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수요일

청산행

손 흔들고 떠나 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밭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치솔을 생각한다.
남방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 오르고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이기철 시인의 시 '청산행'이다.

#류근_진혜원_시선집 #당신에게_시가_있다면_당신은_혼자가_아닙니다 에서 옮겨왔습니다. (16)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에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구례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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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은 사람을 그윽하게 하고, 술은 사람을 초연하게 하고, 돌은 사람을 준수하게 하고, 거문고는 사람을 고요하게 하고, 차는 사람을 상쾌하게 하고, 대나무는 사람을 차갑게 하고, 달은 사람을 외롭게 하고, 바둑은 사람을 한가롭게 하고, 지팡이는 사람을 가볍게 하고, 미인은 사람을 어여삐하게 하고, 중은 사람을 담박하게 하고, 꽃은 사람을 운치롭게 하고, 금석정이金石鼎彛는 사람을 예스럽게 한다.

그런데 매화와 난은 거기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옛사람이 어찌 애지중지할 줄 몰랐으리요만 평범한 꽃에 운치를 비교할 수 없고 특히 한 글자로써 적당히 표현할 수 없으므로 거기서 빠뜨린 것이다.

나는 한 글자를 뽑아내어 그것에 해당시기를 '수壽'라고 한다. 수의 뜻은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 볼 것이다."

*조선사람 우봉 조희룡(1789~1866)의 글이다. 매화에 벽이 있을 정도로 좋아해 매화 그림을 많이 그려 '매화화가'로 불렸던 사람이다. 작품으로 '매화서옥도'와 '홍매대련' 등이 있다. 이글은 '한와헌제화잡존'에 있다. 조희룡은 나이들어 호를 '수도인壽道人'이라고 지을만큼 '수壽'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달도, 거문고도, 꽃도 좋아하고 물론 매화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조희룡의 이 글에 다 공강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해서 관심을 갖고 그 주목하는 바가 벽癖이 생길 정도라면 혹 다를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치癡나 벽癖이 없는 사람은 그 삶이 무미건조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며 복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할 대상이 있는가? 나이들어 갈수록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하는 대상이 늘어난다. 그러니 틈이 생긴 만큼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꽃, 나무, 서각, 피리, 책ᆢ.

혼자 있는 시간을 무엇과 함께 어떻게 누려야할까.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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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
짠물 건너야 볼 수 있나 싶었다. 육지에서도 크고 작은 사찰 근처에서 생강과 닮은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긴 했으나 꽃피는 시기를 맞추지 못하니 꽃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유심히 봐둔 몇곳 사찰에는 가지 못하고 꽃무릇 보러간 강천사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후 노고단을 내려와 들린 천은사 입구에서 다시 본 것이다. 지난해 벗들과 꽃 흔적만 보았던 선암사도 있고 집근처 관음사 입구에도 태안사 능파각 지나서도 있다. 그런거보면 사찰에서는 흔한 식재료였나 보다.

여름에 엷은 노란색 꽃이 피나 하루 만에 시든다고 한다. 특이한 향기가 있고, 어린순과 피기 전의 꽃줄기는 먹는 식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특이한 모양과 색으로 눈길을 사로잡았기에 올 초여름 제주에서 얻어온 뿌리를 담장 밑에 묻어 두었는데 돌아오는 봄에 새싹이 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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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속)
특정한 꽃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여느 여름날 초등학생인 아이의 손을 잡고 지리산 칠불암에 올라 한적한 경내를 거닐다 언덕바지에 핀 상사화를 만났다. 그후로 여름이 끝나는 무렵이면 칠불암과 함께 떠오르는 꽃이다.

터전을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여러 종류의 상사화를 모았다. 각기 다른 색깔로 피며 특유의 느낌을 가진 꽃들이지만 몇몇은 구분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다양한 사연이 담긴만큼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한창 더울때 피는 상사화부터 구분이 쉽지 않은 붉노랑상사화과 진노랑상사화, 흰색의 위도상사화, 짠물 건너온 제주상사화와 매혹적인 붉은색 백양꽃, 붉기로는 으틈인 석산과 흰색의 석산에 이르기까지 제법 많은 꽃들이 순차적으로 핀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에는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 다는 의미로 상사화相思花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따지고보면 무릇 처럼 비슷한 식물이 있지만 유독 상사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늦거나 빠르다는 것은 사람의 기준이다. 꽃은 제 순리대로 알아서 핀다. 가장 늦은 흰색의 꽃무릇이 지면 꽃 따라 사람들 가슴에도 가을 바람처럼 그리움이 일렁일 것이다. '순결한 사랑'이라는 꽃말에 깃들 서늘함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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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3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상사화란 이름보다 꽃무릇이란 이름을 더 좋아해요^^
 

인생 제1낙樂

맑은 창가에 책상을 깨끗이 정돈하고,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놓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더불어 산수를 이야기하고,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를 품평하는 것을
인생의 제1낙樂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장서가와 서화수장가로 유명했던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44)의 말이다. 출사하여 입신양명을 중요한 가치로 치던 조선시대에 출세에 미련을 버리고 마음 맞는 사람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무엇에 대한 가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사람이 벗을 찾아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깊어가는 가을이 주는 정취는 자기를 돌아보게 하며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는 시간이다.

같은 때 같은 곳에 머문다. 소회를 묻는 말에 오히려 특별한 것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정신 없이 빠져나왔던 곳에 들어가 일년 전 그때를 되뇌여봤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른가?

자유는 매이는 것으로부터 풀려남이니 마음이든 몸이든 평소에 무엇에 매일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새삼스레 일상의 평범이 귀함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에게 있어 인생의 제1낙樂은 무엇일까.

'침잠沈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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