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바람이 꽃을 피운다 - 심형준 에세이
심형준 지음 / 새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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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답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이나 당당함은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 힘은 자신 이외에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치 않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나이 들어 세상을 바라보며 삶에 지친 청춘이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굴복해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에는 따스함이 함께한다.

 

새미에서 발간한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의 저자 심형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은 가르치고 책과 더불어 생활하며 글을 써온 저자의 눈으로 바라본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는 따스함이 묻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을 영위하며 느끼는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살아오며 겪었던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사회 구석구석의 다양한 관심거리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 책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의 저자 서문을 읽으며 다소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어 저자의 프로필을 다시보게 된다. “잔바람이 꽃을 피운다에 실린 저자의 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는 표현들이 거침없이 수록되어 있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발표한 글에 대해 겸손함을 먼저 내세우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고 우선 당당하다.

 

저자의 그런 자심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책에 실린 몇 편의 글 들 만으로도 짐작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세상을 살만큼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얻은 교훈의 무게가 참으로 클 것으로 생각되는 글들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 할 점들에 대해 저자의 확신에 찬 주장을 접하지만 선입감처럼 근거 없는 주장이나 강요가 아님을 알게 된다. 보편타당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좋은 글들이지만 선배세대들 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후배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때론 괜한 소리가 아닌가 싶은 것들도 없지는 않다.

 

평소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성대방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에도 몇 편의 글들은 저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세대차이로 인한 오해나 기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글들도 있다. 저자의 주장하는 바와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상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이 가지는 사고의 시각과 깊이가 같은 수 없고 삶을 살아온 시간이 다르기에 가치관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듯 말이다. 하여, 굳이 저자의 주장과 내 생각이 맞지 않더라도 인생의 선배의 말에 귀 기울이듯 볼 수 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전직 대통령 애우에 대한 이야기처럼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나 정치적 지향점이 보이는 글들에서 더욱 그러한 점이 많아 보인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저자의 살아온 삶을 알게 하는 부분이도 하고 글에 실린 무게감을 더해줄 수 있기도 하기에 굳이 시비를 걸 필요는 없으리라.

 

산문은 사람들이 세상과 접하면서 가지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의 가치관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글은 산문으로 완성된다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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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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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을 채워가는 집

어느 시대든 인간이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전 시기든 자신이 살아가던 시기든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과 문화나 삶의 방식을 담고 있다. 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사회적 흐름의 경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중요요소로 의(衣)식(食)주(宙)를 꼽는다. 이 중에서 당대 문화적 요소를 가장 많이 반영하는 것이 주(宙)가 아닌가 싶다. 현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집에 대한 생각은 주거의 목적으로써 집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으로 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에 대한 투자만큼 확실한 재태크가 없다는 말처럼 투자 대상으로써의 집은 주객이 전도된 양상으로 발전하며 현대까지 여전히 지배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집은 언제부터 어떤 모양으로 인간과 함께한 것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 있다. 서해문집에서 발간한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 그것이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글로 집을 짓고 있다는 저자 서윤영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집에 대한 역사를 살핀다. 건축 형태의 변화뿐 아니라 형태를 만들어 온 내용까지 함께 살피고 있어 건축으로써 집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를 살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인류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4대 문명발생지를 고찰하면서 서로 닮아 있는 부분이나 상이한 부분을 밝히고 상호 영향성의 여부까지 살핀다.

 

저자가 집이라는 특수목적 건축물에 대해 살피면서 간과하지 않는 점이 있다. 바로 인문학적으로 집의 변화를 살핀다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거나 자연을 극복하려는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주거형태를 살피면서 움집현태의 우주부터 현대 주거문화의 전형이 되고 있는 아파트까지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생활방식을 유추하며 시대마다 달리한 시대의 경향성이나 인간의 욕망까지를 이야기 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집이 가지는 다양한 성격을 살피면서 인간의 계층화에 따른 집의 변화까지 함께 살피고 있다. 그래서 어떤 집에 사느냐나 어디에 사느냐 하는 질문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핀다. 조선 후기 주거에 여성 전용 사랑채인 ‘안 사랑채’가 있었다는 점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살고 싶어 하는 아파트에서 주방이 점유하는 공간적 확대, ‘타워팰리스 박씨-78평’ ‘래미안 김씨-33평’와 같은 실태를 통해 집이 가지는 사회적 가치의 반영이나 그 경향성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자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집과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게 하며, 우리의 집이 품고 있는 욕망은 누구의 것인지 묻는다. 건축물인 집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며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지능이 높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한다고 알려진 영장류는 대부분 집을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을 뜻할까? 어쩌면 유독 인간 만에 욕망의 대상으로 집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복잡하고 삭막한 도시의 생활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1970년 대 후반에 지어진 조그마한 한옥에 마당이 제법 커 사람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마당 한 쪽에 텃밭을 만들고 화단도 크고 작은 것을 두 곳에 마련하고 여러 가지 과일 나무를 심으면서 이 집을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하다. 무엇이든 그 주인을 닮아간다고 하는데 걱정 반 기대 반이다. 그저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머물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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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 그대에게 - 세상 속 당신을 위한 이주향의 마음 갤러리
이주향 지음 / 예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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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見)과 관(觀)의 차이로 내면을 향한 성찰

자신의 내면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흔히 철학이라는 범주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통례이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자신울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대해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기에 내면과 접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자신과 만나는 기회는 대부분 보는 것을 통하게 된다. 시각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보면서 대상을 인식하고 그 대상과 더불어 사유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본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경우가 만다. 시각적인 정보에 의한 것이 우선되는 본다는 것은 그래서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보다는 밖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것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한자에서는 그래서 본다는 것은 같으나 대상의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 말을 사용한다. 바로 관(觀)이다. 견(見)이 바깥에 중심을 둔다면 관은 내면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다. 숨겨져 있어 알 수가 어렵지만 알게 되면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까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대상을 관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주향의 ‘그림 너머 그대에게’는 그림 읽어주는 책의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발간되는 것을 몹시 반기는 사람으로서 저자의 이 책 역시 반갑기만 하다. 저자는 클림트, 반 고흐, 샤갈, 루벤스, 렘브란트, 모네 등의 작품을 통해 화가가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림이 주는 시각적 정보 이외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그림을 이해하고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림을 읽어주는 책은 대부분 그림과 얽힌 뒷이야기나 화가와 관련된 주제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주향의 ‘그림 너머 그대에게’는 다른 점이 있다. 분명 그림을 주제로 그와 관련된 그림이야기를 펼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림을 매개로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안 신화와 종교, 철학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불편한 그래서 때론 부담스럽기까지 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그것은 그림 속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를 내 자신의 내면의 숨어 있는 모습과 관련지으며 공감을 불러오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인들의 숙명과도 같은 외로움이나 고달픔과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아버지의 눈길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조금 힘들더라도, 사랑이 조금 벅차더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듯 이 책에서 그림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외부적이며 피상적인 것에 몰두한 나머지 세상을 힘들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관(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저자가 자신의 내면과 만나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산책을 즐기듯 행복했기에 그 행복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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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 선사의 우리茶 기행
박동춘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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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통한 사람 사이의 소통

지인의 따스한 마음이 담긴 차 한통을 선물 받고 아껴 마시는 기억이 있다. 차에 대한 특별한 취향이 있다거나 차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격식을 갖추기도 전에 차 맛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을 가슴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던 차다. 하지만, 차를 즐겨 마시거나 찾아 마시는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기에 그저 가끔 손님에 올 때 접대하거나 어쩌다 마음이 동하여 혼자 마시곤 한다. 나의 이런 차에 대한 마음이 나름대로 국한된 경향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연히 차를 좋아하고 좋은 차를 찾아다니며 차 모임을 하는 사람들 자리에 함께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차에 대한 생각과 모습에서 차를 왜? 마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차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지나친 격식과 그 격식에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싫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차 자체가 주인공이면서 사람은 그저 차를 따라가는 것 같은 모습에서 주객이 전된 듯한 어색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옹졸함이 그 출발이겠지만 그 후론 그저 내가 좋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것이 차를 대하는 태도로 올바르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처럼 잘 알지 못하면서도 편견에 사로잡히는 일은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부지기수로 만나게 된다. 이런 편견을 바로 잡는 기회도 때론 우연히 찾아오는 것 같다. 그것은 남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살다가 다시 고향에 터를 잡고 문학에 전념하고 있는 작가 한승원의 작품을 통해서 이다. 초의, 다산, 추사로 이러지는 일련의 작품들 속에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처럼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확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초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며 이들 상호간이 관계를 이해할 때 개별적인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박동춘의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는 바로 차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차의 중심에 있었던 초의와 추사간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고려시대 활발했던 차 문화가 조선에 들어와서 명맥을 유지하지도 못할 만큼 사라진 상황에서 중국과는 다른 우리 차를 복원하고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 차 문화를 형성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초의가 차를 접하고 만들어 온 과정과 이를 추사를 비롯한 신위와 같은 사람들이 극찬하게 차가 가진 본래적인 기능의 찾아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었던 과정에 대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풀어가고 있다.

 

초의차의 계보를 이어온 저자 박동춘은 30여년에 거쳐 차를 만들어 온 사람으로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온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은 바를 이 책에서 초의 선사의 행적을 찾아 가는 형식을 통해 밝혀놓고 있다. 이런 행적에 대한 추적은 관련 유적지에 대한 답사와 문헌자료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간찰을 통해 개인 간 교류와 사적인 감정을 비롯해 초의선사 그리고 초의차와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를 조망하고 있다.

 

학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이 차를 만들어 온 경험과 긴밀히 결합되어 차와 사람에게 한발 더 깊숙이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제기하고 있다. 더불어 차와 관련된 간찰과 그림 등이 함께 실려 있어 주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부록처럼 붙어 있는 인물목록은 조선 후기 초의와 추사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고 빛나게 했던 사람들에 대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알 수 있게 하여 다양하게 관계를 통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세심함까지 보여준다.

 

차는 불가에서 참선을 하는 스님들에 의해 이어져 온 것이 사대부를 중심으로 넓혀지며 오늘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차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애용되어질 수 있는 기초에 초의 선사의 노력에 의해 복원된 초의차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런 일을 한 초의 선사를 사람들 사이에 새롭게 조망 받게 하고 있어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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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 일본군 자살특공대원으로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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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개인이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지는 것일까?

현재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이들 대부분이 말하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북 분단 상황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식민지잔재의 청산을 꼽는다. 이 두 가지가 오늘 한국이 안고 있는 딜레마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남북이 갈라진 상태로 그것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협정 상황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민족의 통일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부분이다. 정치권력의 편의주의적 속성에 의해 민족적 과제가 오락가락하는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어쩜 요원한 문제가 아닌가도 싶다. 그에 버금가는 문제가 일제식민지의 청산문제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이미 완결된 상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일제식민지 청산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일제식민지의 잔재는 오랜 시간이 지낸 지금도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들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나는 조선인 카미카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새로운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정신대도 그것이며 강제징용도 마찬가지다. 저자가 주목하는 새로운 문제는 가미카제특공대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미카제특공대는 패색이 짙어가던 태평양정쟁에서 일본이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특공대를 말한다. 천황의 방패로 제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이 특공대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들이 특공대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서부터 일본이 자살특공대를 창설하게 되는 배경과 진행과정 그리고 조선인의 활동상황에 대해 밝혀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왜 이런 자살특공대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삶의 상당부분이 지배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를 개선하려는 점 그리고 비행기에 대한 개인적 열망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강제적인 방법에 의해 동원된 경우가 주를 이루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한 경우도 있다. 이 모두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결국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한 결과를 낳았다. 마지못해 선택했던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입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이해요구보다 민족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돌파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과는 달리 암울하기만 한 상황을 벗어날 기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보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거리가 많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제한된 상황에서 교육을 받고 일보 전투기를 몰아 연합군 배를 침몰시키기 위해 요격에 나섰다. 이 점에선 누가 뭐라고 해도 친일부역자나 친일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갈등하고 그 길에서 뛰쳐나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넘겨야 옳은 일일까? 이 점이 딜레마다. 이것은 가미카제 특공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일제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에게 피할 수없는 일로 다가왔을 것이며 그렇다고 모두가 같은 선책을 한 것이 아니기에 판단의 기준은 이미 마련되었다고도 보인다. 해방 후 한국의 사회 곳곳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한 것처럼 비행기술을 익힌 특공대원들에 의해 대한민국 공군과 민간항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의미 있는 것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친일의 최전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살특공대에 지원하고 죽음을 맞이했거나 살아남아 한국 사회에 일조한 사람 모두 선의의 피해자일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저자 역시 이점에서는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도 판단을 미뤄두고 있다. 이처럼 판단을 미뤄두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근본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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