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백자 - 다산의 아들 유산의 개혁과 분노, 그리고 좌절
차벽 지음 / 희고희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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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이어지는 다산의 정신

조선을 빛낸 많은 사람들 중 단연 선두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다산 정약용(1762년 ~ 1836년)이 아닐까? 팔대 옥당가문에서 태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정약용은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숨죽이며 학문에 정진한 결과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등 500여권의 저술을 남기는 학문의 업적을 이뤘다. 하지만 그의 삶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이 먼저 일어나는 것은 그의 당호 여유당(與猶堂)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말로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 하고 '유'는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처럼 그가 세상을 살았던 마음가짐이 여기에 있었다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가족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시대를 개혁하려던 정치인이자 학자로의 삶이 너무 큰 산이었기에 가족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도 그 큰 산만큼 크고 깊었으리라 여겨진다. 하여 훌륭한 시인이자 의사이며, 아버지의 개혁사상을 물려받은 학자였던 그의 아들 유산(酉山) 정학연(1783~1859)에 대해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소설 ‘슬픈 백자’는 정약용의 큰 아들 유산 정학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살아있는 다산을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 줄곧 걸었다는 저자 차벽은 이미 ‘다산의 후반생’(2010, 돌베개)과 ‘다산의 연인, 호수야! 호수야!’(2012, 희고희고)를 통해 다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산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산을 만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세도정치의 그늘에 가려 아버지가 죽은 후 20년 만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그의 아버지가 못 다한 개혁을 시행하고자 한다. 70이 넘은 자신에게 벼슬이 내려진다는 것이 죽은 아버지의 삶이 결국 헛되지 않았음으로 받아들이며 기뻐하지만 막상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조선 말 안동김씨의 극단적인 세도정치로 허물어지던 때였기에 사회 곳곳 정상적인 곳이 없을 지경에 이른 시점이었다. 그가 부임한 사옹원 분원(현 광주시 분원리)은 백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자기를 만들어 조정에 납품하던 곳이다. 자기를 둘러싼 각종 이해관계를 비롯하여 허물어져가는 조선 백자의 품질을 높이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를 위해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피로사기장의 후손들과 접촉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던 정학연에게 사옹원과 종친들의 이권개입의 요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개혁의지가 벽에 부딪칠 때마다 떠 올리는 아버지는 유산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다. 유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최초로 유산 정학연에 주목하여 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의 지향점이 어떻게 아들로 이어지고 있으며 다산과 유산이 살던 조선말의 정치정세와 사회풍조를 알 수 있다. 더욱 유산 정학연의 조선백자를 살리기 위한 열정은 유산의 삶의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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