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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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대한 직시는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잊혀 졌다고 믿고 싶은 것들이 있다. 애써 외면하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기도 하며 그렇게 묻어둔 이야기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 지난 세월을 송두리째 부정할 때 그것은 잊혀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지만 한 민족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는 존재한다. 특히, 아직 해결되지 못한 민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비온 뒤 싹을 틔우는 잡풀처럼 언제 어느 때 표면화되어 현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  

 

 반세기 동안 발표하는 작품마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승부를 통해 공감과 소통을 이끌어 내고 있는 작가 조정래의 ‘마음의 짐’ 같은 소설 하나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황토’가 그것이다. 이미 발표된 작품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난 작품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작가의 속내가 무엇이든 그가 그동안 발표한 작품 속에 이미 그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조정래의  ‘황토’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은 보여주고 있다. 역사의 전환기마다 몸살을 온몸으로 받아 안을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삶을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일본인 조선인 그리고 미국인으로 각기 다른 아버지를 둔 두 아들과 딸 사이에 어머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부모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일본인과 사이에서 큰 아들을 낳았고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의 대립으로 딸아이의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국군을 앞세운 미군의 호의를 가장한 겁탈로 막내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신세가 된다.  

 

 세 자식은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제 침략기 이후 미군정까지의 우리 민족이 겪은 혼란스러움은 시간이 흘러가며 잊혀 져 간 듯 보이지만 막내아들이 겪어왔던 사회적 편견과 심리적 부담으로 남아 어머니의 가슴 깊숙이 묻혔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가슴에 묻었다고 해결된 것이 아니듯 어머니의 삶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질곡의 시간은 자식들 사이에 좁히지 못하는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다시 어머니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더해진 것이다.  

 “프랜더스는 또 하나의 야마다였던 것이다”라고 고백을 통해 일본인 야마다 주임과 미국인 프랜더스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놓고 일본과 미국은 같은 속셈이었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작가는 자식들 사이 화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역사의 질곡을 보여준다. 

 빼앗긴 나라를 찾았지만 온전히 찾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나라를 빼앗기게 했는지 그로인해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지 채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맞이한 해방이 또 다른 민족의 아픔을 낳았다. 그 아픔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도 묻히고 외면하며 시간의 흐름에 해결책을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것과 민족이 해결하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어쩔 수없이 얽힌 매듭이 존재한다. 속이 곪아 있는데 겉만 치료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은 것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굴곡진 역사의 매듭을 풀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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