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 손에 쥐고

솔솔 부치면

 

 

겸재(謙齋) 정선(鄭敾), 금강내산도, 조선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부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겸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바위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이 부채에 담겨 더운 여름을 나기에 안성맞춤이 아닐까 싶다. 금강산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위를 이겨낼 부채와의 정묘한 결합으로 선조들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부채는 피서의 도구뿐 아니라 선비들의 소지품으로도 애용하였기에 그 속에 금강산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 돋보인다.

 

오주석의 눈에 든 이 그림은맨 처음 눈에 띄는 산 둘은 유난히 먹빛이 짙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하늘 반 땅 반이다가 점차 올라가면서 산은 가파르고 하늘은 가까워져 급기야 최정상 비로봉에 이르자 하늘이 머리에 닿겠다. 메다꽂듯 내리찍은 암봉의 필획들은 빠르고 예리하고 각지고 중첩되니, 봉우리마다 변화무쌍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다. 또 어떤 곳은 붓 두 자루를 한꺼번에 쥐고 그었는데 짙고 옅은 농담의 변주가 절묘하다. 골짝 사이로 아스라이 먼 곳에 절집이 어른거린다. 이렇게 절경을 빚어내는 솜씨는 조물주에게나 비길 수 있으리라.”

 

금강산에 우리민족에게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선비들이 직접 금강산을 다녀와서 유산기를 남겼고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유산기를 읽으며 금강산을 그리워했다. 특히, 화가들이 남긴 금강산 그림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금강산을 향한 열망을 담아내 주는 역할을 톡톡해 했다. 정조 임금도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김홍도를 시켜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며 금강산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수려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한민족의 자랑이요 국토애의 원천이다. 온 겨레가 이 산을 너무나 사랑하고 외경했기로 산 이름도 철따라 달라진다.”금강산(金剛山), 봉래산(蓬萊山), 풍악산(楓岳山), 개골산(皆骨山)이 그것이다.

 

금강산을 그린 그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정선은 이 금강전도 외에도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에 들어있는 금강산내총도, 단발령망금강, 장안사, 불정대, 벽하담, 백천동장, 옹천, 고성문암관일출, 해산정, 총석정, 삼일포, 시중대를 비롯하여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는 피금정, 단발령망금강, 정양사, 불정대 망십이폭, 백천교 출산도, 삼일포도, 옹천도, 총석정도 등이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연꽃 한 송이가 탐스럽게 피었다.”정선의 금강내산도를 해설하는 오주석의 눈에 이 그림은 연꽃으로 보였다. 그린이 정선의 마음과 보는 이 오주석의 마음이 만나 한 송이 연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순간이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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