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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 동방의 성자, 이야기를 품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8
강판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슴에 나무 한그루 심을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대표적인 나무가 있다. 삭막한 도심에 계절이 변화는 것을 때마침 알려주는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지금 그 은행나무들은 새싹을 내 놓고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그 잎을 키워가며 회색 도시를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 잎이 더 크고 짙은 녹색으로 변하면 여름일 테고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이제 사람들은 본격적인 가을을 누릴 준비를 할 것이며 독특한 냄새를 풍기며 하나 둘 은행이 떨어지면 겨울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처럼 이 도시의 사계절은 은행나무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은행나무 뿐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나무 한그루쯤은 자신의 마음에 심어두고서 그 나무가 전하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살아갈 것이다. 그 나무는 곁에 있어 자주 보거니 멀리 있어 가끔 보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문득 생각나 떠올리는 순간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기에 나무와 얽힌 추억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리라. 그런 나무들 중에 우리민족과 특별히 친숙한 나무로는 단연 소나무가 꼽힐 것이며 그 다음으로 은행나무나 느티나무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 강판권은 직업으로 봐서는 나무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나무에 관한한 전공자 못지않은 사랑과 지식으로 무장하고 나무 사랑의 길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책 ‘나무열전’, ‘나무사전’, ‘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 등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나무들과 생활하며 ‘은행나무’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담아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들을 찾아 은행나무와 우리민족의 얽힌 이야기를 ‘은행나무 : 동방의 성자, 이야기를 품다.’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저자는 우선 은행나무의 생물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은행나무’는 ‘낙우송’, ‘메타세콰이어’와 더불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중생대인 지금으로부터 2억 2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사이에 번성하며 오랜 시간동안 인류와 함께 해온 나무로 오직 1속 1종으로 인척이 없는 외로운 존재라고 보고 있다.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경로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으며 수나무와 암나무로 구분되지만 일반인이 구분하기에는 어려운 점 등 은행나무의 생물학적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책에서 은행나무를 주인공으로 삼는 이유는 생물학적 특성보다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살아온 문화사적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이는 ‘본초강목’이나 ‘동의보감’ 등에서 식물을 다루는 식물의 약효가 아닌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생명체로 바라본 것에 의의를 둔다는 것이다. 하여, 마을 입구를 지키며 사람들과 동거 동락해온 이야기가 중심이며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가 관심 갖는 은행나무는 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로 천 년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나무들이 대부분이며 그 나무들이 뿌리 내리고 있는 용문사, 영국사, 적천사, 소수서원, 도동서원, 성균관, 공자묘 등 사찰, 서원, 향교 등지를 발품 팔아 찾고 있다. 마의태자와 의상대사의 전설이 얽혀 있는 용문사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보조국사 지눌의 지팡이에서 자라났다는 청도 적천사의 은행나무, 홍수가 났을 때 이색을 구해주고 그의 무죄를 밝혀준 청주 중앙공원의 은행나무 등 우리 역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과의 사연이 얽힌 은행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이런 은행나무를 찾아 부모가 자식을 품에 안 듯 사랑하는 사람을 반기듯 마음으로 가슴으로 안고 만지고 바라본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은행나무와 우리민족의 정신 사상사적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교와의 만남이다. 유독 서원, 고택, 정자, 성균관, 향교 같은 유교 관련 유적지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이 남아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그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행단’(杏壇)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은행나무가 가지는 생물학적 속성과 유교의 정신이 이어지는 코드가 어울렸다는 것이다. 즉, 은행나무의 긴 수명과 친인척 하나 없다는 특징이 유교의 유구한 정신과 독자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의 극단적인 모습은 소수서원에서 보이는 경(敬)이라는 한자에 주목한다. 경은 성리학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다스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삶 자체가 공부이고 삼라만상이 스승이라는 성리학의 요체는 은행나무로 집결된다는 것이다.
시간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 흔적은 나무의 몸통에서도 주변 어린 자식나무에서도 찾을 수 있고 그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에도 있다. 이렇게 시간을 담아낸 나무를 세고 안으면서 자신을 돌아본 저자 강판권의 나무사랑은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삶의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저자처럼 가슴에 나무 한 그루 심어 그 나무처럼 곧고 바르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