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賞春
꽃 보고자 나선 길 목적한 바는 이뤘으니 느긋해지는 마음은 당연하다. 동료들은 건너편 꽃자리에서 여전히 낮은 자세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꽃에 눈맞춤하고 있다.

혼자 어슬렁거리며 습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멈춰선 자리가 여기다. 꽃잎 하나 떨어져 다시 꽃으로 피었다. 못다한 마음이 남았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놓인자리가 절묘하여 발걸음을 붙잡힌 것이다.

하늘 보고 누웠으니 등돌리지는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고 아직 눈맞춤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보아 영영 이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노린재나무는 꽃잎 하나를 떨궈놓고서 봄날이야 가든말든 천하태평이다. 그 끝자리를 서성이는 이도 매한가지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삼매경이다.

一步二步三步立 일보이보삼보립
山靑石白間間花 산청석백간간화
若寫畵工模此景 약사화경모차경
其於林下鳥聲何 기어임하조성하

가던 길을 멈추고 봄을 구경하니
산은 푸르고 돌은 흰데, 사이사이 꽃이로구나!
만약 화가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 아래서 우는 새 소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조선사람 김병연(1807~1863)의 상춘賞春과 무엇이 다르랴.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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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별꽃'

애기도라지 못지 않게 애를 태운 것이 이 녀석이다. 때를 잘못 만나 발아하고 무성하게 자라더니 결국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말았다. 내게 볕을 많이 쐬면 가능하다는 말이 전해주는 이는 그것이 희망고문었다는 것을 알까?

 

어디서왔을까. 여기저기 꽃이 피는 곳이 여럿이다. 매화화분에서도 해국화분에서도 대문 옆 화분에서도 핀다. 앞으로 필 화분도 있으니 기대가 부푼다. 많은 열매가 발아율도 좋다는데 꽃밭을 이룰 꿈을 꿔도 좋겠다.

 

아주 작게 피는 녀석이지만 진보라색에 노랑꽃술이 유독 돋보이는 강렬함이 있다. 볕이 있는 낮에 피었다가 지는 녀석이라 출근한 이에게는 꽃을 피우고도 여전히 애를 태우고 있다.

 

제주에서 비행기 타고 짠물 건너 서울로 갔다가 다시 기차타고 소백산에서 꽃을 피웠다. 그 씨앗이 승용차로 곡성 또가원까지 왔으니 뚜껑별꽃의 나들이와 함께 한 꽃벗들의 마음이 깊고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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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도라지'

제주에 사는 꽃친구의 이 꽃자랑에 한숨만 늘어났다. 이 꽃 본다고 짠물을 건널 수도 없는데 앞서 다녀온 이들이 가져와 집에 핀 꽃을 자랑하는 것을 보자니 겨우 달랬던 부러움에 심술까지 났다.

 

그 마음을 익히 아는 이가 친절하게도 씨앗을 보내왔는데 때를 잘못 골라 파종한 꽃은 보지도 못하고 한해가 지났다. 이른 봄 짠물 건너갔다 온 꽃친구가 전해준 모종을 받아 화분에 옮겨두고 이제나 저제나 꽃 피기만을 기다렸다.

 

꽃봉우리 올라오고 필 때가 되었는데 좀처럼 꽃을 보지 못한다. 아침은 피기 전이고 퇴근하면 꽃잎을 닫으니 어찌 본단 말인가. 어느날은 이 꽃 보고자 퇴근을 서둘렀다. 참으로 어렵게 만난 꽃이다.

 

연보라색 꽃이 앙증맞게도 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여리여리한 꽃대 끝에 하나씩 피는 꽃이 볼면 볼수록 매력덩어리다. 도라지를 닮았는데 작아서 애기도라지라고 한단다. 다른 이름으로는 좀도라지, 아기도라지, 하늘도라지라고도 한다니 무엇으로 불리던지 이쁘기만 하다.

 

어렵게 얻었으니 오래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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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淡 평담
어느날 반가운 이가 남도 나들이 길에 내가 거처하는 모월당에 들렀다.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관심사인 붓글씨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불쑥 내민 글씨다.
밤이 깊도록 창문에 걸어두고 글씨가 전하는 느낌과 그 뜻에 관한 담소가 이어졌다.

'고요하고 깨끗하여 산뜻하다'는 평담의 사전적 의미다. 이 글씨와 내가 잘 어울리겠다는 말에 선듯 받았다. 머리맡에 두고보며 담고 있는 뜻의 무게를 짐작하면서 몇날며칠을 두고 살피기를 거듭했다.

"평온하고 담백 충담(?淡)한 풍격적 특성을 일컫는 말로서 주로 풍격 용어로 많이 쓰인다. 평담은 평범하고 용렬해서 담담하기만 하고 깊은 맛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에서 평담을 "따뜻한 바람과 같이, 옷깃에 푸근하게 스민다"고 노래하였다. 때문에 평담은 비교적 맑고 고아하며 편안하고 고요하며 한적한 정취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검색하여 찾아낸 뜻이 여기에 이르렀다. 글씨를 쓰고 나에게 전해준 이의 마음을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 뜻을 감당하기에 버거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곁에 두고서 일상의 '화두'로 삼아도 좋을 것이라 여겨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한다.

'평이하나 오래 보아도 물리지않는 물 같은 맛'

#글씨는_서예가_항백_박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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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담장을 허물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 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맷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과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 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처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다. 시골집 담장들은 시야를 가둘만큼 높지 않다. 그 담장 마져 허물어버리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내 소유가 되었다. 나를 둘러싼 마음의 담장에 틈을 내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보자.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썩 좋은 방법이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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