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염하고 가녀린 미인, 살구꽃

五更燈燭照殘粧 오경등촉조잔장

欲話別離先斷腸 욕화별리선단장

落月半庭推戶出 낙월반정추호월

杏花疎影滿衣裳 행화소영만의상

오경의 등불은 남은 화장 비추고

이별을 말하려니 애가 먼저 끊어진다.

반 뜰 지는 달에 문 밀고 나서자니

살구꽃 성근 그림자 옷 위로 가득해라.

고려사람 정포鄭誧의 시 '별정인別情人'이란 시다. 어느 으슥한 곳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거기로 가끔 가서 놀았다. 때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밤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새벽에 사랑하는 여인과 작별하고 돌아오려 할 때, 그 순간의 광경을 그려낸 것이다. 살구꽃에 얽힌 로맨스를 담았다.

"살구꽃이 비록 곱고 어여쁜 것은 복사꽃만 못하고, 밝고 화려하기로는 해당화에 못 미치며, 아름다운 것은 장미에 미치지 못하나, 요염한 것은 도화 해당 장미가 또한 행화에 한 걸음 양보해야 할 지도 모른다."

살구꽃에 대한 묘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다. 매년 때가 되면 살구나무를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족한듯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볼 여유로움이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꽃이다.

최근 내가 사는 마을 한쪽에 있던 살구나무가 사라졌다. 이사온 사람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잘려나간 것이다. 어찌나 아쉽던지 그쪽 방향으로 출입하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

살구나무는 친근한 나무다. 마을마다 여러그루가 있어 살구가 익을 무렵이면 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며 살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어린시절 추억이 있다.

꽃도 이쁘고 열매에 대한 추억도 있기에 들고나는 대문 가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올해는 꽃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해를 더 기다려야하나 보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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