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개의 봄 -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일기
김기협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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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서 아들로 이어질 봄을 기다리다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이 사람들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둘 사이 떨어진 거리는 그 사람과의 친밀도를 나타내며 일정한 시간동안 유지되거나 가깝게 또는 멀어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거리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정도가 물리적인 거리보다는 심리적 거리가 더 크게 작용된다. 또한 이 거리는 자신이 설정해 둔 거리 이상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때 부담이나 불편 때론 이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거리를 인정하지 않은 관계가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 모든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이 일정한 거리가 무시되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가 부부사이, 가족이다. 사람들이 현성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는 자의적일지도 모르지만 가족 그것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맺어지는 관계다. 이 일정한 거리가 무시되거나 인정되지 않아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 그렇기에 평생을 안고 가야하는 마음이 짐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언제나 어느 때고 아주 간단한 이유로 멀어졌던 거리가 무너지며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아 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흔 개의 봄’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바로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흔 나이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에는 그 가족사의 모든 것이 담긴 듯하다. 굴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안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중혼, 먼저 떠나 지아비를 가슴에 묻고 아들 삼형제를 키워온 어머니, 삼형제 사이 막내로 자라면서 어머니와 너무 먼 거리를 유지했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어머니는 파주, 일산 등 병원과 요양원을 옮겨 다니게 된다. 물론 이는 자식들과 가족들의 편의에 의해서기도 하지만 결국 그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더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흔 개의 봄’은 너무 먼 거리를 유지했던 아들이 어머니의 병원 간호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병 중 모습을 알려주기 위해 시작된 글쓰기였다. 하루 이틀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된 이 글쓰기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벽과 먼 거리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둘 사이 마음에 쌓인 앙금이 여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담겨 있다. 어머니에 대한 불편했던 심사, 형들 사이 무엇인지 모를 이상기류, 너는 너무 멀리 있었다고 고백하는 어머니, 간병인과 어머니 사이의 일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며느리, 그리고 마음 따스한 어머니의 벗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담겨있다. 무엇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그 너무 멀리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그저 아들의 도리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작된 병간호가 자신이 어머니를 생각했던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그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삶은 그 말대로 굵은 획을 그으며 살아온 것일지 모른다. 그 삶에서 아들과의 거리는 아들이 어머니가 스스로 만들었거나 둘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져 온 것이리라. 이렇게 형성된 벽과 거리는 이제 서로가 인정하며 지나온 시간을 회고하며 새롭게 정립한다. 그것이 간병하던 3년이 이 두 사람과 가족에게 어쩜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는 거리가 무시되기 일쑤인 가족관계도 일정한 거리를 필요하다. 그 거리를 인정할 때 보다 넓고 깊은 정이 쌓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아흔 개의 봄은 아들의 봄으로 이어져 또 다른 봄을 맞이할 것이다. 두 사람이 그렇듯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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