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위치)

 

911년 프랑스의 왕 샤를 3세는 바이킹(Viking)들이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그가 허락하면서 노르만 족들 즉 바이킹의 후예들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북유럽 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다 서유럽에 침입한 그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봉건영토로 제공받았고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1066년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국왕은 죽기 전 해럴드를 후계자로 선택했다그러자 노르웨이의 정복왕인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후계자이며 잉글랜드 국왕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이것은 해럴드와 윌리엄의 싸움으로 이어졌고이들의 싸움은 이른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윌리엄이 해럴드를 공격하며 시작됐다정복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윌리엄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9개월 전부터 군대를 모아 준비했다그는 영국 침공을 위한 450척이 넘는 수송섬 함대까지 확보해두었다또한 그는 3,000명 이상의 기사와 4,000명 이상의 보병을 소집했다그가 모은 보병들 중 일부는 석궁을 사용했는데이것은 일반적인 활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였다. 8월 말 쯤 영국 해협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마친 윌리엄은 남서풍이 부는 바람에 한 달을 더 기다렸고, 9월 27일 밤 솜 강 하구에서부터 해협을 건너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 헤이스팅스 근처에 상륙할 수 있었다.

(헤이스팅스 전투 당시 병력 배치도)

 

당시 윌리엄의 라이벌인 해럴드의 경우 잉글랜드의 북부를 침입한 노르웨이 인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남부해안을 무방비 상태로 두는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따라서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영국 땅에 상륙하여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월 1일 윌리엄이 이끄는 부대가 영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병력을 다시 배치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거리가 400km나 떨어져 있어서 이동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다이러한 과정에서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지역을 무참히 약탈했고과거 해럴드가 백작 시절에 소유한 영지의 일부였던 그 지역을 유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분노한 해럴드는 윌리엄이 예상한 대로 곧장 헤이스팅스로 진군했고, 10월 13일 저녁 헤이스팅스 북방 도로변 산등성이에 진지를 폈다한편 윌리엄은 이튿날 아침 적 기습을 받기 전에 미리 움직여 영국군 진지 전방에 도착해있었다. 10월 14일 아침노르만군의 궁수들이 잉글랜드의 방패 벽에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쌍방은 각각 약 1만 명으로 전투대형을 편성했다영국군은 순전히 보병 밀집대형으로서 중앙에 정예 상비군을 배치하고모든 보병이 방패와 창을 들고 이른바 방패벽을 형성하고 숲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병사들이 많았고 강행군 뒤라 매우 지쳐 있었다.

(방어하는 잉글랜드군, 전투 초기 이들은 돌격해오는 창병과 기병을 방어해냈다.)

 

활을 쏘며 전투를 시작한 노르만군은 궁수의 공격 후에 창병을 전진시켰다방어를 하고 있던 잉글랜드 보병들은 창병을 효율적으로 방어했고결국 노르만군은 기병을 투입했다그러나 기병 또한 돌파에 실패했고노르만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노르만군은 더 심한 혼란에 빠졌다그러나 노르만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순간 윌리엄은 나타났고나타난 윌리엄은 노르만 기사들에게 반격을 명령했다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고오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그의 공격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윌리엄은 색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그는 궁수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낸 다음 적과 90거리에서 화살을 거의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여 날리도록 했다화살은 영국군에게 빗줄기처럼 쏟아졌으며그러자 영국군은 겁에 질리고 혼란상태에 빠졌다그 순간 기사들은 일제히 공격하여 방패벽을 무너뜨리고 대승을 거두었다이렇게 해서 헤이스팅스 전투는 윌리엄의 승리로 끝났다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방어군은 해럴드를 포함해 병력절반이 전사했다그에비해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군은 2,000명이 전사했다.

(헤이스팅스 전투를 표현한 그림)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윌리엄은 영국을 쉽게 정복했다그리고 그해 성탄절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12세기에 노르만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영토를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서부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까지 판도를 확장했다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은 이른바 노르만의 시대는 영국의 역사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오늘날 잉글랜드인의 25%가 노르만 군대의 후손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지배계급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중세 영어가 섞이며 어휘도 크게 늘어났다.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성()들도 이때부터 축성됐고 봉건제가 자리 잡았다신분별 인구와 토지특산물가축과 삼림 등을 자세하게 조사한 기록물인 둠즈데이북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봉건 경제구도로 지배·운영하기 위한 도구였다선진화한 데인족인 노르만족은 기록 문화를 널리 퍼트렸다옥스퍼드 영국사에 따르면 로마군대가 영국을 떠난 450년부터 노르만 침공까지 토지 관련 문서는 2,000건에 불과했지만 13세기께 800만 건으로 늘어났다재산에 대한 인식과 기록화는 법제화와 직업 관료제로 이어졌다따라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영향력이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가람기획, 2010

 

위키피디아/헤이스팅스 전투

 

나무위키/헤이스팅스 전투

 

[오늘의 경제소사헤이스팅스 전투권홍우서울경제, 2019-1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태준 전집 6 :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이태준 전집 시리즈 (소명출판) 6
이태준 지음, 상허학회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가 이태준의 신중국 기행

 

(이 서평은 몇 달 전 읽었던 이태준의 쏘련기행과 같이 실린 중국기행을 개별적으로 다룬 서평입니다. 지난번에 소련관련 글을 우선으로 읽어서 중국기행을 안 읽었기에 이번에 중국기행을 읽어봤습니다. 중국기행 또한 쏘련기행 못지않게 좋은 작품이라 같은 책을 다시한번 리뷰 올립니다.)

 

1946년에 월북한 문학가 이태준은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여행하고 왔다. 1946년에 소련여행을 했던 이태준은 그로부터 3년 뒤에 다시 한 번 소련을 방문했었다. 두 번의 소련방문에서 이태준이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마르크스-레닌을 계승한 지도자 스탈린의 지도아래 미제국주의에 맞서 세계평화와 인류애를 구현하고자 하는 나라였다. 1949년 소련을 방문했던 이태준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51년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 나라가 바로 마오쩌둥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이태준이 중국을 방문하던 시기인 1951년은 한국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1950101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이에 따라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 또한 북진을 하게 되자, 만주침공과 대만의 참전을 걱정했던 중국은 이른바 항미원조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爲國)’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참전했다. 참전초기 최소 30만에서 45만 명 이상의 군대를 중국이 파병하자 한국군과 유엔군은 용인과 강원도 남쪽 그리고 충청북도까지 후퇴해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군과 유엔군은 총사령관 리지웨이의 지휘에 따라 다시 38선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그 상황에서 양측은 휴전협상을 하게 됐다. 양측의 휴전협상은 판문점에서 진행되었지만, 북한의 주요시설과 마을 그리고 도시를 대상으로 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지속되었다. 즉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가 이태준의 중국기행이다.

 

이태준이 보게 된 사회주의 중국은 마오쩌둥의 지도아래 사회적인 대변혁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는 혁명 국가였다. 1842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중국 혁명은 1949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지휘하는 홍군이 국민당을 무찌르면서 끝이 났다. 공산당이 통일 하고 난 이후 중국 사회 전역에선 사회주의적인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과거 국민당 시절 민중을 착취하던 지주 자본가 계급은 심판을 받았고, 토지개혁이 단행되었으며 봉건적 잔재들을 청산하는 작업들이 진행되었다.

 

과거 서방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공장들은 중국 노동자와 인민이 소유하게 되었다. 즉 이러한 변화가 혁명 중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태준은 본 것이다. 물론 1950년대 중후반에 대약진 운동 과정에서 농촌 황폐화 및 최소 3000만이 아사하는 대기근이 일어났지만, 혁명 이후의 초기 중국은 확실하게 변화를 거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태준이 혁명 후 초기 중국의 역동성에 감탄하는 것은 시대사적인 맥락에서 당연한 이야기라 본다.

 

이태준의 중국기행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항미원조. 위에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미국과 전쟁 중이었다. 월북 문학가인 이태준의 입장에선 이것은 당연하게도 침략자 미제국주의에 맞선 항쟁이었다. 이태준이 방문한 중국의 여러도시에선 침략자 미제국주의를 무찌르자’, ‘조선을 지원하자등의 구호가 곳곳에서 보이고, 심지어 항미원조를 기념하는 사과가 나올 정도다. 당시 중국인민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이들에게 있어 당연하게도 항일과 반서방 투쟁을 이어가는 반제국주의 항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점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이태준의 중국기행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인용해본다.

 

지원군 대표들이 행진한다. 북경의 산업과 건축 노동자 12만 명의 대열이 들어선다. 3만 명의 농민대열, 7만 명의 각 민주당파들과 사회 단체들의 대오, 8만 명의 중학 이상 학생대열, 8천 명의 문학예술인의 대오, 이들은 항미원조에 대한 격동적인 표어를 들었다. 이들은 일본 재무장에 반대하는 강경한 구호들을 들었다.

 

이들은 조국의 자유와 동양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투사들이다. 이들은 모 주석을 비롯한 자기정부 수장들의 초상을 들었다. 이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초상을 들었으며 우리 김일성 장군과 호지명, 처이발상, 베루트, 라코시, 코드왈트, 모든 인민민주국가 인민 수령들의 초상을 들었다. 이들우 자기 사업에 '애국공약'을 체결하고 싸우는 애국투사들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인민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고상한 국제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먹을 들어외칠 때 붉은 기는 파도쳐 광장이 붉은 바다로 되며 성벽은 진감하여 먼 문루들이 뇌성과 같은 메아리를 일으킨다. 이 소용돌이치는 광장의 정렬! 이는 저 붉은 크레믈린 붉은 광장들에 연결되는 무적한 인민민주주의 위대한 역량인 것이다.

 

맑게 갠 푸른 하늘이기에 붉은 기는 더 꽃보다 곱고 불보다 더 밝다. 이런 붉은 기의 장강은 성문들을 넘치듯 빠져나와 길마다 뿌듯이 흘러나간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북경은 참말 아름답다.”

 

출처 : 중국기행 p.275~276

 

저 유유히 나부끼는 오성기를 보라! 저 선명한 붉은 기폭에서 누가 그 고난 많았던 중국 애국열사들의 강을 이루어 흘린 피를 느끼지 않으랴!

항미원조를 더욱 강고히 하자!

일본 재무장을 강경히 반대하자!

영웅적 조선인민국대와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모택동 주적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굽이굽이 뻗어 나간 성벽들도 동서남북에 높이 솟은 내, 외성 문루들도 이날 천안문 광장에서 터지는 소리를 전 중국 방방곡곡에 그냥 전할 듯이 맞받아 울려나갔다.”

 

출처 : 중국기행 p.277~278

 

우리는 어서 나아 조선으로 가겠습니다. 어서 가서 마저 싸우겠습니다! 조선 형제들도 이 해방된 중국처럼 평화스러운 환경에서 살 수 있는 날까지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나는 이들에서 군인이란 일반적 관념을 잊었다. 이들은 하나하나 혁명투사의 기개들이다! 그렇다! 저 위대한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그렇듯 오늘 조선인민군대도 중국인민해방군대도 중국인민지원군대도 하나하나 혁명투사들인 것이다! 혁명투사들의 소대요 혁명투사들의 중대, 대대요 영광스러운 혁명투사들의 연대요 사단이요 군단인 것이다.”

 

출처 : 중국기행 p.338~339

 

여기서 언급되는 항미원조 전쟁은 당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나 반제국주의 투사들에게 있어서 반제국주의 전쟁으로 여겨졌다. 책에서 언급되는 헝가리나 체코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원조했다. 그 외에 다른 나라들이 항미원조 정신을 되새기는 장면이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냉전시대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견해와 행동들은 충분히 납득가능하고 시대사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태준이 중국에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이후 아옌데 몰락 이후 칠레의 군부독재자 피노체트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사회주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선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대패한 부패한 독재자이자 친서방제국주의자인 장제스를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장제스는 반공주의적이고 영국과 미국에 친화적이며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특히나 1925년 손문의 사망 이후 4.12 쿠데타를 홱책하여 중국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죽였던 것에 대해, 또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했다는 점에 대해 이태준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따라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공내전은 당연히 그에게 있어 친서방 제국주의에 지원받는 장제스 반동정권에 맞선 중국인민의 전인민적 항쟁이었던 것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도였던 난징을 방문한 이태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개석은 이 손중산 선생이 돌아가시기 바쁘게 선생을 배반하고 동지들과 중국 전체 인민을 배반하고 미일 제국주의자들이 길러주는 동족상잔의 무력으로 진정한 애국열사들과 우수한 조국의 아들딸들을 도살하기 시작한 바 이 우화대에서만 20여 년에 걸쳐 목을 베고 총살하고 하기를 20만 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중국 노동운동의 창시자 등중하도 중국공산당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운대영도, 중공 남경당 비서 손진천도, 동북항일연군의 한 수장이었던 나등현도, 애국청년 학생들의 지도자였던 곽영조 모두 이 우화대에서 희생된 것이라 한다.”

 

출처 : 중국기행 p.355

 

이태준의 중국기행은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에 방문하여 1952년 북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이태준은 사회주의 국가의 대표인 스탈린의 소련과 장제스 반동정권을 무너뜨리고 탄생한 사회주의 신중국에 대한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반공주의자들은 그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영혼없는 비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사적인 맥락과 그가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서 보는 관점일 뿐이다. 당시 이태준이 중국기행에서 공유한 감정은 당대의 진보 지식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련기행과 더불어 중국기행을 같이 읽어보기를 많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재원 2020-12-04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리뷰를 잘 읽었습니다. 내용에 다 동의는 못하지만, 이태준의 생생한 글이 느껴져서 좋아요 누릅니다.

NamGiKim 2020-12-04 23:5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태준 작가의 감성이 잘 담겨있고, 그 당시 좌파들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생생히 알수 있어서 소련기행과 더불어 중국기행도 개별적인 리뷰를 올렸습니다.
 

냉전시기 베트남 전쟁 만큼 미국을 좌우로 분열시켰던 사건은 사실상 없었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의 경우 자국민이 주도하는 반전운동에 의해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던 반면, 베트남 전쟁은 1970년 기준으로 435만 이상이 학생이 참가했을 정도로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전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했던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미국이 내세운 베트남 전쟁 참전명분을 모조리 날려버리게 되는 계기였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로 본 국민들은 매우 분노했다.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에 50만 명 이상의 대군을 파병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희망을 선전해왔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일종에 어려운 통계공식까지 만들어가며 남베트남을 수호하려 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또한 본인들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빨간 거짓말을 반복해왔다. 즉 구정공세는 미국의 거짓말을 진실의 수면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랜드 연구소(RAND:Research and Development Corp)와 대통령 직속기관 국무성에서 정책연구를 했던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미국 정부가 1급 기밀문서로 분류한 7,000페이지의 보고서를 세계에 폭로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엘스버그가 공개한 문서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30년에 걸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사실상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이었다. 196484일 미국에서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한 통킹만 사건은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완벽한 미국의 조작극이었다. 당시 통킹만에 있던 미군 구축함과 함정들은 북베트남 영역을 침범하고 그곳에서 순찰이 아닌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는 북베트남의 혼메와 혼니우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었다. 이처럼 미국의 침략전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부터 북폭 개시와 지상군 상륙까지 미국이 진행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민(Viet Minh)의 승리로 끝난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남북 베트남에서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총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괴뢰국을 세웠다. 응오딘지엠은 사실상 미국이 내세운 괴뢰국가의 수장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반면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호치민(Ho Chi Minh)과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층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꾸준히 해온 혁명가들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민중의 80%가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만으로는 공산주의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특히나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반대파 숙청 그리고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한 구금 및 처형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에 따라 총선거를 거부했던 미국은 남베트남 군대를 물적 인적으로 지원하는 미군사고문단을 창설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존F케네디 대통령이 점진적으로 증가했고, 1963년에는 그 숫자가 16,900명까지 늘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군사고문단을 증강하는 과정에서 네이팜 폭탄 투하,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의 비밀 작전 수행, 고엽제 살포 허가 그리고 전략촌 강제 소개등과 같은 작업들도 진행되었고, 이것은 당연히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196311월 남베트남에서 즈엉반민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을 살해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 쿠데타는 당연히 미국 CIA가 주도한 것이었으며, 응오딘지엠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일으킨 것이 주된 이유였다. 쉽게 말해 응오딘지엠이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도 결국 공산화 된다는 미국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이 쿠데타 이후에도 남베트남 내부에선 쉽게말해 군부의 내부총질이 끊이질 않았고,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못한 미국이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이 북폭을 개시하고 지상병력을 상륙시키는 과정도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우선 19652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플레이쿠의 미군기지가 베트콩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미군 8명이 죽고 100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을 명분으로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북폭을 허가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인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가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베트콩들이 흔히 가하는 공격에 불과했다.

 

즉 미국은 베트콩의 플레이쿠 공격을 과장보도하여 이른바 북폭의 명분을 만들었고, 실제로 북베트남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롤링썬더 작전(Rolling Thunder)이라는 이름을 가진 북폭은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으며, 그로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급증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은 총 8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폭탄에 4배에 달한다. 미군 폭격으로 인한 베트남인의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없지만, 이 전쟁과 학살극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38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즉 수백만의 민간인이 미군의 잔혹한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972년 마지막 위협 및 협박으로 이른바 라인배커 작전(Operation Linebacker)에 참가했다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잡혔던 미군 조종사들이 증언에 따르면 군사적인 목표라고 설정해놓고 폭격한 곳 대부분은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들이었다. 즉 미국의 폭격은 말 그대로 민간인을 타깃으로 하는 계획적인 학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군대에서 자유월남이나 월남패망 따위의 용어를 사용해가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심지어 수백만을 학살한 것이 북베트남 공산당이라고 하며 심각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물론 이런 반공주의적 주장의 근거와 출처는 전혀 없으며 통일 후 공산당 측의 대규모 학살은 없었다. 실제로 수백만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자행한 미제국주의 군대였다.

 

위에서 언급한 부류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언급할 때, 침략의 주체를 미국이 아니라 북베트남과 호치민으로 설정해놓는다. 그런 논리적 전개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를 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박정희 시절 반공국가 대한민국이 설정해 놓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남베트남을 정상적인 국가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응오딘지엠의 부정부패나 반민중성에 대해선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응오딘지엠을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웠던 남베트남의 군대를 보면 그 반민중성을 알 수 있다. 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 군대의 대다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 복무했던 반역자들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지휘했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위에서 언급한 응오딘지엠을 죽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또한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인물이었으며, 남베트남의 4성장군이었던 까오반비엔(Cao Văn Viên)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의 지도부는 프랑스에 빌붙어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쟁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침략이라는 반공주의자들의 의견 또한 역사적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북베트남의 침략이라고 주장하며 반공주의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북베트남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군대가 남파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언뜻 들어보면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북베트남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병력 지원을 한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베트남 전쟁의 일부분을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북베트남측에서 남파병력을 보낸 것은 엄밀히 치자면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공산주의자 집단에 대한 물적 인적 지원이었다. 즉 공식적인 침략이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전투를 치렀던 것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다음과 같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 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도 언급하려하지도 않는다. 미국과 베트남이 치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 이전에 있던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이미 미국이 개입한 상태였다는 사실 말이다. 195011월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1,000만 달러 이상의 경비를 지원했다. 이런 지원은 매년 수억달러로 증가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에는 거의 80% 가까이를 미국이 부담했다. 당시 미국은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 340대의 항공기, 350대의 정찰 보트 그리고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1954년 프랑스를 패배시킨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미국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의 베트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고,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베트민군에 포위된 프랑스군에게 수송기를 통해 물자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처럼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프랑스를 대신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공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아주 쉽게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의 참전명분과 남베트남 정권에 대해 옹호적이거나 비호적인 견지를 취하는 관점은 지극히 몰역사적이고 반민중적이며 역사적 사실관계마저도 무시하는 행위다. 이런 사실관계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공부해보면 알 수 있다. 즉 아직도 자유월남이니 월남패망이니 하며 반공주의를 호소하는 이들은 최소한의 역사적 지식마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은 민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와 미국에 맞선 베트남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이었고, 앞으로도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있어서 야만적인 제국주의를 쓰러뜨린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국주의 열강을 풍자한 그림)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으로 이기고 조선까지 식민 지배를 하게 된 일본은 한일합병을 한지 불과 4년 만에 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탈아입구를 시도하던 시기 유럽의 정세는 1871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룩하면서 점차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비스마르크는 식민 지배를 옹호하지도 않았고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지만그가 물러나고 나서 독일을 통치하게 된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되었다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선두를 다투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실상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자는 사자라 부르던 중국(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힘을 탕진했다그 결과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에게 쏜 권총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독일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연합군을 만들어 진압에 나섰다통일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린 발칸반도에서 패권경쟁이 가속화되었다즉 아프리카의 유리한 지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다툼과 1912~1913년의 발칸전쟁으로 초래된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예견하는 것만 같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츠 황제를 사살하면서유럽 각국의 긴장감은 높아졌다이 암살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그러자 세르비아의 동맹국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된 것이다.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적진에 배치된 기관총을 향해 이런식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엄청난 학살로 이어지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다이 전쟁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거나 국제법상으로 금지한 무기들의 기본적 형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탱크전투기독가스지뢰기관총 등 과학 기술력을 통해 발전된 무기의 현대화는 전쟁 자체를 대학살극으로 바꿨다이 전쟁으로 최소 1,000만 명이 사망하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그러나 이 전쟁에서 적잖은 이익을 본 나라가 있었다그 나라가 바로 유럽 전선의 지구 반대편에 있던 신흥강국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만화)

 

지난번 러일전쟁편에서 다뤘듯이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유럽 전선에는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그해 8월 23일에 영일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 식민지에 있는 수비대를 제압하기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1915년 10월 일본은 독일 식민지인 마리아나 군도와 마셜 군도 그리고 캐롤라인 군도를 점령했다그리고 이 섬들은 전쟁이 끝나가던 1918년 일본의 위임통치령 하에 들어갔고그로부터 25년 뒤에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미국이 섬 쟁탈전을 하는 곳으로 바뀐다.

(1914년에서 1915년 사이 일본이 점령한 독일측 식민지)


(칭다오 지도)

 

뿐만 아니라 일본은 독일 식민지였던 중국 영토 칭다오를 공격했다대략 3,000명의 독일 제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던 칭다오는 어떤 공격군도 쉽게 넘기 어려운 대단한 군사적 장애물이었다요행을 바라지 않았던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칭다오에 상륙시켜 계획적인 포위공격을 시작했다일본이 칭다오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하자텐진에 조파하고 있던 영국군 사우스웨일즈 국경수비연대 2대대와 시크 연대 36대대가 일본군과 합류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결국 일본은 10년 전 러일전쟁 당시 여순에서 러시아의 요새를 정복할 때처럼 11인치 곡사포로 포격을 개시했다. 11월 7일 아침 총독으로 근무하던 해군 장교 알프레트 마이어 발데크 대령이 부대를 포기하면서 일본의 승리로 끝이났다비록 발데크의 해병대가 200명이 전사했던 반면 일본군은 1,455명이나 전사했지만 말이다.

(칭다오 시가지를 향해 포격 중인 45식 240mm 공성포, 러일전쟁 당시 화력을 무시하고 보병의 총검에만 의존하여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던 것을 경험삼아 개발하였다.)


(칭다오 주둔 독일 제3해군보병대대 소속의 병사들)

 

이처럼 영일동맹을 구실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익 획득이라는 일거양득의 기회를 얻었었다.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하여 만주와 몽고산동성에 대한 독점적 이권을 확보하고 중국 정부를 자신의 세력하에 두려고 했다즉 일본은 이시기부터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독일의 슐리펜 작전으로 프랑스가 굴복할 것처럼 보였지만비스마르크 통일전쟁시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의외로 잘 싸웠다그 바람에 슐리펜 작전에 차질이 생겨 양면전선을 치르게 된 독일은 전쟁 초기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교착상태에 놓인 참호전을 벌였다.

(러시아 혁명을 지도한 블라디미르 레닌)

 

그러던 1917년 전 세계를 뒤흔들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하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어난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타도되었다그 이후 10월 혁명이 일어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에 등장했다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건설한 혁명 러시아는 1918년 브레스크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1차 세계대전에서 빠졌다그러나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빠지기가 무섭게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사회주의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왔다그리하여 러시아에선 적백내전이 발발하게 된다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시베리아에 출병을 감행했다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적백내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신흥부자 나라킨을 묘사한 그림,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지구반대편 전쟁을 통해 성장한 일본의 부유층들이다. 이 그림에선 나라킨이 자신의 신발을 찾으로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피는데, 당시 대졸 남성의 평균 월급이 50엔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나라킨,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이런식으로 묘사됐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다무역에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고해운업과 조선업도 호황을 이룩했다공장의 증설과 신설투자의 확대로 인한 호경기가 이어지면서 나라킨이라고 불리는 신흥부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또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하면서 1918년에는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초과하여 아시아 1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제1차 세계대전도 끝나갔다형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계속되는 독일 U-보트의 상선 공격과 치머만 전보로 인해 분노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이렇게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라는 최대의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 빠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전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게되기도 했었다독일은 병력의 대다수를 서부전선으로 모아 총공격에 나섰지만미국이 대규모의 병력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하면서 독일은 다시 패배하기 시작했다그렇게 해서 1918년 11월 독일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강대국들은 전후문제를 논의했다.)

 

1919년 1월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일본은 산동성에 대한 이권의 획득과 적도 이북 남양군도 영유를 요구했다즉 일본은 승전국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의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다전쟁 중의 호경기로 산업 생산이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지만 1920년대에는 경기 침체로 노동쟁의가 크게 증가했다뿐만 아니라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국가에선 독립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다마찬가지로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병합한 식민지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3.1 운동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어난 카틴숲 학살은 독소 불가침 조약과 더불어 서방에서 소련과 나치즘을 동급 취급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주제입니다. 보통의 경우 카틴숲 학살은 1940년 소련의 NKVD에 의해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소련의 NKVD가 수천 명이나 되는 폴란드 장교를 처형하고 암매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와 같은 폴란드 측과 서방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카틴숲 학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어느 측이 맞는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반박도 있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주장하는 카틴숲 학살에 대한 반론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1. 카틴숲(Katyn Forest)에서의 나치의 잔학행위

 

카틴은 스탈린주의 범죄와 대학살의 극히 일부를 보여준다.(아브지 신문, 200931)”

 

스몰렌스크(Smolensk) 지역에서 폴란드 전쟁포로 수천 명이 학살된 것에 관해, 벨로루시 공화국은 최근 반공산주의 선전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안드레이 바이다(A. Wajda)의 영화 카틴(Katyn)” 및 카틴과 관련하여 소련이 유죄인 것처럼 보이는 자료를 온라인에 게시한 것이다.

 

그리스 언론에서는 또한 소련에 대한 악명 높은 독일 히틀러 선전상인 괴벨스한테 받았던 지원 일체를 다시 받기 위해 이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많은 기회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 특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금의 모든 나치 변호론자들의 주장은 1943년 나치 조사의 발견에 근거를 두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적어도 1992년에 제출됐던 그 자료는 나치가 문서위조를 한 치명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2. 나치의 카틴에서의 집단 매장지 발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카틴은 벨로루시의 스몰렌스크 지역에 있다. 이 지역에서 소련은 폴란드 전쟁 포로를 수용소에 가둬 두었다. 그러나 19416월 소련에 대한 독일의 공격 이후, 이들 영토는 독일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다. 2년 뒤인 19434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나치가 패배 하고 두 달 뒤에 베를린에 있는 나치 라디오 방송국은 카틴에서 폴란드 장교 3천명의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1년 뒤에는 그 희생자들이 25천명에 달했다! “유대인 볼셰비즘은 이 범죄에 대한 범인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 매장지 발견 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괴벨스가 말하고자 했던 거처럼, “이 선전 재료들의 더 폭넓은 선전을 위한 그의 가르침에 따라 나치는 국제적인 차원의 조사기구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객관성을 더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그들은 한 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는 독일의 동맹국들에서 온 성원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제적십자사는 거부했던 반면 조사에는 폴란드 적십자사가 참가했다.

 

그 위원회는 폴란드에는 겨우 이틀 동안만 머물렀고 나치가 이미 골랐던 시신 9구만 조사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적 결론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었다. 나치의 거대한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만이 사건에 대한 나치의 견해를 채택했다. 타임지는 그 위원회의 결론을 인정하는 모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조차 했다.

 

3. 괴벨스 선전기구의 교활함과 능수능란함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들, 제 덫에 자기가 걸린 이들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또한 반공주의 정서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윈스턴 처칠 또한 그 당시에 나치가 수행한 모든 조사가 조작으로 된 것이고 그 결론은 테러의 산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국제 위원회 중 두 사람(불가리아인 엠 마르코프와 체코인 하젝)은 그 결과가 조작되었고 자신들은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서명을 했다고 증언하면서 위원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위원회 대표인 부취(G. Butch)는 독일에 의해 1944년 처형됐기 때문에 영원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4. 진실이 드러났다

 

나치 주장에 대한 소련의 첫 번째 반응은 1943419일 프라우다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로 즉각 나왔다.

 

평화적 시민에 대한 대량학살,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진보적 인류 전체의 분노를 의식한 독일은 지금 속이기 쉬운 인민들의 반유대인 증오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1만 명의 폴란드 장교 살해사건에 연루됐던 유대인위원회라는 전체 집단을 발명했다. 그렇게 노련한 날조자들이 레프 르이바크(Lev Rybak), 아브람 브로드닌스키(Avraam Brodinsky), 차임 피네베르그(Chaim Fineberg)와 같이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발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통합국가정치국(OGPU) 스몰렌스크부(Smolensk department)”나 내무인민위원회(NKVD, 범죄자를 기소하는 소련 국가기관)의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 분석조차도 희생자의 상당 부분이 폴란드 유대인이라고 확인함으로써 유대인 볼셰비즘에 대한 나치 주장의 결함을 인정했다.

 

적군에 의해 폴란드가 해방된 후 소련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부르덴코(N. Burdenko)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과학위원회를 설립했다. 조사는 19439월에 시작되어 19441월에 완료됐다. 위원회 조사결과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처형 책임이 전적으로 나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소련측 조사의 다음과 같은 핵심 사항을 거론한다.

 

법의학 조사는 나치가 주장했듯이 폴란드 장교들이 1940년에 매장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증명했다. 시신의 부패 정도에 따라 1941~1942년 초에 매장됐음이 틀림없다.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1년 가을 그 지역이 독일 점령 하에 있을 때 폴란드인들이 처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십 명의 목격자들은 1940년 봄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위원회에 증언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한 농부는 19418~9월에 폴란드인들이 철로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한 교사는 1941년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한 폴란드인을 그녀의 집에 숨겼다고 증언했다. 만약 독일 보고서가 사실이라고 본다면 이 폴란드인은 1940년 봄 소련군에 의해 처형됐던 3,796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유령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사망자 수에 들어갔던 1,105명은 수년 동안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인들 중에는 독일 보고서의 목격자로 서명하라고 게슈타포가 강요했다고 증언한 사름들도 몇 명 있었다.

 

소련의 조사로 오늘날까지도 카틴 사건에 관해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선전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은 “1940년에 볼셰비키가 폴란드 전쟁포로들과 성직자들의 집단 처형에 관해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독일 경찰에게 내용을 제보하면 사례금을 줄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독일이 증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란드인들이 학살당했던 시기라고 독일에서 말하는 1940년 봄과 독일 침공 시기 이후의 문서(편지, 증서)가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조사를 통해 나타났던 증거들이 미국 대표단에 의해 분명히 확인되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G. 로버트(G. Robert)는 이야기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의 딸이며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던 캐서린 해리먼의 기록을 보면, 나치 주장처럼 시신이 3년 전에 매장됐던 것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로버트에 따르면 해리먼 미국 대사는 미국 대표단의 결론을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체적 증거와 증언으로부터 캐서린과 대사관 직원은 어떤 경우라도 독일에 의해 학살이 진행되었다고 확신한다.”

 

5. 괴벨스에서 자유세계까지

 

1945년까지 카틴 사건은 미국 외교 문서에는 나치의 선전으로 언급됐고, 뉴욕타임즈와 같은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나치의 흉악한 사기로 묘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과거의 제국주의 동맹국들이 소련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면서는 자신들의 반공주의 병기고에 카틴숲 학살을 추가하여 이 사건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첫 번째 조짐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드러났다. 미국과 영국 측이 재판에서 카틴 사건을 포함시켜 조사하자는 소련의 요청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심문절차는 6(소련 범죄에 대해서 3, 나치에 대해서 3건의 증언)으로 한정되었다.

 

1951~1952년 한국전쟁 시기에 매든위원회(Madden Committee)”가 미국 하원에 설립되었는데 위원회는 폴란드 장교들이 소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소련을 국제재판소에 출석시키자고 제안했다. 매든위원회에서 증원했던 신뢰할 수 있는증인들 중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괴링의 변호를 맡은 오토 슈타머 박사도 있었다! 또한 19527월 미국 내무부 비밀 보고 문건에는 유엔에서의 공통 전략 수립에 관한 미국-영국 간의 회담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카틴 사건을 포함하여 반소선전을 위해 유엔을 활용할 필요성이 명시되어 있다.

 

종전 후 지금까지도 제국주의자들은 괴벨스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한 편,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 중에도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런던으로 추방되었던 차르 지지자 후선인 알렉산더 위스가 있는데, 그가 1964년에 출판했던 저서 전쟁기의 러시아: 1941-1945(Russia at War: 1941-1945)”에서는 카틴 사건이 소련의 책임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대와 우려를 분명히 제기했다. 또한 그는 카틴에서의 대량학살 기법과 서유럽의 다른 나치 처형 사건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역사적인 진실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 증언자는 동부전선(Eastern Front) 전투에 참여했던 독일인으로 그는 1971년 카틴 사건에 대해 타임(Times)지에서 시작된 논쟁에 편지로 참여했다.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요제프 괴벨스는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업무였고, 그것에 있어서 그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놀라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괴벨스의 기만술이) 타임지 지면에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볼 때, 전쟁 막판에 괴벨스가 카틴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많은 독일군 병사들을 속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일 군인들은 속으로는 사형 집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독일 군인들은 폴란드 장교들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의해 몰살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6. 반혁명과 증거서류의 발견

 

반혁명이 승리하자 괴벨스(Gobbels)의 현대 추종자는 그들이 1943년 이래로 기다려 왔던 해명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소련 유죄의 증거가 드디어 발견됐다”! 특히 1992년 소련 공산당이 위헌 기구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가 심판 과정에 있을 때 보리스 옐친의 법률팀은 카틴에서의 폴란드 장교 살해에 대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 그리고 당연히 스탈린의 책임이 입증된 일급 기밀문서들을 방금 공문서보관소(Archives)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소련 공산당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은 사본으로 제출됐던 그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처음부터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그 문서들은 원본의 형태로 제출되지 않았으며 헌법재판소는 판결에 그 문서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소련 공산당에 반대하는 조작된 상황에서조차도 이들 문서들은 증거로 채택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의 문서 조작을 밝히는 다른 증거들이 나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2010년 러시아 정부는 디지털 사진의 형태로 이 악명 높은 문서를 인터넷에 게시했다. 원본은 아직 제출하지 못했다.

 

7. 위조의 네트워크

 

이 범죄에 대해 소련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치 선전의 주장 이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아니면 잘해야 매든 보고서의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반대로 역사적 진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정보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한다.

 

2005년 포돌스크(Podolsk)에 있는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를 연구하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카틴에서 폴란드인의 처형에 직접 참여했던 독일군 장교의 증언을 문서로 기록한 전체 파일의 존재를 발견했다. 20106, 러시아연방공산당 B 일류친(B, Ilyuchin) 하원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그는 며칠 전 카틴 사건의 문서 위조자 한 명과 접촉했다는 발표를 했다. 특히, 그가 당시 폭로했던 바에 따르면, 1990년 초 당시 대통령이던 옐친의 안보국 비호 아래, 수많은 문서를 위조하기 위한 임무를 지난 특수 조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조직은 처음 반혁명 이전에는 나고르나야(Nagornaya)라는 농촌마을에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소속된 기관으로 일하였는데 나중에는 자레취(Zarechie) 지역으로 이전했다. 보안군과 대통령 기구의 인원들로 구성된 이 위조 조직은 문서를 새로 만들거나 위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듬해부터 수십만 건에 달하는 위조문서가 러시아공문서보관소로 이식되었다.

 

[카틴 : 위조의 증거]

 

1992년 발표된 문서에서 이른바 소련의 범죄라고 입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194053일 날짜로 된 내무인민위원 베리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폴란드 포로 25,700명의 사형집행을 제안한 4장짜리 문서.

 

b. 같은 날인 194053일 베리야의 요청이 승인된 정치국 제13차 회의록 발췌문

 

c. 그리고 그 서류의 파기에 대해 195933일 날짜가 찍힌, KGB 국장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보낸 당시 편지.

 

그 문서의 진위에 대한 법학자들과 역사연구자들의 수많은 견해 중에서 다음의 것을 식별할 수 있다.

 

- 위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로 베리아의 사형집행 제안에서부터 정치국의 결정까지 전체 날짜가 동일한 것이었다. 소련 역사상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절대 없었다. 만일 그 토론이 최종 승인됐다면, 그 서류의 발송에서 정치국 토론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여기에 걸리는 기간은 적어도 5~6일이었다. 법학자인 즐로봇킨에 따르면, 이 과정의 상세한 기록은 공판 소송기록에서 베리아의 제안이 19403날짜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나중에 정정됐다. 그 문서는 이러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 그 문서들은 엄격한 관례와 특정한 양식에 따라 작성되었다. 일련의 이러한 특징들이 제출된 문서에서는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에게 보낸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서신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도장이나 등록번호, 혹은 그 문서들의 평상시 어떠한 표시(가령, 기밀의, 비공개의 등)도 없다.

 

- 마지막으로 200711월에 시작되어 2009331일에 끝난 독립적 법의학 분석은 베리아의 문서에 다른 타자기가 사용되었고, 위조 가능성이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증인은 1940년대에 생산된 종이들, 중앙위원회의 다양한 문서들, 위조된 도장, 심지어 기밀문서 해제 대상이 아니라고 기밀 표시된 전체 파일과 같이, 자신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심지어 폴란드 전쟁포로를 처형하려는 베리아의 요청을 볼셰비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승인하는 결정을 위조하는 것에도 참여했다. 위조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구체적인 인물의 신원과 증거까지 동반된 이러한 중대한 주장은 여전히 카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의 진위에 대해 더욱 더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왜 이러한 모든 것이 언론이나 역사책에 적어도 피상적으로나 객관성이라는 이유로든 언급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과학자들, 문화적 인물들이나 오로지 나치 선전을 위해 돈을 받은 사람들이든 역사적 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편리성이 드러났던 나치의 선전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신속하게 채택이 됐는데, 그것이 전체주의에 대한 비과학적인 개념인 두개의 극단주의라는 역사적 이론을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카틴 사건은 파시즘-나치즘과 동급으로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역사 위조의 무기가 되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3~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