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풍죽도'(風竹圖)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
거친 바람 속
끝까지
남는 것은
대나무의
정신이어라
점차 기온이 내려가는 가을 한복판이다. 심란한 바람이 불어 간신히 견디고 있는 마음에 찬 기온을 더한다. 바람 앞에 의연하면서도 제 빛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푸름이 빛을 발하는 시기가 오고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옛사람들의 기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으뜸이었다. 이정의 풍죽도를 보며 옛사람들이 왜 대나무에 기대어 선비의 기상을 표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모진 바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모습으로 의연한 자태가 멋과 함께 기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정의 풍죽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그림 속에는 4그루의 대나무가 있다. 먹의 진함과 연함에 구분을 두어 앞의 대나무와 뒤쪽 대나무 간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 간격에는 또 바람이 들어있는 것 같다. 대나무의 상태에 따라 바람을 맞는 모양이 제각각이다. 각기 대나무들이 모여 모진 바람 앞에 서 있는 불안함 말고도 안정감이 담겨 있어 묘한 느낌이다.
이정의 풍죽도를 언급한 글에서 오주석은 대나무를 사람이라고 한다. 대나무는 다섯 가지 훌륭한 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대나무는 뿌리가 굳건하다. 둘째, 줄기가 곧다. 셋째, 속이 비었다. 넷째, 마디가 반듯하고 절도가 있다. 다섯째, 사계절 푸르러 시들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대나무는 대단히 어진 사람이며, 대나무는 군자라 칭한다. 모두 대나무의 생김새와 그로부터 기인한 이미지에 의한 이야기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나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아닌가 한다. 밤사이 눈이 대나무 잎에 내려앉은 모습은 대나무의 초록과 눈의 하얀색의 조화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 풍경에서 다나무의 기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가오는 겨울, 눈 내린 아침 대나무를 보러갈 생각에 겨울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은 세종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시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묵죽墨竹 화가로 꼽힌다. 그는 풍죽(風竹), 설죽(雪竹), 우죽(雨竹) 등 다양한 대나무를 화폭에 옮겼다. 그의 묵죽화는 절제 속에서 긴장과 생동감이 조화를 이루고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지며 마치 서예의 획을 보여 주는 듯 힘이 넘치고 아름답다. 탄은 이정의 <풍죽도>는 어몽룡의 월매도와 함께 오만원권 지폐의 뒷면 배경그림으로 채택되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