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음양오행,

지극히 굳세며

지극히 부드러운

 

 

정선(鄭敾) 금강전도(金剛全圖)

조선 1734, 종이에 수묵 담채, 국보 제217

 

정선은 민족의 염원이 깃든 금강산을 새해를 앞두고 그렸다.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염원을 담았다. 단지, 금강산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민족의 정신을 담은 것이다.

 

우선 제시를 보자

 

"만 이천 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난 뼈를

뉘라서 뜻을 써서 그 참 모습 그려내리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솟는 나무까지 떠 날리고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 양 흰빛을 드날리고

반쪽 숲엔 소나무 잣나무가 현묘(玄妙)한 도()의 문()을 가렸어라

설령 내 발로 밟아 보자 한들 이제 다시 두루 걸어야 할 터

그 어찌 베갯맡에 기대어 실컷 봄만 같으리요!"

 

묘한 배치다. 사이 간()자를 중심에 두고 좌우 글자 배열이 심상치 않다. 일부러 뜻을 담아 썼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제시를 쓴 이유를 비롯하여 금강산 모습 또한 예사 그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조 왕 치세의 새로운 기움을 담아내고 겨레의 정신이 담긴 금강산을 어떻게 표현할까 심사숙고한 모양세가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오주석은 그의 다른 저서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2’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주역의 뜻을 담아 금강산을 그렸다는 것이다. 일만 이천 봉우리로 묘사되는 금강산의 이모저모를 주역의 원리로 풀이한 정선의 주역 공부가 얼마나 심오한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금강산 뭇 봉우리를 원으로 묶었다. 그리고 반씩 쪼개어 태극을 빚어냈다는 것이다. 맨 아래 장경봉에서 중앙 만폭동를 지나 소향로봉, 대향로봉을 거쳐 비로봉까지 이르는 S자 곡선, 이것은 바로 태극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주역에 익숙치 않은 사람으로 주역으로 해설하는 금강전도가 쉽게 다가오지 않음도 사실이다.

 

그림으로도 모자라 제시까지 주역의 원리를 이용해 금강산 그림을 그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모름지기 영조대를 살았던 정선의 마음자리가 조선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 그림을 해설하는 대다수 학자들의 설명이다.

 

정선은 그의 벗 이병연과의 사귐도 주목할 만하다. 이 둘의 사귐은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마음으로 서로 그리는 정을 시와 그림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경교명승첩이 그것이다. 이병연의 덕에 금강산을 두 차례나 방문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신묘년풍악도첩해악전신첩으로 남았다.

 

진경산수화의 시대를 열었던 겸재 정선의 그림을 단순히 대상을 묘사한 그림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정선이 그 속에 담긴 뜻이 너무 커서일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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