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나리
남덕유산(1507m)을 오르게 했던 꽃을 매년 가야산(1430m)에서 보다가 이번에는 기회를 얻어 멀리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 어디쯤에 가서 만났다.

크지 않은 키에 솔잎을 닮은 잎을 달고 연분홍으로 핀 꽃이 화사하다. 다소곳히 고개숙이고 방긋 웃는 모습이 막 피어나는 아씨를 닮았다지만 내게는 삶의 속내를 다 알면서도 여전히 여인이고 싶은 중년의 수줍음으로 보인다.

꽃은 밑을 향해 달리고 꽃잎은 분홍색이지만 자주색 반점이 있어 돋보이며 뒤로 말린다. 길게 삐져나온 꽃술이 꽃색과 어우러져 화사함을 더해준다. 강원도 북부지역과 남쪽에선 덕유산과 가야산 등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다.

살며시 전해주는 꽃의 말이 깊고 따스하다. 아름다움을 한껏 뽑내면서도 과하지 않음이 좋다. 그 이미지 그대로 가져와 '새아씨'라는 꽃말을 붙였나 보다.

마음이 일어나고 기회가 되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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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
여름 강한 햇볕을 의지하지만 스스로는 해를 닮은 강렬한 모습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해바라기나 나팔꽃의 도발적인 색보다는 깊은 속내를 감출줄 아는 순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여름을 상징하는 꽃으로 나팔꽃이 인도가 원산인 외래종이라면 메꽃은 토종이다. 햇빛이 나면 꽃잎을 펴고, 해가 지면 오므리는 모습으로 해 바라기를 한다. 여름 내내 꽃을 볼 수 있어 아주 친근하다.

메꽃은 특이하게 같은 그루의 꽃끼리는 수정하지 않고 다른 그루의 꽃과 수정해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메꽃, 좁은잎메꽃, 가는잎메꽃, 가는메꽃이라고도 한다.

순박한 누이의 모습은 닮은 메꽃은 '충성', '속박', '수줍음'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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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계절 변함없이 푸른 치자梔子

梔子非名品 치자비명품
猶能傲嚴寒 유능오엄한
枝枝森宿翠 지지삼숙취
顆顆粲神丹 과과찬신단

치자는 명품은 아니지만은
엄동설한 오히려 견딜 수 있네.
가지마다 푸른 빛 가득하더니
주렁주렁 신단(神丹)이 찬연하여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다. 치자가 꽃도 꽃이지만 겨울까지 잎 지지 않고 늘 푸른 것을 찬미하였다.

“치자는 꽃으로는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향기는 아주 강열하여 여러 꽃 가운데 특별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꽃은 인도나 중국과 일본에는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꽃 기르는 사람이 재배하여 관상용으로 내놓을 뿐이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치자에게는 네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다. 꽃 빛이 흰 것이 그 한가지이고, 향기가 맑은 것이 한가지이며, 겨울철에 잎이 지지 않는 것이 한가지이고, 또 열매를 노란색 물감으로 쓰는 것이 그 한가지이니, 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했다.”

어딘가에서 좋은 향기가 달려든다. 주변을 살펴 하얀색의 꽃이 제법 크게 피어있는 것을 찾았다. 하얀색의 꽃 색도 좋고 주황색의 열매 색깔도 좋다지만 무엇보다 그 은근한 향기가 매혹적이다. 열매를 통한 치자 물을 식용 물감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열매를 이용해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내 뜰에도 들였다. 언제쯤이면 꽃을 볼 수 있을까?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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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희풀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안다. 대상이 무엇이든 마음에 깃든 믿음이 전해주는 그 무엇.

산에 오르기 전 가야할 길의 꽃지도가 머리속에 펼쳐진다. 구석구석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늘 새로운 모습을 찾는 것도 멈출 수 없다.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보았을 때 반갑고 다음에 다시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걷는 길에서 만나는 꽃 중에 하나가 이 병조희풀이다. 닫힌듯 열린 짙은 하늘색 꽃이 피었다. 깊은 속내를 다 보여줄 수 없다는 다짐을 하듯 단호함 마져 보인다.

나무지만 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게 부른 이유를 아직 알 수 없다. 가까운 식물로는 자주조희풀이 있지만 실물을 보지는 못했다. 언젠가 불쑥 볼 날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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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섰다.

나란히 가는 길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지도 않으니

그저 제 속도로 가면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었으니

더하고 덜할 일도 없다.

잠시 쉬어도 하고

등지거나 마주봐도 좋고

은근히 지켜봐주면 되며

때론 한눈 팔기도 한다.

지나온 흔적이

앞길을 방해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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