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개성상인 1 - 물의 도시로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400년,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개성상인의 정신
특별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어떤 특정한 사물에 집중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그것일 것이지만 그 이유라는 것이 설명 불가능할 때면 그냥 마음 가는대로 따라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 왠지 모를 이유로 눈길을 끌고 기대하게 만드는 책을 만나곤 하는 경험을 하는데 이것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잃어버렸던 시간을 현실로 되돌리는 것, 이것에 가장 앞장서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팩션이라는 장르의 문학은 지난 시간을 되돌려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며 역사의 순간을 기억하고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일상을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팩션의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 어쩜 역사는 현실로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베니스의 개성상인’,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한국인(Korean Man)’이라는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그림을 남긴 루벤스는 400여 년 전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바로크양식을 정립시킨 장본인이다. 궁정화가뿐 아니라 외교관으로도 활동 했다. 역사화, 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대 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가 기념비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같은 시대 활동한 화가로는 티티안, 라파엘, 카라바치오, 아니발레 카라치 등이 있다. 

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두 시대를 한 이야기 속에서 풀어가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진 유승업과 한국전쟁 때 남하한 유명훈이라는 사람이 각기 그 시대를 살아가며 ‘개성상인’이라는 정신을 이어가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유승업의 다른 이름이다. 유승업은 일본에서 중국, 인도를 거쳐 베니스로 간 사람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베니스까지 가게 된 그는 개성상인의 후예답게 유럽 상권의 중심이었던 베니스에서 상업인으로 성공하게 된다.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 신분으로 낯선 문화와 생활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종교전쟁, 제국주의가 태동하는 시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멋진 개성상인의 정신으로 헤쳐 나갔던 그의 활약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의 다른 구성인 유명훈은 88올림픽 이후 종합상사의 상사원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수출한국의 입지를 굳혀가던 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쟁 후 월남한 아버지를 따라 남한에 정착하고 개성상인의 후예인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활발하게 무역전선을 누비는 모습을 담아낸다.

두 사람의 활동상은 언 듯 보기에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1600년대 중반과 1900년대 중반이라는 시간상의 차이뿐 아니라 물질문명의 발달, 국제정세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환경이지만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켜가는 불굴의 의지와 무한경쟁의 구도 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두 시대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400년이라는 시간차는 시대와 국제환경 등에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소설은 그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을 찾아낸다. 바로 경제적 이익에 우선하여 의리를 생각하는 ‘개성상인’이라는 조선 상인들의 정신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외형이라 분명 400년의 시간 차이 만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변함이 없다. 

마치 두 편의 소설을 하나로 묶어 놓은 듯 한 구성이지만 행간을 흐르는 하나의 정신이 늘 동시성을 공유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곳곳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다 개성상인의 후예라는 암시는 별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출발은 그림 한 점이지만 이야기에는 조선시대와 한국이 있으며 그 속에는 시대와 환경을 뛰어 넘는 한국 사람의 위대한 정신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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