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고운 사랑노래
사람의 삶에서 사랑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사랑하는 일과는 무심한 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시린 사랑에 지쳐 이제는 잊었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문득문득 가슴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그리움이 눈시울 젖기도 한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지금 사랑 한가운데서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랑에 대해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잊고 약자로 산다. 그런 약자의 마음이 오랫동안 시나 소설 등 문학이라는 틀에 담겨 사랑앓이를 하는 서로를 다독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유의 ‘가시리’는 그런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를 고려시대 불리어졌던 고려가요의 중심 내용을 빌어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서경별곡, 가시리, 정석가, 청산별곡, 한림별곡, 만전춘별사’등 고려가요高麗歌謠가 담고 있는 가슴 절절한 마음을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마음에 빗대어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몽골의 고려에 대한 압박과 그 압박을 이겨내지 못한 고려 정부의 압력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삼별초의 항쟁과정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축으로 삼고 여기에 고려가요가 가지는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실어 ‘높고 고운 사랑의 노래’를 전하고 있다. 목숨을 담보로 겪어내야 하는 전쟁에 자유분방한 내용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남녀 사이의 사랑을 읊어 내는 고려가요가 배경으로 흐른다. “사랑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는 모두 사랑노래다”라며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가는 탄탄한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흥미롭게 전개된다. 당대 최고 거문고 연주자이자 별곡 작곡자인 아버지 고음(考音의 유품을 이어 받고자 하는 팔방상의 으뜸 가인(歌人) 아청과 삼별초에 속한 무인이자 아청의 오랜 벗인 좌(左)와 우(右)가 주인공이다. 셋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하나가 되고자 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의 표현이 각기 달리 전개된다. 이 과정에 아청이 부르는 별곡이 함께 한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나무처럼 싱싱한 꿈을 지녔으되 사랑을 잃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웠던 청춘들. 엇갈리고 부딪히고 피 흘리면서도 정직하게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낸 그들의 이야기”가 들고나는 호흡으로 적절하게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사랑 앞에서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이 겪는 마음의 갈등은 시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고려가요에 담긴 애절함이 사랑하는 청춘들의 가슴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랑을 앓고, 사랑을 읽고, 사랑을 쓴다’는 작가 선유를 통해 오랜만에 썩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