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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모살 - 을미사변 연구
강범석 지음 / 솔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오늘도 끝내지 못한 과거
역사의 기록을 읽다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있다.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봐도 그렇고 현 시대의 시각으로 살펴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당시 평가뿐 아니라 후대 사람들의 역사해석에서도 이런 이해하지 못할 일은 빈번하게 일어나곤 한다. 그중 하나가 1895년(고종 32)에 일어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되어 우리나라 궁궐에서 명성왕후를 무참하게 시해하고 일본의 세력 강화를 꾀한 일을 말한다.
우선 명성왕후인지 황후인지 명칭정리부터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황후라고 한다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이후부터 부를 수 있는 호칭일 것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명이고 을미사변이 일어난 때가 1895년이기에 시해당시 왕후이기에 명성왕후가 맞는 것으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여러 문헌에서 왕후와 황후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후 왕후로 통일한다.
을미사변 연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왕후모살’은 바로 이 을미사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담았다. 총 4부 10장에 걸쳐 구성된 이 책은 당시 조선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국의 군사력을 비교하는 등을 통해 힘의 역학관계를 살핀다. 러시아, 청나라, 일본은 조선을 놓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상황이었다. 조선내부 역시 외세의 강압적인 문호개방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쳐나갈지 정확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권력 장악에 외세를 적절하게 이용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 시기다. 친 러시아 성향의 명성왕후와 일본 간의 치열한 싸움의 결과가 시해사건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힘의 우위에 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압적인 탄압을 실시한다. 궁궐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일련의 과정으로 본다면 명성왕후 시해사건은 그 출발의 단초로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직후 일본 내에서 범인들에 대한 재판진행절차를 비롯하여 일본 내 사건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소개하며 일본정부가 이 사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흔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경성수비대 대장 직속의 미야모토 소위가 마키 특무조장을 거느리고 궁궐을 난입하고, 왕후를 살해했다는 사실은 결코 밝혀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국제사회의 비난뿐 아니라 조선내의 강력한 반발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국의 왕후를 시해했다는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이 보여주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과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련자들에 대한 ‘증거불충분’으로 면소 처분의 과정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본다. 이 명성왕후 시해사건은 항일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후 항일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을 다각도로 살피고 있다.
왕후가 궁궐 안에서 침입한 외부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할 정도로 약화된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주일 영사가 스스로 ‘역사상 고금이증유의 흉악한 행위’라고 표현한 사건에 대해 아직 그 전모를 비롯하여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도 못한 것이 안타깝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도 못하는 것은 명성왕후 시해사건 같은 역사적 일만은 아니다. 광복이후 일제잔재에 청산에서도, 미군정 이후뿐이라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 뒤를 이은 권력자들의 모습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