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뷔페, 그의 그림들은 그 앞에 오래 머물게 하는 자력이 있다. 그가 화판에 그어놓은 선들은 작가의 지문이다. 여러 개의 날카로운 선들이 반복적으로 오고가며 형태를 이루고 그 선들은 살아서 저마다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기하학적 직선과 단색으로 그려진 그의 꽃들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화려하다. 핍진한 인물들의 얼굴과 몸은 공허와 슬픔과 불안과 고통을 전달하고, 다채로운 도시 풍경 속 간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그 장소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한 작품 한 작품 머물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주제의 공간으로 들어와 있고, 여러 개의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화가의 사인이 머릿속에 박힌다. 고독한 자화상인 <광대의 얼굴>과 “만약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라고 한 말, 그리고 그의 최후는 작가의 실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단테의 지옥, 지옥에 떨어져 얼음에 갇힌 사람들>(1976), 캔버스에 유채, 250×430㎝
이어지는 전시 공간으로 들어서다 맞은 편 벽 전체를 덮고 있는 그림과 마주치고, 그 앞으로 자석처럼 끌려갔다. “단테”…“신곡이다”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지옥의 밑바닥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 떨어진 영혼들이 몸을 비틀고 증오와 고통으로 뒤엉켜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어떤 맘으로 하필이면 신곡 중 지옥의 밑바닥으로 그렸을까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있었다. 그가 그려온 인물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옥 군상과 주제의 그림이 자연스럽다.
『신곡』을 다시 읽고 있는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던 내가 아니었다. 단테와 『신곡』 역시 같은 사람 같은 책이 아니었다. 단테가 통과해간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나눈 신학적 베이스와 그가 창조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지나쳐버린 역사와 인물들과 의미들을 주워 올렸다.
『단테 신곡 강의』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신곡 연구를 강의한 내용이고, 학자나 예술가들의 대담도 함께 담겨 있다. 신곡 안에 키워드가 되는 단어의 원어 연구와 다른 작품들 안에서 용례 비교를 통해 작가의 의도에 가까운 의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본의 문학이나 사회 문화에서 비슷한 상황을 들어 비교하고 있어 그 부분은 공감이 어렵다. 그럼에도 나같이 단천(短淺)한 독자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를 먼저 살피고 비교한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알아야하고 베르길리우스를 알려면 서양의 근본적인 서사시의 전통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의 기원이 트로이아로부터 오는 배경도 그 이유가 된다. 그런 기원을 갖고 있지만 단테의 『신곡』은 그들과 대립적이기도 하고, 창조적이다.
50년 동안 단테에 천착해온 저자의 강의와 질의응답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준 높은 질문과 이마미치의 답변은 『신곡』을 보는 눈을 몇 단계 높여 주었다. 14,15세기의 이탈리아와 라틴어, 역사, 단테학회 자료 등을 자료로 『신곡』을 풀어 놓은 양과 학문적 깊이는 내게 벅차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천구의 체계를 천국편에 적용하고 있으며, 아리스토 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긴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알면 알수록 단테의 지식과 글로 표현해내는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지난번에 읽었던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와 『단테』도 다시 읽고 참고했다. 이 책들 역시 새롭게 얻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은 도판이 그리 좋진 않다. 항상 ‘명화(그림)로 보는 ○○○○’ 제목의 책들을 보면 도판이나 내용에서 조금 실망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신곡』에 담긴 구스타프 도레의 판화가 더 인상적이었다. 『연옥의 탄생』은 연옥의 기원과 발전된 계기,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기까지의 과정 등에 관한 내용으로 흥미로웠다. “12세기 말까지 ‘연옥’이 명사로 일반화되지 않았고 사용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14세기의 시인 단테가 그곳을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연옥’이라는 어휘가 생겨나고 불과 백 년쯤 후에 단테가 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는 실로 선험적이고 위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단테 신곡 강의』 333p)”고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말한다.
문학과 예술을 읽고 감상하다보면 도처에서 『신곡』을 만나게 된다. 미술관 전시실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아 벽에 걸린 「지옥」 풍경과 조우하는 것처럼. 단테가 인간의 연약함과 고귀한 정신, 절망과 소망, 빛과 그림자 등 삶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는 보편성에 공감한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은 그에 조응한다. 조금 더 오랜 시간 조금 더 깊고 자세히 읽어 보면, 그 공감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지식의 지평이 펼쳐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처럼 평생을 바쳐야 얻어지는 것들이다. 스스로 일천함을 깨닫는 독서였다. 『신곡』을 읽는다는 것은 예술과 문학 속에 남겨진 그 유물을 찾을 수 있는 시야를 얻는 유익이 있다. 그러기에 재독에 재독을 더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