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비얀 빌딩 을유세계문학전집 43
알라 알아스와니 지음, 김능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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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은?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 수밖에 없다. 문학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작가의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라도 본다면 굳이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를 따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한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면 분명 참여문학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작가가 가지는 소명의식일 것이다. 더불어 문학 작품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의 역사나 한 사회의 문화와 문화권의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 역시 문학이 가지는 소중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야쿠비얀 빌딩’의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작품으로 다가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슬람문화권의 작품이기에 다소 생경함도 있지만 다분히 흥미로운 점이 많아 기대감이 앞서는 작품이다. 특히, 2011년 초 이 작품의 무대가 된 나라 이집트에서 사회적 변혁이 있었기에 더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야쿠비얀 빌딩은 실재하는 빌딩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빌딩은 이집트라는 나라의 한 시대를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표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테러 공격의 목표가 되었던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처럼 1950대 이집트의 사회상을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기능을 한 빌딩이 바로 야쿠비얀 빌딩이다. 부와 권력을 향해 질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지만 사회가 변화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빈부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이 한 건물에 모여 살면서 만들어진 이미지가 바로 그 빌딩에 담겨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빌딩이 상징하는 이집트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작품이다. 빈부의 차, 권력, 정경유착 등의 사회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 이야기를 모함하여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가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색을 탐닉하는 늙은이, 어린 시절 부모의 부재 속에서 경험한 동성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권력과 사회적 편견에 의해 꿈이 좌절된 젊은이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미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 때문에 몸을 팔게 되는 여자와 이를 부추기는 부모 등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아직은 낯선 이슬람 문화권의 이야기지만 책을 읽어가는 동안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단지, 무대만 옮겨놓은 것처럼 우리도 익히 가슴 아프게 경험했고 또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너무도 많은 제약을 동반하게 된다. 그 많은 제약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사람마다 제 각각이기 마련일 것이다.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기에 오히려 낯선 풍경처럼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작가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강요하지는 않고 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작가 자신이 경험한 현실이 반영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과 2011년 1월 카이로의 중심지 ‘마이단 알타흐리르’(자유광장)에서 이집트 시민들과 함께 민주혁명에 참여했고, 지금도 문필 작업과 언론 활동을 통해 혁명의 지속과 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유추해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야쿠비얀 빌딩’은 우리에게 문학작품이 가지는 힘과 작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문득,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인 조정래 작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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