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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깊은 슬픔이 말을 걸때
한순 지음 / 나무생각 / 2015년 11월
평점 :
시어에 녹아 담긴 삶
한국 문단에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주요한 통로가 신춘문예를 통한 진출이라고 보인다. 중앙 지방지를 포함한 각 언론사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시인으로써 활동하게 되는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모아 시집을 발간하는 것이 그리 용이한 경우가 아닌 듯하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집을 내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그 짐작조차도 못하지만 그만큼 큰 사건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등단 이후 오랫동안 숨고르기를 한 시인들의 시집이 조금은 큰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슬픈 음악과 한 방울의 눈물이
용서와 화해로 가는 다리라는 것을
꽤 자라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일들은 용서와 화해의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또 어떤 일들을 그 다리를 건너 하얀 연기처럼
공중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사랑하려 애쓰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애쓴 흔적, 풍경 속에 하나의 점처럼 앉아 있던 순간,
먼 시간 연기처럼 공중을 돌다
다시 내려와 앉은 풍경이 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도 규정하지 않는다.
푸른 바닷가 사방이 열린 누각에
얇은 옷을 입고 앉아 있다."
한순 시인의 첫 시집 서문이다. 오십대 중반에 이른 여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삶의 굵은 굴곡을 건넌 시인의 마음이 담겼으리라 여긴다. 등단 후 첫 시집을 엮은 마음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출판인의 섬세한 시각과 여성의 따스한 마음이 담겼을 시 한편 한편에 신경림 시인의 표현대로 "저렇게 농익을 때까지 한자리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에 주목한다. 서툰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긴다.
“편집자로, 아내로, 엄마로 그간 ‘마음이 흐르고 번지고 스며들어간 시간의 흔적’들을 오랜 시간 묵혔다가 시집으로 엮었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한순 시인의 시에 대한 기대감의 반영이라고 보인다.
장석주 시인은 ‘여자 사람’으로 주목하고 있다. ‘평화주의적 공존에 가 닿는’것으로 한순의 시에서 발견되는‘식물성 시학’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최윤 소설가의 눈에는 “여성성이 사그라들면서 삶 자체의 공허와 맞서는 여자! 그 여자의 무기는 물기이다.”라며 한 순 시인에 대한 시를 이해하는 시각을 제시한다.
여자, 편집자, 아내 엄마로의 일상을 살아오는 동안 삶의 굵직한 선을 넘을 때마다 시인의 시어는 담금질되어왔을 것이다. 시집의 제목처럼 제 안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슬픔을 이제는 드러내도 될 만큼 성숙했다는 의지로 읽힌다. 제 빛을 더 강하게 내려는 것보다 오히려 녹아들고 섞이어서 조화를 이뤄야 각기 삶은 더 빛난다는 것을 알만한 시간을 쌓아왔을 것이란 기대감이 시인의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된다. 가까이 두고 자주 볼 시집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