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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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고요한 욕망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내놓지는 못하지만 아주 은밀하게 감정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무엇인가가 있다. 희노애락을 감지하는 순간순간, 간절히 원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멈춰선 그 지점 그곳에 이르러 갈망이 머물게 된다. 본능, 충동, 욕망, 애욕, 사랑 등 인간은 이러한 근본 욕구로 인해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갈망을 불러오는 인간의 감정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깊은 내면에 잠재해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박범신의 [은교]는 이런 인간의 존재로부터 출발의 근원을 삼고 있는 ‘고요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생물학적 시간을 달리하는 70대, 30대 10대의 세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현실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적요, 서지우, 한은교는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구분이며 그러한 인간들의 인간관계의 사다리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세대를 대변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1년 전 이미 죽은 이적요 시인의 유언에 따라 이를 마무리하려는 변호사의 업무가 노트 한 권으로부터 번민에 휩싸이게 된다.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위대한 시인과 당당히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가에 관한 충격적인 고백을 접하게 된 변호사 Q는 그 이야기의 한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유산 상속인 소녀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이적요 시인의 일기, 서지우 작가의 디스켓 그리고 이들 사이의 접점인 은교, 이 세 사람의 은밀한 감정이 만나는 그 지점이 비밀스럽게 담겨있는 노트를 매개로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가슴에 담긴 색깔로 보인다고 한다. 한은교를 둘러싼 시인과 소설가 두 사람의 대척점은 바로 자신들의 가슴에 담긴 은교에 대한 다른 갈망의 색이 발현되는 지점에서 만난다. 같은 열일곱이라는 나이지만 너무나 다른 열일곱, 팔씨름의 승부, 사다리를 통해 본 거실의 풍경 등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갈망은 이미 생물학적 나이의 차원을 벗어나 있음을 알게 한다. 늙음이나 청춘은 그냥 자연이라는 시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는 것이다.

욕망의 표출이 은교라는 한 지점에서 만나지만 시인과 소설가 두 사람의 갈망에 대한 시각은 천지차이를 보인다. 두 사람의 고백을 따라가다 보면 은교의 말처럼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애증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믿음에 대한 배신과 절망이 계획적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나지만 그 속에는 서로를 향한 따스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따스한 따스하게 그려가는 이 소설의 중심이 시인 이적요다. 그렇기에 이적요의 갈망에 대한 마음 상태의 표현은 세밀하기 그지없다. 아쉬운 점은 선생님이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결정을 알고 난 후 서지우의 감정 상태에 대한 마무리가 급하다. 이적요의 생일날 밤 자신과 한은교의 모습을 선생님이 봤을 것이라는 것을 서지우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서지우의 마지막 감정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바다 속 고요처럼 은밀함을 근본으로 하는 이러한 인간의 감정들은 시절인연으로 때를 만나 일상에서 발현되기까지는 자신을 결코 알지 못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저자는 [은교]를 통해 이러한 인간이 부정하고 싶은 갈망과 접하게 될 때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모습을 두 사람의 마음 상태로 잘 담고 있다고 본다. 열일곱 어린 여자에서 느끼는 청춘에 대한 갈등을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성찰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

은밀하게 내면을 채우고 있는 고요한 욕망의 계절인 봄날에 거부할 수 없는 갈망이 모락모락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저자와 나의 욕망이 만나는 청춘, 그 지점에 또 다른 은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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