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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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되었구나
풍경을 담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에는 사람의 한정된 가시영역을 확장하여 시야에서 벗어난 측면까지를 보여준다.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부분까지를 보여주는 파노라마 사진이 그것이다. 이런 사진이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은 여러 번 고개를 돌려야 보이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파노라마 사진뿐 아니라 시야를 벗어난 넓은 영역을 하나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선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이 말은 자신의 경험이나 환경에 의거해 세상을 본다는 말일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을 벗어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 좌와 우를 통합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볼 때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한 시대를 볼 때도 역시 그 중요성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권력을 잡은 지배계급의 시각으로만 보거나 그 권력에서 비켜난 백성의 눈으로만 볼 때도 한 측면만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 시대를 올바로 바라보고 통합적 시각을 갖기란 대단히 어려움이 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호흡하는, 독자들에게 주목받는 작가 김훈의 말이다.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대중과 공유하는 글쟁이의 말이기에 방점이 찍힌다.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일까? 매번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전작 ‘남한산성’이나 이번에 발표한 ‘흑산’에서 보이는 작가의 글쓰기에서 작가의 이 말을 비슷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흑산’의 주 무대가 되는 조선후기는 개혁정치의 수장이었던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 원상복귀 되며 보수와 개혁의 세력이 갈등하며 혼란을 거듭하던 시대였다. 여기에 제국주의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고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에 새로운 사상 천주학이 등장하여 그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다. 위로는 대왕대비의 대리청정과 김씨가의 세도정치와 사대부들의 보수적 성향과 피폐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백성들 사이의 간격은 이미 멀찌감치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 사이 간극을 매우는 세력으로 기존의 학문과 사상적 경향성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실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각기 자신의 길을 걸었던 시대다. 

‘흑산’에서 작가는 ‘그리 되었구나’라는 말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표현으로 다가오게끔 시대의 흐름은 담담하게 절제된 언어를 통해 서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해박해’로 수많은 백성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유배를 가야했던 당시 상황을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자산어보’와 ‘황사영 백서’의 두 주인공 정약전과 황사영이 있다. 조선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천주학은 당시 지식인들과 백성들이 갈망하던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 사회질서를 지키려는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흑산’에서 정약전과 황사영은 다른 길을 걷는다. 같은 천주교를 접했던 사람으로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은 배교하여 목숨을 얻었고 다른 한 사람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밑거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또한 작가는 당시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시키고 있다. 조정의 관료들과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이 그들이다. 

작가는 이 주인공들을 통해 조선후기의 시대를 펼쳐놓고 있다. 위로는 왕에서 아래로는 노비, 좌우로 다양한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 ‘흑산’ 속에 다 담겨있다. 작가의 후기에 담긴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글을 읽어가는 동안 내내 가져야 했던 슬픔과 답답함이 그것의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와 소망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강한 대안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정약전에 ‘흑산’을 굳이 ‘자산’으로 바꾸고자 했던 이유나 천주교의 교리를 육손이나 마노리가 이미 자신의 몸에 있던 자연스럽고 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을 통해 보면 작가가 정의나 소망을 벗어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파노라마식으로만 당시 상황을 펼쳐놓은 것에서 정의를 다투려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에 수궁을 한다. 그렇더라도 어떤 글이든 작가 자신의 가치관은 담길 수밖에 없기에 작가가 의미하는 말이나 글로써 다투려 하지 않은 정의나 소망이 무엇일까에 관심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이 의문에 답을 찾으려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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