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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7년 4월
평점 :
“무기들과 한 전사를 나는 노래하노라.”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무기들(or武具)은 전쟁을 뜻하고, 한 전사(남자)는 아이네아스를 의미한다. 서두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와 닮아있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웅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로 시작하는 『오뒷세이아』는 지금부터 오뒷세우스의 방랑을 노래할 것이라는 예고를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리아스』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이라고 시작하면서 많은 영웅들이 죽어간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아이네이스』1~6권은 아이네아스가 트로이를 탈출하여 이탈리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7~12권은 이탈리아 라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까지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앞부분은 『오뒷세이아』, 뒷부분은 『일리아스』참조하고 있다.
로마의 공화정을 끝내고 황제의 시대를 열어가려 했던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죽고, 양자였던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를 계승하면서 그에게는 정통성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베르길리우스에게 건국신화를 쓸 것을 요청했고 그는 전승되는 신화 중 가장 유력한 내용을 선택해서 서사시를 썼다. 트로이 왕족인 아이네아스는 트로이를 떠나 ‘히페리아에 새로운 트로이를 건설할 것’이라는 신탁의 내용을 받는다. 여정 중 아버지 앙키세스의 조상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신탁의 내용과 함께 알게 된다. 그가 항해 중 도착했던 델로스나 크레테 시칠리아, 카르타고 등 모든 곳에서 이 예언은 좀 더 구체화되고 로마의 미래까지로 진전된다. 이 예언에는 로물루스가 알바 롱가에 로마를 세우는 것과 미래에 있을 정복전쟁, 아우구스티누스의 악티움 해전의 승리가 등장한다. 베누스가 아들 아이네아스를 위해 불카누스에게 부탁해 만든 방패에는 미래 로마제국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과 승리가 새겨져 있다. 이 예언의 의미들은 앙키세스와 베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네아스가 세운 로마를 아우구스투스가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서사시는 아이네아스 일행이 카르타고에서 디도를 만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여왕 디도에게 트로이의 패망과 탈출, 카르타고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환대를 받은 아이네아스는 카르타고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돕는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피어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네아스에게 유피테르는 전령 메르쿠리우스를 보내 경고한다. 이탈리아로 받은 신탁을 성취하도록 명령한다. 고민하던 아이네아스는 이탈리아를 향해 떠나고 디도는 슬퍼하며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는 아이네아스를 향해 저주한다. 카르타고와 운명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신화적 배경이다. 그만큼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은 로마에 있어 큰 위기였다.
<아이네아스, 앙키세스, 아스카니우스>, 17세기 베르니니, 보르게세미술관
트로이 유민들과 트로이를 떠날 당시 아이네아스는 다리를 저는 아버지 앙키세스를 어깨에 앉히고, 아들의 손을 잡고 긴박하게 탈출한다. 아내는 뒤에 떨어져서 따라오다가 죽게 된다. 프리아모스의 딸인 그녀를 잃고 그는 항해를 시작한다. 그 방랑 기간 동안 동행하던 용사들을 잃는다. 유노의 분노 때문이다. 베누스는 위험한 순간마다 등장해서 아들을 보호한다. 카르타고를 떠나는 아이네아스에게는 여전히 죽음의 위협은 남아있다. 카르타고에 도착하기 전 죽은 아버지 앙키세스를 기념하기 위한 운동경기를 하고, 그와 함께한 용사들은 저마다 승리를 위해 바다에서 질주한다. 일리아스에서 운동경기가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물에서의 경기는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의 해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고 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쿠마이에 있는 무녀 시뷜라를 찾아가고, 저승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앙키세스는 아들에게 앞으로 그가 세울 도시국가와 미래의 일들을 알려준다. 트로이 탈출 시 앙키세스를 동행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아들의 보호자가 된다. 로마의 파트로누스(patronus 보호자)와 클리엔스(cliens 피보호자) 관계의 전통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관계의 정통성을 여기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영웅의 저승 여행은 정화(淨化)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제 6권의 저승여행은 단테의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재창조된다.
라티움의 왕 라티누스는 딸 라비니아를 이방인과 결혼시키라는 신탁을 받았다. 라티누스는 아이네아스를 보자마자 예언된 사윗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결혼을 추진한다. 하지만 라비니아의 정혼자였던 투르누스는 분노하고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실수가 발단이 되어 전쟁은 시작된다. 『일리아스』와 닮았다. 명예와 분노, 수치심으로 무구를 치켜든 많은 젊은들이 죽는다. 피 끓는 젊음은 무모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생각, 그러니까 젊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잠재우고, 의분조차 차가운 심장과 함께 식어버린다. 하지만 무엇이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의 가치는 다르므로.
아이네아스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1대1 대결을 제안하고, 부상을 입은 투르누스는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마음이 흔들리던 아이네아스는 투르누스의 몸에 둘려 있는 팔라스의 칼 띠를 발견하고는 격분하여 칼로 찔러 죽인다. 무구가 한 전사의 분노를 자극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전쟁은 분노와 증오심이 땔감이라는 것을 여러 곳에서 확인한다.
이어지는 역사는 『플루타르크 영웅전』 로물루스 편에서도 볼 수 있다. 라비니아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의 후손에게서 실비아가 태어나고 실비아와 마르스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어난다. 이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보다 쉽게 읽히고 훨씬 흥미진진하다. 호메로스보다 더 네러티브가 더 강화되어서 그렇다는 생각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 아킬레우스나 오뒷세우스는 개인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네아스는 건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다. 델로스, 페르가마, 카르타고는 그에게 있어 안주할 곳이 아니라 라티움을 향한 경유지다. 개인의 욕망을 접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고 있다. 전쟁에서도 분노를 억제하고 희생을 줄이려고 한다.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에서 볼 수 없었던 리더십을 보게 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이 책을 쓸 당시 1세기 로마는 이런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사회였다고 생각된다. 정복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다.
신탁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난관은 있다.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야 한다. 성취와 목적 지향적이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차이는 중세와 르네상스, 근대와 현대 사상의 차이로 보여 진다.
베르길리우스는 오랫동안 유럽인의 정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망구엘은 그의 저서 『독서의 역사』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예언에 사용되었던 역사를 전한다. 책 속의 글귀를 무작위로 짚어 미래를 점치는 행위다. 운명의 여신에게 봉납된 사원 몇 군데에서는 예언을 위해 베르길리우스의 시집 몇 권을 비치해 놓고 있었다. 영국의 찰스1세의 예를 들며 17세기에도 그 이후에도 이런 행위가 있어 왔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베르길리우스는 시가 가지는 모방적인 특징과, 그로 인해 시구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신호로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말한다.
트로이 전쟁과 『아이네이스』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간과할 수 없다. 헤카베, 폴릭시네, 카산드라, 크레우사, 디도 등 전쟁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거나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 여인들이다. 특별히 헬레네와 라비니아를 주목하게 된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과 전개 결말에 이르기까지 헬레네의 마음과 의사를 알 수가 없다. 호메로스는 알려주지 않는다. 라비니아 역시 그녀가 신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신 때문에 라비니움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그녀의 생각은 조금도 알려주지 않는다.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제 2의 성』에서 보부아르가 말했듯이 그녀들을 신성시 하는 것은 그저 오뒷세우스가 트로이에서 탈취한 팔라디움과 다를 바가 없다. 그녀들의 지위는 상징적인 전리품에 불과하다.
읽을 때는 수없이 이어지는 주석 때문에 지체되었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좋은데 언어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함께 토론하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래서 좋았구나 하는 의미들이 건져진다. 젊음이 통과한 바다와 경유한 섬들,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 정화되고 사라질 것들, 전망들……. 베르길리우스의 라티움을 향할 것인가? 호메로스의 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대답을 기다리며 그물 안에서 펄떡이고 있다.
“억압받던 유명한 고전 작가들은 우리와는 학교를 통해 가끔은 고통스럽게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점진적으로 우리 각자의 피 속으로 흘러 들어와 기억 속에 같은 민족처럼 자리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는 만토바나 아우구스티누스를 노래하고 있다기보다는 영국의 어느 장소나 독자의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304~305p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아이네아스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