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위한 변명
신명호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 그들도 인간이였다.
동북아 3국 즉 중국, 한국,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국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 국가의 왕조 중 한국의 왕조만큼 오랜 기간을 이어온 왕조는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이 특징은 전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다. 천년의 신라역사, 고려 9백여 년, 조선왕조 5백년 등 실로 막강한 왕조의 나라였다. 하지만 이 세 나라의 왕조는 조금의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가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이라고도 본다.

중국의 왕조는 삼국 중 가장 절대적 권력의 왕이였다. 천자(天子)라고 해서 그 권력은 백성과 신하 위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였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반역을 키워 온 온상이기도 해 긴 역사의 왕조는 존재하지도 못햇다.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는 반대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이 우위에 있어서 왕은 이름 뿐 이여서 신권에 의해 언제든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의 왕조들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줄다리기 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명목상으로는 백성과 신하위에 엄밀하게 왕권(王權)이 존재했지만 조화로운 권력의 분배를 통해 서로의 권력을 유지 해 온 것이다. 

때론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권력 불균형이 생겨 왕권(王權)이 무너지는 반역이 성공하기도 했고 권력의 한 축이였던 신하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두 권력의 조화가 5백년에서 천년에 가까운 왕조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는 결국 서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면 그 속에 백성들의 안위는 그야말로 피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왕의 고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라기 보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사이의 줄다리기를 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왕이라면 어떤 마음이였을까?
이 책 [왕을 위한 변명]은 바로 그런 입장의 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왕이라는 권력의 상징으로써 그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왕들의 인간적인 고뇌로 살펴본 시각이라 신선함이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10명, 태종, 세종, 세조, 연산군, 중종, 광해군, 인조, 영조, 정조, 고종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조선왕조 500년간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왕들이었다. 격동기의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온 왕들이기에 그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컷을런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로 나타나고 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태종 / 형제인가 경쟁자인가, 세종 / 불교를 향한 염원에 담긴 뜻, 세조 / 한 세상 내 마음대로 원을 풀리라, 연산군 / 극도의 공포심이 빚어낸 이중성, 중종 / 저주를 혹신한 극단의 심리, 광해군 / 무엇이 천륜마저 저버리게 했을까, 인조 / 이복형 경종의 죽음 앞에서, 영조 / 만들어진 천재성, 정조 / 외롭고 고단한 황제, 고종

태종은 태상왕 이성계와 갈등을 겪으며 끊임없이 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얻고자 했다. 천운을 갖고 태어났다는 세종은 왕좌에 올랐으나 형제들에게는 경쟁자였다. 세조의 불교를 향한 염원은 원인 모를 병이 원인이었고,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빙의로 무병을 앓았다. 신하들을 이용해 권력의 중심에 섰던 중종은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숨겼던 본심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냈다. 광해군은 자기 확신과 포용력 그리로 용인술이 부족한 왕이었다. 존명사대의 틈에서 실리를 찾으려 했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국왕으로서 영조의 일생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일생이었다. ‘천재 임금’으로 성장한 정조의 뒤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태교와 최고의 교육환경이 있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전까지는 항상 누군가에 의지해 살았다.

[왕을 위한 변명]을 통해 살펴 볼 때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한 인물 특히 왕에 대한 고찰은 많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심정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부분을 상상하고 억측하고, '인간 통찰'이라는 미명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역사의 주체는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넘어선 특별한 인간 이상의 왕은 아니였다.
절대권력 그 속에 담긴 무시무시한 비인간적 요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외교, 신하, 부모, 형제들과의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 왕들. 그런 왕들을 오히려 다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되어 따스한 미소가 머문다.
역사는 결국 사람의 삶에 대한 기록이며 그를 통해 미래의 희망을 마련하는 기틀이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