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과 광장 2020.5
현장과 광장 편집부 지음 / 현장과광장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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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올해 7월에 노동전선 단체 전선지에 실린 필자의 서평입니다.)

2020년인 올해는 미국과 이란간의 긴장관계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우리사회의 모든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COVID-19라 불리는 질병이 창궐하는 속에서 우리 일상생활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많은 문제와 위기를 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경제공황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중이고, 우리사회의 마비시키고 있다. 이 전대미문의 생물학 질병은 백신이 나오지 않았기에, 어느 한 구역에서 전파되면 그 구역을 전면 봉쇄하고 사람들까지 격리시키는 조치에 들어가고 있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공포와 마비로 몰아넣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즘 노동전선에서 발행한 아주 좋은 책을 읽게 됐다. 바로 ‘현장과 광장 2호’다. ‘현장과 광장’을 읽으며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됐다. 여러 사람들의 글을 다양한 주제로 묶은 이 책을 통해 과학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었다.

책의 시작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것이었다. 박하순 선생의 ‘코로나 공황’과 노동자운동의 대응과 손미아 선생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대유행을 통해 본 자본주의 모순과 대안이라는 두 글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자본주의의 문제는 참으로 잘 분석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있다. 대다수의 나라들이 타국민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면서 항공기는 계류장에 멈춰서 있고, 관광객들을 받던 호텔은 사람들이 오지 않으며, 올해 국내에서 계획된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대량의 실업자 발생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움직이는 행위를 평소보다 줄이게 되니 아마존(amazon)과 같은 인터넷 운송 및 배달 사이트들은 추가적으로 채용하는 일이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 3~4월 기준으로 최소 4주 동안 2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즉 자본주의는 질병뿐만 아니라 인민대중의 직장을 보호하기 보단 기업의 이윤을 보다 더 우선시하는 체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에서 나온 고희림 시인의 ‘돈으로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시는 참으로 가슴이 아픈 시였다. 노동이라는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와서 저임금 고착취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비유되는 네팔에서 온 테즈 바하두르 구릉씨나 처빌 랄 차우다리씨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노동현장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아가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노동자들은 그런 현장에서 청춘을 바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일자리 갈취’ 따위의 저급한 시각이 대다수를 차지할 뿐이다. 역지사지라 했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 해외로 가서 저임금 고착취를 당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나가던 한국인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노동은 누군가는 회피하는 행위이지만,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소위 히틀러의 나치즘이 강요하던 시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저개발 국가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고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들을 착취함으로써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19세기 고도의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식민지에다 값싼 원료를 팔아 경제를 부흥시킨 제국주의 국가를 연상시킬 수 있지 않을까 즉 자본주의 사회 또한 그런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책에서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주제 중 하나는 ‘페미니즘(Feminism)’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필자의 경우 현재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매우 이슈가 되면서 쉽게 판단하지 못했던 주제였다. 이것이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이나, 성폭행, 미투운동 등이 얘기가 나오면서 쉽게 얘기하기가 힘든 주제였던 것 같다. 노동전선의 천연옥 선생이 쓴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은 여성해방과 현재의 페미니즘이 어떠한 차이가 있고, 과거 여성 해방운동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그리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까지 그들의 주장과 생애를 통해, 현재 남성의 생물학적인 영역으로만 주로 비판하는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노동계급과 남성노동계급의 연대와 자본주의 철폐투쟁을 외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여성해방론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2019년 11월 기준으로 ‘남녀 고용형태별 임금격차’를 보면 남자 노동자 임금이 100이면, 여자 노동자 임금이 70.7%,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100이면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이 62.9%, 남자 정규직 임금이 100이면 남자 비정규직 임금이 62.1%, 여자 정규직 임금이 74.1%면 여자 비정규직 임금은 52.3%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단결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해방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현재 사회에서의 여성억압의 기원이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한 남성의 지배가 아닌, 사적소유의 발생·발전에 따른 사회의 경제적 관계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철폐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아무튼 이 글을 통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감명 깊게 읽은 글을 얘기하자면, 송필경 선생의 ‘쿠바와 체 게바라’다. 2년 전 글쓴이가 쿠바 여행을 통해 본 쿠바 사회는 비록 가난하지만, 참으로 아름답고 역동적인 사회다. 수백 년 동안의 스페인 식민지배와 수십년간의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복지를 달성한 쿠바사회는 소위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유럽이 해내지 못한 것들을 비록 미약하지만 달성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엇보다 국제주의라는 사상으로 무장한 쿠바의 의사들은 단순히 자본에 혹한 의사가 아닌 인류애적 혹은 의사적 사명을 가지고 인민의 아픔을 치료하는 휴머니스트라는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쿠바가 미제국의 극심한 경제 고립을 겪고 있지만,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키고 실행해온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는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점에서 시사해주는 부분이 많다.

그 외에도 이 책을 통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백철현 선생의 ‘무정부주의의 정치적 본질과 이 본질로부터 나오는 반혁명적 특성들’이나 김성구 선생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등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부분에서도 책을 통해 학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담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얻어야할 결론은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자본주의를 철폐한 사회를 이룩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보여주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맹아나 다름없는 미국은 현재 열악한 대중의료로 인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확진자가 올해 3~4월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현재 200만 명을 돌파했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사망자도 급증하여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한 미국인은 10만 명을 넘어섰다. 거기다 이런 전 세계적 위기속에서 미국은 인종주의라는 문제도 겹처 수많은 유색인종들과 양심 있는 미국인들의 반발에 둘러싸여 있다. 미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는 앞으로 나아가야할 사회의 문제들을 야기하고 확산 그리고 재생산할 뿐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철폐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고질적인 문제점을 인식하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투쟁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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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닌 친일파와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일 뿐이다

 

이승만그는 총 90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던 1875년 조선 후기에 태어나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3공화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감행하던 1965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했다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1960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이승만 동상, 2010년대에 이승만을 맹신하는 광신도 집단이 기어이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한 스티븐슨 처단 사건의 변호를 교민들로부터 부탁받았던 이승만는 기독교 정신따위를 내세우며 이를 거부했다. 1910년대 하와이에서 머물 당시 그는 일본에 적대적인 교육을 하지 않았으며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대신 조선의 통치를 해야한다는 위임통치론를 주장했었다. 1919년 이승만은 기호파의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자리에 오른 그는 임시정부 분열의 상징이었으며, 1925년 탄핵 당했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돈줄을 위해선 살인과 협박 폭력도 일삼았으며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가 단행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 이승만은 주제넘게 망발을 했으며미국에게 빌붙어 활동했던 것 외에는 사실상 독립운동사에서 한 것이 없었다이승만은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혐오했다자신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미국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맹신적으로 따른 것이다그의 극단적이고 폭력과 증오가 점철된 반공주의적 성향은 해방 이후 그가 친일세력과 결탁하며 민중을 대상으로 했던 온갖 폭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심어놓았으며대구 10.1 항쟁제주 4.3 항쟁여순민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국민보도연맹학살에서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승만을 찬양하는 유튜브 방송, 뉴라이트를 포함한 이들은 지금도 대대적으로 그를 미화하는 영상을 양산 및 재생산 해내고 있다.)

 

이승만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를 것이 없는 광란의 학살자였다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 학살로만 죽은 민간인이 최소 30만 명을 넘어섰으며전쟁 중 청년단과 군경의 보복으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까지 합치면 최대 10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이런 광란의 학살극은 이승만이 항상 내세웠던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합리화 됐고이승만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죄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배신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회주의자들을 더 증오했다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애국자로 생각했고사회주의자들을 민족반역자로 생각했다따라서 그의 사회에선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조봉암은 간첩 내지는 민족반역자로서 생을 마감했지만,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악질친일경찰을 지냈던 노덕술은 애국자로 칭송받았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한반도 이남에 만들어낸 아주 모순적인 구조였다. 1960년 마산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바다에 빠뜨려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경찰 책임자도 일제시절 악질친일 경찰이었고조봉암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형장의 이슬로 보낸 판사도 친일경력을 가진 판사였다.

 

대한민국 사회가 친일세력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유에는 그들을 애국자로 둔갑시켰던 이승만이 있다결과적으로 친일파 청산 실패와 광란의 민간인 학살극은 이승만이 주도했다이처럼 이승만의 행적에는 무수히 많은 과오들이 존재한다그러나 아직도 일각에서는 친일파의 아버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따위의 용어로 미화하고 합리화시킨다이승만을 합리화시키는 이들의 수법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하다이들은 이승만이 생전에 저지른 악행들을 자유민주주의’, ‘반일애국투사’, ‘부자나라 한국 가난한 나라 북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국충정’, ‘좌익소탕’, ‘공산화 방지’ 따위의 용어로 각색을 하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운다.

(남한과 북한의 지도, 이러한 지도는 소위 극우들이 남한 우월주의를 내세울때 많이 사용된다. 근데 이 사진은 역으로 한국은 24간 내내 불이켜져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도리어 이게 인민들 건강에 무조건 좋다고 얘기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정리하자면 뉴라이트를 포함한 친일친미 제국주의자들이 이승만을 내세우는 데에 가장 큰 논리의 핵심에는 경제가 있다즉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기에 부유한 나라가 됐고반면 이승만이 싫어하던 공산주의 나라 북한은 사회주의를 선택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됐으며세계최악의 빈곤국이 되었다는 논리 말이다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남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했을 때과거 1960년대나 70년대와는 달리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훨씬 압도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것이 남한사회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증거로는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그리고 북한이 못산다고 해서 실패한 국가라 보는 것도 지극히 우월주의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19세기 서구열강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을 보듯이 말이다어떻게 보자면 제국주의 논리의 판박이다.

 

추가적으로 얘기하자면 현재 한국사회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재난지원금이나 무상에 가까운 코로나 관련 진료를 하는 것은 절대 이승만이 추구했던 사상이 아니다아니 오히려 이것은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사회주의적인 복지원리를 일부분 받아들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즉 이승만의 자유주의적 사상대로 하자면 현재 우리는 코로나 시국에서도 자비로 치료받고돈 없으면 병 걸려 죽어 마땅하다재난지원금도 마찬가지다이승만식 자유주의 논리라면 재난지원금도 받아선 안 된다그런 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거니까하지만 현재 재난지원금을 안 받거나 코로나 걸렸을 때코로나 무상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뉴라이트 세력들은 거의 없다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식 자유주의 사상이 얼마나 끔찍한 사상인지 알 수 있다.

 

뉴라이트 세력들이 이승만을 치켜세우며 소위 경제의 논리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정통성이라는 문제가 있다왜냐하면 이승만 정권 자체가 북한과는 달리 친일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정권이었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 북한은 근현대사를 얘기할 때 자신들의 항일 정통성을 얘기하는 반면남한의 뉴라이트 세력들은 경제와 자본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다이들이 내세우는 경제적 논리는 매우 천박한 논리이다경제력은 그 나라가 얼마나 돈이 더 많은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그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그리고 이런 경제적 논리 자체는 제국주의에 긍정적인 뉴라이트들이 가지고 있는 아제국주의적 요소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 관련 여론조사, 충격적이게도 찬성이 64%나 나왔다. 참고로 이승만도 해외 파병을 좋아했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영국과 미제국의 수에즈 운하 폭격때 군대 파병을 얘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신처럼 모셔 받드는 뉴라이트들은 미국하면 껌뻑 죽는다마치 이승만이 미국하면 모셔 받들었듯이 말이다이들에게 있어 미국은 단순히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원의 나라다그래서 마치 기독교 신자가 예수를 맹신적으로 떠받들 듯이 그들 또한 미국을 맹신적으로 떠받든다이들에게 있어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탄에 가까운 빨갱이고 좌익분자일 뿐이다즉 미국은 비판해서는 안 될 신성한 영역에 가까운 것이다그래서 현재 뉴라이트들은 올해 호르무즈 해협 파병때, “이란 파병 적극지지” 따위의 집회를 열었고이란 전쟁 반대 집회를 종북 빨갱이로 몰아갔다이들이 미국을 이렇게 까지 떠받드는 것은 그만큼 이승만의 사상과 정신을 신봉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얼굴의 이승만, 친일인명사전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승만의 진실을 아주 낱낱이 잘 파해친 영상이고, 많은이들에게 시청을 권하는 명작이다.)


(독부 이승만 평전,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평전이다. 이 책 또한 이승만의 진실을 아주 낱낱이 파해쳤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썼다. 많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친일파와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일 뿐이다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닌 친일파의 아버지였으며신제국주의 미국을 신봉하는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였을 뿐이다해방 이후 미국과 결탁하여 친일세력을 등용하고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이승만의 후예가 바로 뉴라이트와 같은 극우세력들이다이번에 이승만 악행사를 연재했던 이유는 이들이 추종하는 이승만의 실체를 낱낱이 알리기 위함이었다이승만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무수히 많은 그의 악행들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2018년 독재자이자 파시스트인 프랑코의 묘가 파였듯이이승만 또한 후세대에게 그런 준엄한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이제 이승만 악행사의 연재를 마치도록 하겠다.

 

그 동안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함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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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0-08-29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

NamGiKim 2020-08-29 17: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조만간 다른 주제를 연재시리즈로 올릴 생각입니다.^-^

청아 2020-08-29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기대되네요! 많이써주세요^^👍

막시무스 2020-08-29 2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꾸준하게 하나의 주제로 밀고 나가시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음 주제도 기대 잔뜩할께요!ㅎ

NamGiKim 2020-08-29 23: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주제는 천천히 결정하겠습니다. 사실 연재하는게 쉽진 않아요. ㅎ

행인96 2020-09-0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간 고생많으셨습니다 :)

NamGiKim 2020-09-02 2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조만간 또 다른 주제를 연재할 겁니다.ㅎ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종북좌파? 와 우방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이란에 파병하는 종북좌파가 이세상에 어디있냐? 그 세 사람에게 종북좌파라 하는거는 그냥 논리고 뭐시기도 없는 매카시즘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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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8-2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리고 영화 강철비2에서도 스무트한테 아부하는거 봐봐. 이게 한국 대통령의 본 모습이지.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와 그의 죽음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이후 시민들은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

 

1960년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이것은 이승만 개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절대 아니었고, 4.19 혁명에서 수많은 민중이 피를 흘리며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그로부터 2일 뒤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역사속에서 사라졌고이승만은 그들이 죽은 현장을 직접 가서 참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고 경무대를 떠나 걸어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 동상 철거 소식을 전한 대한뉴스)

 

1960년 4월 27일 국회의 결의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발표되자 허정 외무장관이 자동적으로 대통령 서리에 취임했다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들어서고 허정 과도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새로운 발걸음이 생겨났다이승만 숭배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던 이승만 동상은 민중의 손으로 무너져 내렸다. 1948년 여순민중항쟁 때나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4.19 혁명 이후 극심한 반공 체제에 도전하며 통일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운동도 출현했다기존에 이승만 반공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정복주의적 비젼인 북진통일론에 대립되는 통일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가라 북으로오라 남으로!”였다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은 자립적 경제 발전을 원하기도 했고이는 종종 반미 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으며반제국주의적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했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당시 남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 혁명 이후 시민들 중 일부는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북진통일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일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장면, 장면은 이승만 정권 당시 야당에서 활동하며 그와 경쟁했다.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이끌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해방 이후부터 만들어 놓은 반공주의적 토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당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동상에는 대대적인 헌화가 쌓였었다또한 이승만 정권 이후 등장한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억누르고자 했다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에 들어선 장면 정부 또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반공사상에선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하야한 지 1달 3일 만에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동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였고이것은 이승만 인생에 있어 마지막 망명길이었다이승만은 정말 마지막 까지도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이승만은 4.19 혁명과 자진하야 그리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12년간 저지른 온갖 악행과 폭정 그리고 4.19 혁명에서 일어났던 사상자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마치 한국전쟁에서 거짓방송을 해놓고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960년 한국과 북한의 경제 차이,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앞섰지만 당시 한국은 북한 경제 규모에 두배나 더 작은 규모였다.)

 

이승만이 떠난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곤은 4.19 혁명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이승만의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남한보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보다도 훨씬 경제력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전후재건에 착수했고, 1956년에는 소위 천리마 운동이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여 경제성장과 전후복구에 성공해냈다또한 북한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경제원조도 받았다. 1960년 당시 북한의 경제규모는 세계 50위에 오르게 되었지만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보다 2배나 작은 101위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를 세워 반공보루를 강화하려 했던 미국의 반소련 반공정책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실제로 미국은 4.19혁명 이후 가난한 한국인들이 북한으로 흡수되는 것을 원할까봐 매우 노심초사했고 두려웠다그러던 1961이승만이 하와이에 망명한지 1년이 되던 해 한국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과거 이승만에 반대했던 일부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바로 5.16 쿠데타였다이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바로 박정희(Park Chung-hee, 朴正熙)였다. 5.16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는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하지 않던 일이었다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었다거기다 박정희는 일제시절에는 만주육사에서 소위로 지냈던 친일경력이 있었고해방 후에는 남로당 경력도 있었으며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도 세웠었다.

 

현재 이승만 세력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박정희는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었다그는 이승만을 부패한 권력자 혹은 독재자로 생각했으며그는 18년이라는 세월을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그가 이승만을 대신해서 국가적으로 높게 평가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바로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였다거기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은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고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이승만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그 대안으로 백범 김구를 민족영웅 혹은 독립영웅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높게 평가했다또한 이승만이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틈을 타 귀국하려고 하자이를 막은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즉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의사를 수차례 거부했다.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이들은 5.16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초기에 약속했던 공약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유지했으며, 이승만 보다 더 긴 18년간 군림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지만이승만이 그렇게 강조하던 한가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애초에 5.16 쿠데타를 할 시점부터 박정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겠다고 명백히 입장을 밝혔었고과거 그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던 존F케네디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미국까지 갔었다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 시절의 반공주의를 사회적으로 더 체계화 시켰다박정희에게 있어서도 이승만식 반공주의는 사실상 정치생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찍은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하와이에 망명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 이승만은 점차 늙어갔다. 1962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하와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이승만은 반수(半睡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사실상 산 것도,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이다어쨌든 그는 하와이에 망명하여 거의 칩거하면서 살았다그가 반수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은 산삼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이승만이 병상에 누워있던 1964년 이승만이 매우 아끼고 좋아하던 인물이자 극단적 반공주의자 맥아더가 생을 마감했다맥아더가 사망한지 2달 후인 1964년 6월 말 이승만은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졌다그는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의 헌신적 내조를 받았기에 비교적 건강했지만무엇보다 박정희가 귀국을 거절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즉 1964년 6월에 그가 쓰러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그는 결국 서서히 죽어갔다그러던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했다그의 나의 90이었다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죽은 7월 19일은 사실상 그가 없애고자 했던 해방정국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괴한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장례식, 이승만의 귀국요청을 수차례 거부한 박정희는 그가 죽자 귀국을 허락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높게 평가한 것 처럼 얘기하며 그 근거로 장례식에서 박정희가 읽은 추도문을 예시로 들지만, 사실 그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표면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보인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2020년에 열린 이승만 추모제, 이승만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가 죽은지 55년이 지났음에도 그를 여전히 미국의 조지 워싱턴 마냥 건국의 아버지로 찬양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이 죽자 결국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마침내 허락했다이승만의 유해는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됐다특별기가 한국에 귀국하자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이승만은 4.19 민중혁명으로 한국에서 쫒겨난 대통령이었다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지 않았고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귀국하려고 했다그는 미국유학시절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전혀 반성하지 않았으며계속해서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국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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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과 이기붕)

 

이승만 정부는 정치 분야에선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 독재의 길로 가고 있었고경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 경제원조로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미국의 경제원조는 1957년 3억 8,289만 3천 달러에서 1958년에는 3억 2,217만 2천 달러로 감축되었으며, 1959년에는 2억 2,220만 4천 달러로 거의 1억 달러 가까이 삭감됐다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감축되자 즉각적으로 한국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은 정치경쟁자 조봉암을 사법살인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또한 그는 여전히 건강한 편이었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이라 하여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이것은 여순항쟁 이후 10년만에 새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사실상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수단이었다이들은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에는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이들이 제출한 새 국가보안법에는 1.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2.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3.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여기에는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을 가속화하려는 이승만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의 백남훈조병옥곽상훈장택상 등을 포함한 민주당과 무소속의원 95명은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물론 이승만의 자유당 측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장택상을 회유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을 붕괴시키고자 했다자유당 정부는 신국가보안법 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00명을 임시 경위로 특채하고,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이승만과 자유당의 목표는 오로지 ‘1960년의 재집권에 있었다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959년 3월 가장 충직하다고 믿는 최인규를 내무장관으로 하고재무 송인상부흥 신현확농림 이근직교통 김일환을 각각 국무위원에 기용했다또한 그들은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 5일전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의원만으로 3분만에 법사위에 상정한 것을 처리하는 변칙을 연출했다당연히 야당의원들은 이에 반대했고국회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이럴걸 예상하고 있던 이승만 세력은 훈련시킨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했다박순천김상돈허윤수김응주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이기붕은 자유당 집권 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과 자유당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지만야당은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1959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이 선출됐다이들은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했다당연히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을 내세웠다하지만 민주당은 여기서 큰 타격을 받았다. 1956년 신익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급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병옥 후보의 사망, 그의 죽음으로 다시한번 민주당에게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1959년 12월부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피로가 겹치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결국 1960년 1월 29일 조병옥은 치료차 도미하게 됐다조병옥이 도미하자 자유당은 선거 시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할 것을 2월 3일에 전격 발표한다. 1960년 2월 조병옥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다수술 후 경과도 매우 좋은 편이었고주미대사로 있던 양유찬이 문병을 와서 담소를 나눌 정도였다하지만 2월 15일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쾌유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6일 뒤 조병옥은 김포공항에 무언의 환국을 했고운구행렬에는 시민들이 뒤따라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4년 전에 그랬듯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됐다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된 장면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에 1/3의 표를 주지 말고 재선거를 실시하자라고 하며 유권자에게 호소했다이런 상황속에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를 위해 온갖 음모와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바로 부정선거였다.

 

1960년 2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에게 내렸다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기권표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한 표 중 합계 유권자 4할에 해당하게 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개시 (오전 7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 (소위 4할 사전투표)

 

2.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하는 유권자로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투입토록 할 것. (소위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3. 자유당 유권자로 하여금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투표케 함으로써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화하여 야당 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토록 한다.

 

4.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 못하게 하거나그것이 불여의할 경우에는 변기를 투표소 내에 가지고 왔다는 등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3.15 부정선거 개표)

 

이 지령문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지만정부와 여당은 이것을 오히려 야당의 날조라 공격했고그들에게 충성하는 어용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3월 15일 투표가 실시됐다예정대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자유당의 부정선거의 핵심은 4할 사전투표로 3인조1·5인조·9인조의 공개투표를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사전에 달성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이들은 부정선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해 퇴장시키도록 했다따라서 3.15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중앙선관위의 선거결과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장면은 184만 4,257김준연은 24만 5,526임영신은 9만 9,090표였다즉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를 이기붕은 78%를 득표한 셈이다.

(부정선거 이후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3.15 부정선거가 있자 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마산 시위는 민중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분노한 이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가장 용기있게 떨치고 일어선 사람은 바로 경남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었다마산시민들과 용기있는 학생들은 부정선거 날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학생과 시민들이 시윌르 벌이자 경찰은 투석전을 벌인 끝에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이러자 격분한 시민들은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했다이 과정에서 시민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전라도 광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12시 50분경 광주 민주당원 50여 명은 <()! 민주주의 장송>이라고 쓴 만장을 선두로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곡성을 외치며 금남로 4가에서 광주지방법원 앞까지 시위하였다그러나 경찰에 저지당해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주모자로 26명을 구속했다경찰은 구숙안 이들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용공분자나 좌익분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려 했다또한 정부는 이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전단을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국민은 더 이상 참으려하지 않았다대통령의 담화나 경찰의 탄압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3월 17일 진해고교생서울성남고교생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이런데도 부정선거를 저지른 측은 파렴치하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3월 18일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붕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이기붕의 망언은 당연히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됐다. <런던 타임스>(3월 15)는 <고교생도 반항적>이란 기사에서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상세히 보도하고 <타임>(3월 21)은 <경찰 통제 하의 3인조 선거>, 같은 날짜 <뉴스위크>는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연극>, <워싱턴 포스트>(3월 16)는 <침묵에 잠겼던 한국의 젊은 세대 잠을 깨다>, <르몽드>(3월 18)는 사설 <심각한 투쟁양상>,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3월 16)는 사설 <이씨의 승리중대문제를 야기>, 같은 날짜 <뉴욕타임스>는 사설 <마산사건의 발생>, 은 <양당제도 파탄위기>, <워싱턴 포스트>(3월 17)는 사설 <더러운 승리>, <런던 타임스>(3월 17)는 사설 <차라리 가장(假裝)선거를>, <이코노미스트>(321)는 <이박사의 희미한 승리>, <뉴욕 타임즈>(3월 22)는 사설에서 <이박사의 후계자>문제를 각각 제기하였다.

(김주열 열사의 사체, 시위가 격해지자 경찰은 발포했고, 그로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주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고 사망했다. 하지만 경찰측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사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했던 경찰간부는 바로 친일경찰이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사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함 모습으로 바다에서 떠올랐다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은 학생 김주열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 악질 경찰출신이다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궐기했다분노한 시민들은 김주열 열사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앞당겼다2마산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2명 사망, 14명 부상 등의 희생을 치루면서 며칠째 계속되었다정부는 4월 13일 마산의 적색분자를 조사를 한다며 군경의 대공 3부 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마산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였다이승만은 4월 15일 다시 마산사건은 공산당의 조종이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검찰은 2차 마산사건과 관련하여 시민학생 30명을 구속하고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학생들의 시위, 학생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강해질수록 더 격렬해졌다. 심지어 중학생과 초등학생도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뻔뻔했다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였다이승만의 추종자들이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 등 내각에서 저지른 것이고이승만은 몰랐다는 주장은그의 거듭된 용공담화’ 발표에서 거짓임이 확인된다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이에 항거한 마산 시민·학생 학살의 주범이다.

 

마산을 시작으로 번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서울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특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천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오후 1시 교내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종로를 거쳐 9차례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저지선을 격파하여 오후 2시 15분 국회의사당(광화문 소재앞에 도착연좌시위에 들어갔다결집했던 고려대 학생들은 결국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여기서 문제가 또 터졌다청계천 4가에서 잠복해 있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쇠갈귀·몽둥이·벽돌 등으로 마구 난타하여 학생 10여 명기자 3명 등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이 정치깡패는 반공청년단 소속으로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조직폭력배들이었다여기에는 임화수유지광 등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현장,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고 있는 동대문파 깡패들은 고려대 학생을 폭행했다.)


(유지광, 유지광은 동대문파 깡패다. 그는 이정재, 임화수등과 더불어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다.)

 

정치깡패의 고려대학생 폭행사건은 오히려 민중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다음날인 4월 19일 여러 대학 학생들은 총궐기했다그날 고교생과 대학생을 비롯한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서울대생 2천여 명이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체주의에 항거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출발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였다이와 함께 건대생 1,500동국대생 1천 여 명서울사대생 1,500여 명동성고등학생 1천여 명서울의대약대생 1,600여 명성균관대생 1,500여 명고대생 2천여 명연대생 4천여 명경희대생 1천여 명경기대서울음대생 2백여 명단국대국학대한양대서라벌예대성심여대홍익대강문중고생흥국중고생대광중고생 등 도합 10만 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밀려왔던 것이다시위대중 일부는 경무대로 향했고또 다른 일부는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다른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의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를 벌였다.

(곽영주, 곽영주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던 경찰 간부다. 그는 4.19 혁명 당시 경무대로 몰려온 시민과 학생에게 발포했다. 그 결과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무대 앞에서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은 곽영주가 경찰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무차별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졌다이날 하룻동안 서울시내 곳곳에서 수 차례 시위대와 경찰의 접전이 이루어지고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업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단말마적인 경찰은 최루탄실탄기관포를 가리지 않고 난사하여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와 6,2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즉 많은 이들이 경찰의 발포로 이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경무대에서 후퇴하는 경찰병력)

 

여기서도 이승만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그는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16시 30분 부산·대구·광주·대전 지구에도 계엄을 선포하여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지시켰다이승만은 시위를 진압하고 싶어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임명한 송요찬 중장은 시위 진압을 거부했고오히려 시민들 편에 섰다결국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밝혔다이어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했다여기서 민중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6일 후인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이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시위를 감행했고시가를 행진했다교수단의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켰고다음날인 26일에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매카나기 대사, 주한미국대사인 매카나기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이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사퇴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바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미국의 뜻을 전달했는데거기에는 이승만이 물러나길 바라는 미국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즉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이기붕 일가도 끝이나 버렸다이승만의 양자였던 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가족을 쏴죽인 뒤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하야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60년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은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독재자로써 군림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권력욕은 민중혁명으로 막을 내렸다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마치 민중을 생각해서 하야한 것처럼 얘기한다그러나 이 시리즈를 다루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겐 그러한 양심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는 그 시점에서 노욕만 있었을 뿐이다. 3.15 부정 선거 이후 민중혁명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전형적인 독재 권력자의 모습이었다단지 미국이 물러나라 해서 물러났을 뿐그가 물러난 이후 그의 지원자였던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이기붕 일가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다시 한국을 떠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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