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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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이놈아, 너는 어찌 이 늙은 애비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느냐.”

죽은 세자를 안고 우는 영조의 비탄의 말이다.

공부가 국시고 예법 또한 국시다

영조의 이 말에서 이미 관객은 영화가 줄 메시지의 방향을 짐작한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 영화 사도

 

아들과 아비의 뒤늦은 대화가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독의 시선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비극이 집안일이고 부자간 갈등으로 이해되어야 할 사건인가? 공부지상주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단 한번 등장한 일물(一物, 뒤주를 뜻함)에 의한 왕위계승자의 죽음, 정조의 병신처분’(1776, 정조즉위년)으로 혜경궁 친정의 몰락 등은 영화의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없게 한다.


역사란 궁극적으로 기억과 망각의 시뮬라시옹으로 존재한다’(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김기봉)고 했나? 역사가 어떤 거대담론에 의해서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결정하는 언어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작가와 감독의 시선 안에 갇혀 재현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다시 뽑아들었던 책이 바로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였다.

 

이 책을 시작하며 작가는 고등학교 국어시간 읽었던 한중록을 떠올린다. 혜경궁의 일관된 메시지는 이 비극이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중록내용과 의도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 단서를 영괴대(靈槐臺)’비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 비영조실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모습은 한중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중록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편만 정조 때 쓰고 2~4편은 정조 사후에 기록했다. 기록 시기만 생각해보아도 혜경궁의 의도는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없음을 밝히고자 함임을 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은 먼저 형조에 1차 고변을 했고, 이 형조에 넣은 원서로 인해 왕을 청대하게 된다. 1, 2차 고변서의 내용은 읽고 불에 태워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1차 원서에 왕을 청대할만한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역모에 관한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심각한 내용이라도 일개 상민이 왕을 만나기위해서는 누군가 중간에서 힘을 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품에서 흉서를 꺼낼 때 까지 아무런 제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배후의 존재를 추측케 한다. 2차 고변서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비행에 관한 일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무고죄로 죽인다. 그러면 세자의 비행에 대한 고변이 거짓이란 말인가? 문제는 1차 고변의 내용인 것이다. 고변의 핵심은 변란이 호흡사이에 있다는 말이었다. 즉 세자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리라는 고변이었다. 영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나경언의 고변에 대한 예단을 지니고 있었다. 나경언의 고변 20여일 후 세자는 뒤주 속에 갇히게 된다.

노론의 힘에 의해 왕위에 오른 영조는 경종독살설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주벽서사건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이 사건으로 무너지게 된다. 영조의 군주로서의 정체성은 노론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에 가까웠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보여준 친소론적 모습은 영조나 노론이 위기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세자의 죽음을 전후로 노론의 영수인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의 행적은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 그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정조 즉위 후 처분들은 정조가 이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역사에 숨어있던 진실을 드러냄으로 다른 시각과 추론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의 다른 제목 사도세자의 고백1판과 2판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가해자와 피해자는 역사 속에 묻혔다. 그리고 240년의 세월이 지나 나의 손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담긴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진리와 방법에서 하나의 작품은 일단 형태화하고 난 후에는 그 창작자나 해석자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는다.’라고 말했듯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어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한중록이 그랬던 것처럼.”

 

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떠올려 보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한 가지 관점으로 알고 있던 사건을 정치, 외교, 군사 등 보다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창덕궁 규장각이 있는 후원으로 가는 입구에 정조 때 동궁전이 서있다. 아마도 경희궁과 창덕궁에 머물던 영조와 창경궁에 있던 사도세자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사이에 신하들의 당쟁이 끼어든 것은 아닐까하여, 정조가 아들을 가까이 하기 위해 창덕궁 안에 동궁전을 두었다는 해설사의 말이다. 잠시 가슴이 저릿했다.

 

한중록을 통해 알고 있던 사도세자의 모습은 기억된 과거는 역사가 되고 망각된 과거는 역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세검정에서 사초를 씻는 행위는 이 사실을 의미하는 퍼포먼스다.

로마사에 대한 기번과 몸젠의 시각이 다르고,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제국주의 사관이 숨어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역사관을 입증하기 위해 사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는 사료들을 최대한 수집하고 그것들을 통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 하지만 그 작업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기록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국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읽는 사람에게도 철학과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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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8 2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잘 읽었습니다. 마주칠때마다 당황스럽고 속터지는 이 사건. 얽히고 설킨 것들의 결과였군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어야했는지 원망은 가시질 않네요.😭

그레이스 2021-06-28 23:38   좋아요 3 | URL
늘 불안했던 영조와 사도세자를 둘러싼 세력과의 긴장이 있었고, 세자는 외교에 있어서도 영조와 다른 의견이었다고 합니다.
영조의 불안과 긴장이 세자의 연약한 성격에도 영향을 주긴 했겠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만화를 보면 중립적인 시각으로 이 사건을 그리고 있긴 합니다.

scott 2021-06-29 0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세자는 정치의 희생자 인것 같습니다.
한중록은 집안의 명예회복을 위해 쓴것
아들 정조 보다 15년이나 더 살다간 헌경 왕후, 혜경궁 홍씨

이책 다큐로 만들어지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1-06-29 00:46   좋아요 2 | URL
처음 읽은 후로 그동안 두번은 더 읽었습니다.^^ 이덕일 역사책은 모두 읽을만 합니다!

희선 2021-06-29 0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적힌 게 맞기는 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적히지 않은 것도 알면 좋겠지만, 잘못된 쪽으로 상상하면 안 될 것도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배우는 역사도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은 듯합니다 그런 거 그때는 하나도 몰랐지만... 지금도 아는 거 별로 없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6-29 06:36   좋아요 3 | URL
실증주의에 의한 역사기술이 누락시키고 왜곡시킨 부분이 많았구요. 이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때의 역사를 읽었었죠^^
감사합니다 ~

bookholic 2021-06-29 0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덕일 님의 책들을 읽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다른 역사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친한 선배 형님이 이덕일 님의 책도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정병설 님의 <권력과 인간>을 추천해 주셨는데요...
역사의 기록은 역사가의 생각이 안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덕일 님의 책도.. 정병설 님의 책도...
나중에 정병설 님의 <권력과 인간>도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그레이스 2021-06-29 09:29   좋아요 1 | URL
예 맞아요 .
이덕일 님도 치우쳐 있어서 균형잡고 읽어야 해요.
그동안 역사학계가 한 흐름으로 와서 이런 분의 역할이 필요했지 않았나 싶어요.^^
정병설님의 책도 알고 있는데 소개해주신 책은 못읽었네요.
정병설님이 이덕일님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했던 기사가 기억납니다. 재판까지 갔는지는 모르겠구요.

이덕일님이 적이 많은 듯요^^
감사합니다~

bookholic 2021-06-29 19:34   좋아요 1 | URL
두 분이 소송 이야기까지 나왔었군요....
 

플로베르의 <살람보>를 주문했다.^^
카르타고의 유적지를 소개하며 <살람보>가 플로베르의 대표작이라고 이야기한 몇 줄 때문에....
아마도 유적지의 사진들과 포에니전쟁, 로마, 카르타고 고대역사를 읽던 향수?가 작용한듯, 기대만큼 좋은 작품이길...
<살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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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면 국가는 그들에 대한 투자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특수학교로 보내져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과 지원을 받았다. 교육 불가능", 나치가 사용했던 용어로
"무가치한 어린이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비엔나에서 이런 판정과 살해 과정은 슈피겔그룬트spiegelgruna 라는 시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겉보기에는 어린이병원을 닮은 시설이었다. 어린이를 살해하는 데는 수일에서 수주가 걸렸다. 항경련제인 페노바비탈phernsburbital 을 매일 먹이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었다. 분유나 코코아에 타 먹이거나 좌약 형태로 투여한 약물은 폐 기능을 조금씩 손상시켰다. 사망 원인은 보통 폐렴으로 기록되었다. 동원된 의료인들은 향후 연구를 위해 어린이의뇌를 적출하여 보존한 후, 가족들을 불러 자녀의 시신을 수습하게했다.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의사 중에 나치가 장악한 의료관료주의의영향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틀림없이 아스퍼거는 매일 그들을 만났을 것이다. 비엔나 대학병원의 스승 프란츠 함부르거 Hamburger 는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다. 아스퍼거 자신도 비엔나 시의다양한 자문위원회에 소속되었다. 조직의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으레 충성스러운 히틀러주의자였다. 눈꼽만치라도 야심이 있는오스트리아인이 전문직종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로 나치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되었다. 그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곧 체제에 맞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 P446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세탁용 세제의 상표명은 퍼실persil이다. 원래 독일에서 생산된 퍼실은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세제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그 단어는 일종의 음산한 유머로서 당시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쁜 평판을지우기 위해 기울인 맹렬한, 때로는 터무니없는 노력을 가리키는말이었다. 연합군 측의 "비나치화 정책에 힘입어 영향력있는 위치에서 나치당원과 부역자를 몰아내려는 노력이 전개되자 사람들은허둥지둥 결백을 입증해줄 증인을 찾아다녔다.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에 친절하거나 인간적으로 품위있는 행동을 했던순간을 유대인이 나서 증언해준다면 특히 가치가 있었다. 오명을씻으려는 사람은 종종 게슈타포에게 체포 협박을 당했다거나, 나치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희생자로 묘사했다. 나치에 보조를 맞춘 것은 책략일 뿐, 사실은 몰래 저항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노력이성공을 거두면 결백함 또는 "깨끗함을 인증하는 서류를 발급받았다. 그 서류를 페르질샤인, persilschein, 즉 "퍼실 증명서Persil certificate" 라고 불렀다. 그러나 심지어 그때도 페르질샤인에 대한 냉소가 팽배했다.
- P466

 "집에 둔다면 아이는 건강한 아이 다섯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될 것이다." 헤르타의 어머니에 대한 공감을 표현한 후 아스퍼거는권고한다. "슈피겔그룬트에 영구적으로 입원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그 아래에 서명이 있었다. 한스 아스퍼거."
모든 청중이 아스퍼거의 편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것은사형선고였다. 실제로 크체하는 헤르타가 1941년 7월 1일 슈피겔그룬트에 입원했으며, 세 번째 생일 다음날인 1941년 9월 2일 그곳에서 살해당했음을 확인했다. 기록상 사인은 폐렴이었다. 병원 문서보관소에 남아있던 기록에는 아이 어머니가 평생 비참한 꼴로 조롱당하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이런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데 눈물을흘리며 동의했다고 적혀 있었다. 헤르타의 부모 역시 나치 이념을지지했다는 것이 크체히의 평가였다. 그의 이야기가 불러일으킨 효과는 강력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청중은 프로그램 표지에 실린 아스퍼거와 소년의 사진을 힐끔거렸다. 크체히가 조용하고 감정없는목소리로 나치의 과거에 대해 더욱 마음 불편한 소식들을 전하는동안 축제 같던 분위기는 급변했다. - P475

레오 카너가 첫 번째 논문에서 기술한 지 거의 40년이 지난 1980 년에 발간된 DSM-III까지도 자폐증은 진단명으로 등재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정의 자체가 자주 달라져 1987년에 크게 바뀌었고,
1994년에도 다시 변경되었다. 2000년에는 약간 달라졌을 뿐이지만, 2013년에는 격렬한 논쟁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내용의김이 역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증상 체크리스트를 구성하는단어 수는 처음에 약 70개였지만 한때는 600개를 넘었으며, 다음판에서는 300개로 줄었다가, 판이 두 번 바뀐 뒤에는 다시 확장되어 거의 900단어를 헤아렸다. 진단명 자체도 유아자폐증에서 자폐장애로, 다시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계속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폐인을 식별하기 위해 개발한 증상 체크리스트가 끊임없이 개정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판에서는 16가지 진단기준 중 8가지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만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 12개 기준 중 6개인 때도 있었다. 또 다른 판에서는 볼크마와 예일 대학의 브리안 라이카우Batan Recilions 의 주장에 따라 2,000개 이상의 진단 조합 중 하나에해당하면 자폐증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양상은 1994년 아스퍼거 장애가 독립적인 진단명으로 추가된 이후 더욱 복잡해졌다. - P521

친구들이 갑자기 연락해 아이가 전화번호부를 외우는지, 이쑤시개 숫자를 기막히게 빨리 세는지 물어보는 바람에 귀찮아 죽겠다는 부모들이었다. 그러나 레인 맨>은 자폐증의 가장 초기부터 끈질기게 부모들을 괴롭혔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외부인에게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오래도록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지만마침내 모든 사람이 적어도 대충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된 것이다.
루스 설리번이 옳았다. 〈레인 맨>은 자폐증의 서사를 영원히 바꾸었다. 자폐인의 진정한 어려움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본절대 다수에게 그것은 여전히 타인의 급박함일 뿐이었다. 하지만1988년 이후 대중은 자폐증이 어떤 상태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했고, 동시에 전반적으로 자폐인의 모습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분명 진보였다. 자폐증이란 세계에서 최초로 배출한 스타인레이먼드 배빗 symond Eathat 이 가공의 인물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폐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 P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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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간호사가 다가와 면회가 끝나고해리엇이 건물을 나설 때마다 아치가 창으로 달려가 그녀가 차에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차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그쪽을 쳐다본다고 알려주었다. 해리엇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동생을 만날 때마다 비록 말은 없어도 두 사람이 가족이란 사실을 아치가 이해한다고 믿기로 했다. 그녀는 동생을 차에태우고 주변을 드라이브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드라이브는 점점 길어져 나중에는 아치를 집에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소등시간전에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었다. 이때쯤 그녀는 오래도록 믿어왔던 지능박약이란 진단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이브를 갈 때면 아치는 주차장에 세워진 50대가 넘는 자동차중에서 그녀의 파란색 차를 즉시 찾아냈다. 처음 몇 번은 안전벨트매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야 했지만, 나중에는 차에 타면 바로 혼자서 안전벨트를 맸다. 토마토를 잔뜩 따서 차에 싣고 함께 집에 간적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동안 아치에게 토마토를차에서 내려 차고에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일을 하다가 퍼뜩동생은 "차고"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달려나갔다. 하지만 이미 동생이 야채를 모두 차에서 내려차고에 가지런히 줄을 맞춰 정리해 놓은 뒤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앞마당으로 나가 여기저기 흩어진 쓰레기를 줍더니 바깥 쓰레기통에 넣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치가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바위같은 침묵 저편에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 P271

그녀와 함께 스펜서 주립병원을 찾았을 때 루스는 해리엇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치는 명백한 자폐증이었다. 루스는 확신했다. 그녀의 의견은 충분한 권위를 지녔다. 이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설리번 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펜서 주립병원에서그녀가 내린 진단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그녀와 해리엇이 아치를 데리고 나가 루스가 설립한 기관에서 막문 열 준비를 하고 있던 집단주거시설로 옮기려고 하자 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병원장은 완고하게 반대했다. 아치는 평생을 주립병원 시스템 속에서 살았으므로 다른 곳에서는 어찌할 바를모를 것이 했다. 아치는 견디지 못할 겁니다.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전혀 그렇지 않았다. 74세가 된 아치는 누나의 굳은 의지와 루스설리번의 명성에 힘입어 웨스트 버지니아주 헌팅턴의 한 주택으로옮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제 그는 3,000명이 아니라 다섯 명과 함께 살았다. 1919년 이후 처음으로 자기 방이 생긴 것이다. 병원장의 예상과 달리 죽지도 않았다. 다만 20세기 초에 잃어버린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70년 만에 그는 장난감을 갖게 되었다. 곰인형이었다.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세발자전거 타는 법도배웠다. 침대에서 어찌나 열심히 펄쩍펄쩍 뛰던지 직원들이 달려와말려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뛰다가는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다칠것 같았기 때문이다. - P272

아치는 1997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단주거시설에서 살았다. 누군가 그를 가리켜 살아있는 최고령 자폐인이라고부르기도 했다. 장례식에는 100명이 넘게 참석했고, 살던 집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로운 명칭이 붙여졌다. 캐스토 하우스다.
삶의 막바지에 구출된 아치는 9년간 기가 막힌 삶을 누렸고, 그의이름으로 명명된 집에 자신의 자취를 남겨놓았다. 침대 위 천장에갈라진 자국이 바로 그것이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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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멜리사는 어떤 병일까? 수없이 도서관을 드나들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 마침내 딸과 똑같은 증상을 찾아냈다. 자폐증.
뭔가 이름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마음이 놓였다. 전문가들은 자폐증이 엄마의 잘못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책은 물론 다른어떤 책에도 그런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도움이 될 조언이나 지지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차가운 욕실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하염없이 흐느끼는 나날이 이어졌다.
- P159

브루노 베텔하임은 엄마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카너가 부모들의책임이 없다고 선언한 지 2년 후인 1971년 여름, 베텔하임은 〈딕 캐빗쇼pick Cavet show)에 출연했다. 정신의학계에서 냉장고 엄마 이론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반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베텔하임 역시 여전히 시카고 대학에서 장애학교를 운영하며 자폐 어린이를 받았지만, 이때쯤에는 수많은 기사를 통해 그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이 밝혀져 있었다. 부모들은 학교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그곳 정원에는 몸을 뒤로 젖힌 엄마 조각이 놓여 있는데 어린이들에게 드나들 때마다 조각을 발로 걷어차라고 부추긴다는 사실도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베텔하임은 중요 인물이었고, 자폐에 대한 그의 생각은여전히 대중의 의식을 지배했다.
- P148

냉장고 엄마 이론은 자폐가 엄마 때문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인식을 부추겼다.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냉장고 엄마 이론에 맞서려면 무엇보다대항이론이 필요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격과 신뢰성을 지닌 누군가가 그런 이론을 주장해주어야 했다. 그래야 정신의학계에서도 냉장고 엄마라는 개념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받아들일 것이었다. 1964년 그런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한때 샌디에이고의 열쇠 수리공이었다. 하지만, 자폐증에 대해 모든 것을 배우겠다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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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24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은폐하고 묵인하려고 냉장고 이론 같은걸 만드는 것을 보면,
뉴스도 이론도 그 ‘의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 참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1-06-24 13:49   좋아요 2 | URL
부모들이 죄의식가운데 살았던 세월이 안타까웠습니다.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신념과 성취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아지죠.
그들의 인생을 담보로 해서 자신의 성공의 재료를 삼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읽는 책들이 다 이런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