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이 미국에서 격렬한 표현적 제스처로 형(形)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앵포르멜’이라는 흐름이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카운터파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형태에 대한 공격, 물질성에 대한 관심, 즉흥적 화법, 표현적 제스처 등은 전전(戰前)의 기하학적 추상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전후 표현적 추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두 흐름이 서로 상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서양의 양안에서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전후 추상의 이 두 흐름은 전전의 모더니즘 기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공통된 인식의 산물로 보인다.(진중권『 Postmodernism』65p)"
미국과 달리 프랑스 사회는 종전 후 나치 점령의 상처를 처리해야 했다. 앵포르멜 운동은 이 이중의 역사적 외상(잔인성, 수치)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방어로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떠오른 것은 점령의 조건 하에서 개인의 ‘실존’에 관한 물음이었고, 철학에서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찾았고, ‘앵포르멜’에서 승화되었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는 앵포르멜의 대표 작가다. ‘형태’를 허물고 ‘물질’을 부각시키는 것이 당시로서는 도발이었다. 1946년, 같은 화랑에서 열린 뒤뷔페의 전시회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비평가 앙리 장송은 “다다이즘 다음은 카카이즘”이라고 혹평했다. 화면에 두껍게 발라진 물감 층의 물질적 느낌이 그에게 ‘대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앙리 장송은 연상되는 이미지를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뒤뷔페는 실제로 염소똥과 약간의 모래를 섞어 만든 반죽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이 무정형의 취향에서 바타유의 ‘기저유물론’이 소환된다.(71p)” 뒤뷔페는 정신병자나 어린아이들의 그림을 날것 그대로의 거친 예술이라는 뜻에서 ‘아르 브뤼(Art Brut)’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에는 어린아이의 것과 같은 그림이 많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Postmodernism』참고]
장 뒤뷔페 전시에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뒤뷔페와 함께 빌레글레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두뷔페의 유작
1관에는 그가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작업했던 ‘우를루프(L’Hourloupe)’ 연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를루프’는 늑대의 울음을 흉내 낸 의성어라고 한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실재 형태를 찾기는 어렵다. 두꺼운 테두리를 가진 구불구불한 원시적 형태의 연속은 흑백과 세 가지 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존재를 찾기도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비존재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 우를루프 연작은 ‘쿠쿠바자-애니메이션(Coucou Bazar-Un tableau anime)’으로 발전한다. 쿠쿠새에서 따온 것으로 새의 모습이 원시적이고 신비하다. 뒤뷔페가 만든 배경 속에서 그가 직접 만든 의상을 입은 배우가 움직이는 회화를 연출한다. 놀이로서 승화된 작품은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다.
<뒤뷔페의 스튜디오 작품들>
우를루프의 방황을 끝내고 이 연작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그는 스튜디오를 차리고, 소속된 아티스트들이 영사기를 이용한 드로잉 작업을 한다. 이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3관에는 자크 빌레글레(Jacques Villeglé, 1926~2022)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뒤뷔페의 포스터를 발견하고 이것을 떼어 자신의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이를 위해 뒤뷔페와 연락을 취함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번 우를루프 전시의 포스터를 내 작업에 사용해도 될까요? 당신이 허락해주면 굉장히 영광일 것 같습니다.”(1975년 3월 23일 편지의 일부 내용)
뒤뷔페와 빌레글레는 25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자크 빌레글레는 이 작품들을 1985년 <우를루프의 귀환>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자세히 보면 우를루프 연작의 형태들이 보인다. 마치 뒤뷔페의 형태들이 찢어진 벽보 사이로 내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도 있다.
자크 빌레글레<까르푸 몽마르뜨-렁뷔토>1975, <모리스 컹탕 광장>1975
<벽보를 떼고 있는 빌레글레>
자크 빌레글레 <레오뮈르 거리 - 베르튀 거리>1984
자크 빌레글레는 ‘비회화 속의 회화’ 작업을 한다. 당시 파리는 선전과 상업용 벽보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이 벽보들을 이용하여 데꼴라주décollage 작업을 했다. 재료를 붙여서 만드는 것을 ‘꼴라주’라고 한다면 ‘데꼴라주’는 붙여있던 것을 떼어 내서 다시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그는 여러 개의 벽보를 뜯어내어 다시 붙이고, 거기에 거리의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붙인다. 스스로를 벽보 강탈자라고 표현했던 그는 나이가 들고 쇠약해진 후 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글쓰기에 전념했었다고 한다. 2022년 올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작품 안에는 그가 살아왔던 당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빌레글레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이라고 한다.
4관에는 뒤뷔페의 초기작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공간이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도슨트는 파리의 뒤뷔페의 퐁피두전시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설명한다. 이 공간에서의 감상은 오래 걸렸다. 진중권의 앵포르멜 장에서 소개된 모든 작품들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전시에 온 보람이 있었다. 이 초기작품들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얼굴과 노란 금반지를 낀 몸이다. 순수한 어린이의 그림처럼 보인다. 흙과 같은 재료를 두텁게 덧칠한 질감도 특별했다.
장 뒤뷔페<유령들에게 월출>1951
장 뒤뷔페<모나리자(Jaconde, 여자의 큰 두상)>1948
장 뒤뷔페<금반지>1958
현대 미술의 무대가 뉴욕으로 옮겨가고, 여러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서도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앵포르멜이 있었다. 최근에 공부하던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사실 퐁피두에서 그의 작품을 일부러 찾아보는 것이 더 어렵다.(파리에서 볼게 얼마나 많은가?^^) 뒤뷔페와 빌레글레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의미있는 전시회였다.
날씨도 너무 좋고 미술관이 위치한 올림픽공원 풍경도 너무 좋았다. 소마미술관 건물도 경관을 고려한 특별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 공간으로서의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