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를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는 글, 주변에서 만나는 식물이야기,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모에 분노하며 지켜본 동물이야기, 떠나온 고향에 대한 이야기, 저자의 예술에 관한 지식과 미학관을 보여주는 전시회 관람기 그리고 저자의 모사그림과 마우스그림을 글과 함께 묶은 것들이다.
저자의 글 그 중심에 ‘그리움’이 있다. 삶의 굴곡을 견디며 살아가다 보니 삶의 모든 중심에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그리움은 ‘그림에 대한, 작은 것에 대한,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이는 저자 권오영에게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공통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 권오영의 이야기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의 글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속내를 공감하기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이 가지는 힘이 아닌가 한다.
삶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 삶의 굴곡을 돌아와 스스로를 돌아본 것이 인생의 오후 네 시쯤이 아닐까? 네시라면 내 삶의 어디쯤일까? 권오영의 글 속에 담긴 나와 자연 그리고 이웃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나이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권오영의 ‘돌아와 앉은 오후 네시’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