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 강철비2를 보게 됐다. 영화 강철비22017년에 개봉했던 영화 강철비의 후속작으로 북미정상회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후속작은 전편에 출연한 배우들이 나왔다는 점만 빼면 1편 스토리와의 연결점이 전혀 없는 다른 영화로 볼 수 있을 정도다. 지난 8월에 본 영화 강철비2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확실히 더 잘 만든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는 부분과 트럼프 역할이 진중하지 않고 너무 개그캐로 갔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에 대한 입장을 떠나 한국 영화의 진일보를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리뷰에서 강철비2가 어떤 점에서 진일보 했는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다시 일어나는 일본 제국주의

 

영화상에서 나오는 반대 세력 내지는 적이라 볼 수 있는 대상중 하나는 일본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센카쿠 열도(중국말로는 댜오위다오)를 중심으로 해상분쟁을 하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을 패망시킨 미국의 힘을 업어 미국의 반공 라인으로 있으며 경제성장을 한 일본의 극우들을 통해 이들이 항상 본인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시키는 대상은 항상 조선반도(한반도)였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일본 극우세력의 막강한 파워 중 하나인 모리 신죠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80여 년 전 미국이 석유를 끊자 우리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고 여기 원폭 투하로 우리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일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번엔 경제였죠. 불과 30여 년 전 도쿄의 반만 팔아도 미국의 땅 전부를 살 수 있을 만큼 세계 경제 패권은 우리 일본의 차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린 미국에게 또 당했습니다. 플라자 합의라는 엔화의 인위적 절상을 통해 우리 일본은 이제 한국에게조차 무시당할 만큼 후퇴했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세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이것은 과거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범죄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혀 반성없는 모습의 일본과 전쟁 후 미국의 도움으로 반공의 보루로써 급격히 경제성장한 일본 그리고 미국과는 동맹이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적 야심과 관점을 버리지 않은 일본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일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 이 발언 이후 계속되는 모리 신죠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빌어먹을 양키 놈들! 우리보고 중국과 붙으라니, 이제 더는 미국놈들한테 놀아나서는 안 돼. 이제는 우리가 미국을 이용해야 돼. 미국놈들이 원하는 대로 중국과 일전을 벌일 것 같이 뜸 들여 주면서, 우리는 빼앗긴 우리의 영토를 되찾자고!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반도의 6.25까지 우리 일본이 일어설 때 시작은 항상 조선반도였다. 한국과 일전을 하게 되면 잠들어있는 우리의 야마토 정신이 살아날 것이네.”

 

영화에서 나오는 이런 대사는 현재 독도를 일본땅으로 만들고, 미국을 이용하여 중국과 영토 갈등을 벌이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한반도의 문제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영토 분쟁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역겨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사라 생각한다. 이렇듯, 한반도 문제를 접근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분단과 미중분쟁을 통해 얻으려는 계산이 무엇인지를 영화가 보여준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라 생각한다.

 

2. 영화상에 드러나는 미국 네오콘의 폭력성과 오만한 그리고 미중갈등

 

영화는 부제목으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걸어놓았지만, 단순히 북미 관계만 보는 것이 아닌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와 갈등 그리고 중국과 싸우려는 미국 네오콘들의 폭력성과 오만함을 아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현재 미국이 생각하는 한반도의 구도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 미국 일본이 북한 중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구도일 것이다. 영화는 한반도의 이런 신냉전적 구도를 무시하지 않는다.

 

특히나 초반에 보여주는 미중분쟁과 갈등을 보여줬듯이, 영화는 중국 자체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미국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군사작전 카게무샤는 미국이 어떤 나라고,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선 스무트(트럼프)를 대신하여 대통령 권한을 위임받은 부통령 조앤 마틴은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를 자기 측근에게 한다.


 

네오콘은 중국이 21세기에 나타난 나치라고 생각해. 언젠가 우리랑 한판 붙을 거라고 믿고 있지. 이왕이면 이길 수 있을 때 밟아놔야지. 안 그런가?”

 

이 대사는 현재 회고록 공개로 문제가 된 존 볼튼 같은 네오콘들 즉 북폭론자 반공주의자들이 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대사다. 또한 영화에서 언급되는 카게무샤 작전의 목적은 중국의 정권교체이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해상에서 자기들이 벌인 조작극을 중국에게 뒤집어 씌운는 것이 작전의 계획이라는 것에서도 영화가 미국 네오콘들이 어떠한 집단이고 왜 오만하고 위험한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3. 북핵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영화가 부제목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걸고 있듯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북핵 문제다. 실제로 남북 4.27회담과 제1,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항상 이슈가 됐던 주제중 하나가 북핵문제다. 영화는 북핵문제를 북한이 비핵화 해야 한다는 기본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는 다르지만, 한국 영화치고 매우 진일보한 관점으로 북핵문제를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김정은 역할인 조선사는 평화협정을 두고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소련이 망하고 남조선이 중국이랑 러시아랑 수교했던 30년 전 우리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미국에 수교를 간청했습니다. 근데 미국은 조선은 망한다고 대상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게 핵입니다. 핵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우릴 대상이라도 해 줄 테니까 대통령께서 거기 앉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거기 종이 쪼가리에 이름만 쓰면 우리 인민들이 30년 동안 썩어지게 고생해서 만든 핵무기를 몽땅 넘기는 겁니다. 근데 그거 이름 몇 자 쓰는게 그렇게 힘듭니까?”

 

조선사의 대사처럼 실제로 북한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시대사적 격동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게 수교를 간청했다. 그리고 미국은 동구권의 몰락을 보며 북한이 막연히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거기다 1994년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까지 있었다. 즉 거기서 선택한 것이 북한의 핵개발이다. 영화 강철비는 이러한 시대사적인 맥락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영화상에서 이러한 접근을 한 것은 매우 진일보한 접근이고, 관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단순히 북한 정권의 일탈행위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고, 그러한 노력들을 영화상에서 상당히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높게 평가를 개인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4. 결론

 

대표적으로 영화의 3가지 지점을 얘기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듯이, 나는 영화 강철비2를 감명깊게 봤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1편보다 더 잘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 빨갱이 영화라며 공염불에 가까운 이상한 비난을 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북한의 쿠데타라는 주제는 매우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이다. 물론 그 쿠데타라는 설정상 상당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변화와 이해관계 그리고 맥락속에서 접근하고, 북한의 입장도 상당부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영화 강철비2는 훌륭한 수작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종전협정 그리고 남북통일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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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코로나???

gta 산안드레스에서 나왔다. 오늘 게임하다가 보게 되니 참 당황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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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9-29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안드레아스가 한글버전도 있었군요^^

NamGiKim 2020-09-29 16:24   좋아요 1 | URL
정확히 말하자면 한글패치버젼이죠.
 

(이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운동에 나섰던 리영희 교수의 연설문입니다.)

 

평화 국가의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각, 며칠 동안 계속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모처럼 갖지 못했던 귀중한 이 기회에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고 아울러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를 이라크에 절대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합법화하려고 선전한 사항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학무기와 그밖에 유엔 안보리가 결정하고 제재를 가할 만한, 미국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짓된 주장과 요구를 몇 달에 걸쳐 심의한 결과도,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 결과도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번 전쟁은 침략전쟁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국가들의 행동 규정을 결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헌장, 이 모든 것을 미국은 위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은 명백한 침략 전쟁입니다.

 

, 파병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유엔 헌장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국제 관계에서 국제 행동은 유엔 헌장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또 우리 헌법에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명백한 조항이 있습니다. 파병은 이것에 대한 위반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국가인 만큼 유엔 정신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 결의가 없는 미국의 불법적 전쟁 행위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유엔 헌장 위반이며 대한민국의 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겁니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파병 지지 세력들은 파병이 한-미 동맹 관계에 바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1954년 발효된 것으로, 이 방위조약에는 분명하게 군사행동에 대한 제한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동맹이라 해서 모든 군사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나 그 연배 분들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의 군사 행동에 관한 한미방위조약에 관한 강의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그 전문에서 상호 군사 행동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1.파병은 오히려 한미 방위 조약 위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도, 미국이 한국을 도와도 그것은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어야만 정당화됩니다. , 그 지역은 태평양 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명백한 군사 행동이 없었는데도 대한민국이 한미방위조약에 입각했다고 착각하고 미국의 군사공격에 지지를 보낸다면 한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방위조약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적 수단을 다했습니까?

 

, 국제 관계에서 유엔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 위협이나 무력 공격을 삼간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에 위배되는 이라크 공격은 한미방위조약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무력 공격을 해 왔습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손가락질 하나 한 일이 있습니까?

 

이라크가 아시아에 있습니까? 극동 지역에 있습니까?

 

이라크가 선제 공격을 했습니까? (청중들:아니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지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이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허황된 논리로 파병을 결정하려 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섯째,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고 상시적으로 5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갈 때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민국 군대를 베트남까지 끌고 갈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취했냐 하면 남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독자적으로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하는 군색한 방식을 썼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이 미국 요청 없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는 엉터리들이 있는데,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근거가 없으니까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요청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동맹 국가는 다른 동맹 국가의 전쟁에 무조건 참전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 때 영국은 군대를 포함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이 하도 요청하니까 급기야 의장대 6명을 보냈습니다. 사이공 공항에 의장대를 세워 놓고 마치 영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인 양 쇼를 한 겁니다. 영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할 것을 마셜 플랜을 비롯한 미국의 원조로 살아난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핏줄인 영국은 우리 나라보다도 더욱 대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장대 6명만을 보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 이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획득하는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살인·강도의 방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의 선량한 국민들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시장을 개척하고, 석유 이권을 챙기는 것을 원하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도·살인, 절도·강간·파괴·방화 이런 방법으로 번 돈이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여덟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를 해결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지지했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세력에게는 미국의 이익이 행동 규범입니다. ‘동맹 국가의 희망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부시 정권의 고려사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부시 정부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부시 정권의 철학과 정책과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입니다.


 

아홉째,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높은 민주 의식과 도덕성을 갖췄습니다. 세계인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파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자주적이어야 합니다.

 

열번째, 대한민국의 전투병을 이라크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말로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될 가장 위험한 직책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고 조선인들이 경비병 노릇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몰려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습니다. 포로 수용소 경비는 1급 전범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미국의 행동 규범

 

열 한번째, 우리가 왜 12억 아랍 인구를 적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의 적을 새로 만들어서 국제 외교에 지장을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열 두번째, 국내 반공 수구 세력, 미국의 말이라면 뭐든지 무조건 따르는 일부 수구 세력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 세번째, 노 대통령 자신이 취임 전과 취임 후에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한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가지겠다 해서 여러분들은 아마 이 정권에게 표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함으로 해서 대한민국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열 네번째, 이번에 파병하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국민은 미국에 더욱 예속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국처럼 취급받아 왔는데, 이번 파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킬 겁니다.

 

끝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놓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대북 적대 정책에 무슨 근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미국은 우리의 요구와는 반대로 행동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를 파병해야 할 비밀 협약이 있는가? 한미방위조약 이외에 그것을 백지화하는 미국과의 비밀 조약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과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마땅히 그것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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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2020-09-25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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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9-25 15:1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20-09-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교수님 연설보다 몇 달 전이 되겠네요.
시사저널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686

NamGiKim 2020-09-25 18:50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댜.^-^
 

수백 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은 1853년까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그러던 중 이해에 미국 매슈 C. 페리 제독이 에도만으로 들어와 대포로 위협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문호를 개방해 근대 국가로 유도했다일본인들은 페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55

 

에도막부를 거치며 이른바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은 2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변국들 일부를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일본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 하지 않던 2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구반대편에선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유럽인들은 소위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고 부르던 곳에 가서 정착 및 이주를 시작했고, 1776년 미국에선 독립혁명이 일어났으며, 1789년 프랑스에선 자유평등우애라는 가치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또한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 정복에 나섰으며(물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났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선 소비재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건설이 일어나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과 과학 생산의 발달과 더불어 유럽을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은 자본주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생산력을 보여줬으며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다또한 군사력의 현대화도 이루어졌다그러나 자본주의의 활성화는 소수의 상류계층이 중심이 된 착취를 의미했고자본은 노동자들을 하층화 내지는 비인간화시켰다그와 동시에 산업혁명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 있었다그게 바로 제국주의(Imperialism)’이다영국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값싼 원료를 제공받고자 했고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했으며필요에 따라선 총과 칼을 동원했다나폴레옹 황제가 잠자는 사자에 비유했던 중국(당시는 청나라)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으며무굴제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도는 영국의 독점기업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전부다 이런 과정을 거쳤고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당연히 일본은 국제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무감각했으며태평한 나날을 보냈다그러던 1853년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미국이 들어온 것이다미국은 신생국가였지만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다어쩌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1853년 6월 3(양력으로는 7월 8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 소속의 군함 4척이 일본 에도만의 우라가 항에 나타났다. 1852년 3월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은 페리 제독은 그해 11월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 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하여 7월 8일 우라가 항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 페리 제독은 미영전쟁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해리의 동생이다. 그 또한 전쟁영웅이 될 형을 따라 1812년 미영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페리는 1850년대 군함을 이끌고가 일본을 개항시켰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관리들에게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이는 당연히 10년 전 영국이 청나라에게 했던 방법과 비슷했으며만일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도 같이했다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현대식 군함 4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제독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페리 내항 사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각 지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이 과정에서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취한 반면조정과 다이묘들은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는 양이론을 내세웠다. 1854년 1월 페리 제독은 이번엔 7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 만 안으로 다시 입항하여 답변을 재촉했다결국 막부는 페리 제독의 요구를 수용하여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 들어온 미군 군함, 미국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산업혁명과 자본주의화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길렀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국 군함)

 

미일화친조약 체결로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하지만 미국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가 제한적 개방에 불만을 갖고 통상의 자유화를 주장하면서해리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막부는 1858년 7월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정식 조인했다이 조약으로 일본은 개항장을 다섯 개(요코하마하코다테니가타고베나가사키)로 늘리고무역의 전면 자유화 및 협정 관세 채택외국인에 대한 영사재판권 인정하게 됐다또한 막부는 네덜란드와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개국을 한 일본이 서양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일본에 입항한 페리 제독과 그의 병사들)


(개항한 일본의 도시를 나타낸 지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칙허(임금의 허가함)의 문제를 계기로 일본은 정치적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막부는 통상조약 체결을 결정했고천황에게 칙허를 요청했는데결정적으로 고메이 천황이 이를 거부했다물론 막부는 천황의 의견과는 별개로 통상조약 조인을 강행했다개항을 하게 된 일본이 겪어야 했던 문제는 바로 경제적 문제였다개항으로 인한 수출 급속 증대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물가가 폭등했고물가상승으로 인한 하급무사와 서민의 생활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어졌다거기다 미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여기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이런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1860년 해리스 통역관이 사쓰마번의 낭사(浪士)에게 살해당했고, 1861년 도젠지의 영국 임시 공사관이 습격당하기도 했으며영국 공사관이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불태워지기도 했었다.

(일본이 미국에 보낸 사절단, 1860년 일본은 미일수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을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은 그들이 서양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860년 이른바 신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그해 4월 4일엔 수도 워싱턴의 미국의회를 방문했었다. 1861년 말 일본은 개항연기 교섭 담판을 위해 다케우치 사절단이 유럽에 파견되었고이들은 1862년 5월 24일 네덜란드 의회를 방문했으며여기 수행원 중 한 명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프로이센 의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1863년 12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케다 사절단이 파견됐고이들은 1864년 7월에 귀국했다막부 말기부터 일본은 서구 열강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고이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 따라 근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에도막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변화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 열강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막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막번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구상으로 공의정체론이 부상했고서양세력의 침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이 필요성을 깨달았다이 과정에서 막부와 반막부세력으로 나뉘어 1860년대 일본은 이들의 격동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1867년에 들어 막번체제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12월 반막부 세력은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하여 천황의 궁정을 장악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울 발표했다이에 따라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었던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렸다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었고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이른바 서구화 및 탈아입구(脱亜入欧だつあにゅうおう)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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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6 6일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미군은 파죽지세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해 나갔고그해 8월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합동작전을 벌여 수도 파리를 해방시켰다프랑스 파리를 해방시킨 연합군은 네덜란드로 진격하기 위해 1944 9월 이른바 마켓가든 작전을 개시했다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라인강의 교량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그해 10월 영미 연합군은 독일 국경근처까지는 도달했지만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많은 전투를 치렀던 연합군은 휴식 상태에 들어갔기에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벌지 전투 당시 독일군 진격도)


(아르덴 숲, 벨기에에 위치한 아르덴 숲은 침엽수림이 빽빽한 숲으로 전차가 다니기에는 부적합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의 진격을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던 히틀러는 서부전선에서의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발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벌지 전투였다독일에게는 아르덴 대공세(Ardennes Counteroffensive)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아돌프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감행하는 대공세였다쉽게 말해 독일 측에 있어서 서부전선의 생사가 걸린 마지막 도발이었다. 1944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이른바 아르덴 공세를 취하기 위해 준비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동프로이센에 있는 전시 본부 늑대의 성채에서 머물던 히틀러는 12월 7일 최종 공격 안을 승인했고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서부전선의 독일군대는 최종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944년 12월 15일 당시 벨기에의 숲을 따라 형성된 아르덴 전선에는 6개의 미군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이 가운데 3개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부터 여러 전투를 치르며 지쳐있는 상태였고다른 3개 사단은 새로 배치된 부대였다이 지역의 전선은 1944년 10월부터 거의 2개월간 양측 모두 휴전상태에 들어간 상태였고, 12월엔 추운 겨울까지 맏이하여 양측 모두 다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따라서 영국의 전쟁영웅(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쥐라고 불림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 지휘했던 아이젠하워도 아르덴 숲에서 독일군이 대공세를 감행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거기다 벨기에의 침엽수림인 아르덴 숲은 독일군의 주력 군대인 전차가 다니기엔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었기에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토이펠 장군, 만토이펠은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 측 장군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아르덴 전선에서 공격을 준비했던 독일군은 25만 명의 병사와 수천의 전차와 장갑차로 이루어진 3개 군이 공격 개시 지점으로 이동했고이 부대들은 12월 15일 자정 공격 지점에 집결했다집결한 독일군은 야전원수 룬트슈테트와 동부전선에서 활약했던 발터 모델 장군 그리고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발터 폰 만토이펠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1944년 12월 16일 아르덴 전선에 집결한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됐다공격을 감행한 독일군은 1940년 이른바 서부전선 전역에 걸쳐 감행했던 전격전(Blitz Krieg)을 감행하여 휴식상태에 있던 미군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의 티거 전차, 티거2로 불리는 이 전차는 미군의 주력전차인 M4 셔먼전차를 매우 손쉽게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전차였다. 티거의 활용으로 미군 기갑사단은 물량에 의존하는 전술로 맞섰다.)


(벌지 전투 당시 진격하는 독일군, stg 44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저항하던 미군은 결국 거센 공격에 밀렸고아르덴 지역의 북부전선은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2개의 기갑사단을 지원부대로 급파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독일군에게 돌파 당했다북부전선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기뻐 날뛰며 12월 18일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독일 군대가 디시 진격하고 있다크리스마스까지는 지도자에게 다시 안트베르펜 시를 선물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독일군의 진격이 벨기에의 도시 바스토뉴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르덴 공세의 소식은 프랑스 정부에게 다시 한 번의 공포를 각인시켰다왜냐하면 4년 전 경험했던 1940년의 경험을 절대로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벌지 전투가 격렬해지자미군 사령부는 자신들의 최정예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는데그게 바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온 101 공수사단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장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아이젠 하위는 벌지 전투에서도 미군을 지휘했으며 전쟁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1953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독일군이 목표로 노리던 벨기에의 바스토뉴는 101 공수사단이 투입되었지만독일군의 격렬한 포위를 받고 있었다바스토뉴를 대상으로 한 포위전에서 독일군은 맹렬한 포격을 이 도시에 퍼부었다여기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들도 독일군 포격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바스토뉴에서 포위전이 격렬해지자독일 측은 미군에게 항복요청을 보냈다독일측의 항복 요청에 대한 미국의 맥컬리프 준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Nuts!’, 즉 우리말로 하자면, ‘미친놈!’, ‘또라이!’, ‘개념 상실!’을 뜻했다맥컬리프의 이런 반응은 항복 요구를 보냈던 만토이펠과 같은 독일군 장성들을 화나게 했지만미군 지휘관과 사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스토뉴 포위전 당시 101 공수부대 대원들, 이는 2001년에 나온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잘 묘사되고, 콜오브듀티 유나이티드 오펜시브와 콜오브듀티 WWII에서도 잘 묘사된다.)

 

독일측 항복 요구가 있던 다음날 날씨가 좋아지면서 미군의 C-47 수송기가 바스토뉴에 포위된 병사들에게 보급 물자를 대량으로 공급했다공급 물자를 받은 부대는 다시 반격에 나섰고어느 시점에서 전세는 다시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있었다바스토뉴를 포위했을 때만토이펠의 전차부대는 그 지역을 점령하려 했는데사기를 회복하고 지원병력과 물자보급까지 받은 미군의 반격을 받은 만토이펠은 바스토뉴를 점령하지 못했다거기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패튼 장군의 미군 기갑사단이 대량으로 진격하면서 만토이펠의 독일 전차부대들도 분쇄되었다.

(반격하는 미군 공수부대,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 미군은 독일군에 맞서 반격에 나선다.)


(전선을 사수하는 미군)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서 벌어진 전투는 결국 미군의 승리였고 12월 26일은 벌지전투의 전세가 완벽히 연합군쪽으로 역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일 뒤인 12월 28일 벌지 전투는 다시 한번 전개되었지만그 다음해인 1945년 1월 17일 패튼 부대에게 완벽히 궤멸당했던 만토이펠 군대가 철수 하면서 벌지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2개월간 지속된 벌지 전투는 양측이 붙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고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미군 또한 꽤나 많이 전사하여 전사자가 대략 2만 명 가까이 됐다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음에도 패배했던 이유는 미군의 보급력 때문이기도 했지만독일군을 지휘해야할 전투 장교들의 부재이기도 했다왜냐하면 독일군의 많은 장교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전략전술의 문제도 들 수 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군 진격의 대명사였던 전격전은 이미 연합군이 전략상 간파한 상태였다즉 벌지 전투는 독일군의 이런 모순들이 겹치고히틀러가 승리하겠다는 개인적 욕심이 겹치며 패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결국 벌지 전투 패배 이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더 이상 반격하지 못했고이것은 제3제국의 몰락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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