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 베트남 전쟁 만큼 미국을 좌우로 분열시켰던 사건은 사실상 없었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의 경우 자국민이 주도하는 반전운동에 의해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던 반면, 베트남 전쟁은 1970년 기준으로 435만 이상이 학생이 참가했을 정도로 자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전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했던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미국이 내세운 베트남 전쟁 참전명분을 모조리 날려버리게 되는 계기였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 1층이 잠시나마 베트콩에 의해 점령되는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로 본 국민들은 매우 분노했다.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에 50만 명 이상의 대군을 파병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희망을 선전해왔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일종에 어려운 통계공식까지 만들어가며 남베트남을 수호하려 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또한 본인들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빨간 거짓말을 반복해왔다. 즉 구정공세는 미국의 거짓말을 진실의 수면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랜드 연구소(RAND:Research and Development Corp)와 대통령 직속기관 국무성에서 정책연구를 했던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 미국 정부가 1급 기밀문서로 분류한 7,000페이지의 보고서를 세계에 폭로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엘스버그가 공개한 문서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30년에 걸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사실상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이었다. 196484일 미국에서 북베트남의 어뢰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한 통킹만 사건은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완벽한 미국의 조작극이었다. 당시 통킹만에 있던 미군 구축함과 함정들은 북베트남 영역을 침범하고 그곳에서 순찰이 아닌 정찰 임무를 수행했으며,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의 특수부대는 북베트남의 혼메와 혼니우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었다. 이처럼 미국의 침략전쟁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부터 북폭 개시와 지상군 상륙까지 미국이 진행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민(Viet Minh)의 승리로 끝난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남북 베트남에서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총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괴뢰국을 세웠다. 응오딘지엠은 사실상 미국이 내세운 괴뢰국가의 수장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반면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호치민(Ho Chi Minh)과 북베트남 공산당 지도층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꾸준히 해온 혁명가들이었다. 따라서 베트남 민중의 80%가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만으로는 공산주의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특히나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반대파 숙청 그리고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한 구금 및 처형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에 따라 총선거를 거부했던 미국은 남베트남 군대를 물적 인적으로 지원하는 미군사고문단을 창설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존F케네디 대통령이 점진적으로 증가했고, 1963년에는 그 숫자가 16,900명까지 늘어났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군사고문단을 증강하는 과정에서 네이팜 폭탄 투하,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의 비밀 작전 수행, 고엽제 살포 허가 그리고 전략촌 강제 소개등과 같은 작업들도 진행되었고, 이것은 당연히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196311월 남베트남에서 즈엉반민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을 살해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 쿠데타는 당연히 미국 CIA가 주도한 것이었으며, 응오딘지엠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일으킨 것이 주된 이유였다. 쉽게 말해 응오딘지엠이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도 결국 공산화 된다는 미국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이 쿠데타 이후에도 남베트남 내부에선 쉽게말해 군부의 내부총질이 끊이질 않았고, 더 이상의 희망을 찾지못한 미국이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이 북폭을 개시하고 지상병력을 상륙시키는 과정도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우선 19652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플레이쿠의 미군기지가 베트콩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미군 8명이 죽고 100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을 명분으로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북폭을 허가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인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가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베트콩들이 흔히 가하는 공격에 불과했다.

 

즉 미국은 베트콩의 플레이쿠 공격을 과장보도하여 이른바 북폭의 명분을 만들었고, 실제로 북베트남 전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롤링썬더 작전(Rolling Thunder)이라는 이름을 가진 북폭은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으며, 그로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급증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은 총 80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폭탄에 4배에 달한다. 미군 폭격으로 인한 베트남인의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없지만, 이 전쟁과 학살극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38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즉 수백만의 민간인이 미군의 잔혹한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1972년 마지막 위협 및 협박으로 이른바 라인배커 작전(Operation Linebacker)에 참가했다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잡혔던 미군 조종사들이 증언에 따르면 군사적인 목표라고 설정해놓고 폭격한 곳 대부분은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곳들이었다. 즉 미국의 폭격은 말 그대로 민간인을 타깃으로 하는 계획적인 학살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군대에서 자유월남이나 월남패망 따위의 용어를 사용해가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심지어 수백만을 학살한 것이 북베트남 공산당이라고 하며 심각한 역사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물론 이런 반공주의적 주장의 근거와 출처는 전혀 없으며 통일 후 공산당 측의 대규모 학살은 없었다. 실제로 수백만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자행한 미제국주의 군대였다.

 

위에서 언급한 부류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언급할 때, 침략의 주체를 미국이 아니라 북베트남과 호치민으로 설정해놓는다. 그런 논리적 전개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를 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박정희 시절 반공국가 대한민국이 설정해 놓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남베트남을 정상적인 국가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응오딘지엠의 부정부패나 반민중성에 대해선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응오딘지엠을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웠던 남베트남의 군대를 보면 그 반민중성을 알 수 있다. 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 군대의 대다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 복무했던 반역자들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지휘했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위에서 언급한 응오딘지엠을 죽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또한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인물이었으며, 남베트남의 4성장군이었던 까오반비엔(Cao Văn Viên)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의 지도부는 프랑스에 빌붙어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쟁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침략이라는 반공주의자들의 의견 또한 역사적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북베트남의 침략이라고 주장하며 반공주의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북베트남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군대가 남파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언뜻 들어보면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북베트남이 호치민 루트를 통해 병력 지원을 한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베트남 전쟁의 일부분을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북베트남측에서 남파병력을 보낸 것은 엄밀히 치자면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공산주의자 집단에 대한 물적 인적 지원이었다. 즉 공식적인 침략이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전투를 치렀던 것도 남베트남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다음과 같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 맥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도 언급하려하지도 않는다. 미국과 베트남이 치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 이전에 있던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이미 미국이 개입한 상태였다는 사실 말이다. 195011월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1,000만 달러 이상의 경비를 지원했다. 이런 지원은 매년 수억달러로 증가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에는 거의 80% 가까이를 미국이 부담했다. 당시 미국은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 340대의 항공기, 350대의 정찰 보트 그리고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1954년 프랑스를 패배시킨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미국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의 베트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고,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베트민군에 포위된 프랑스군에게 수송기를 통해 물자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처럼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프랑스를 대신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공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맥락을 아주 쉽게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의 참전명분과 남베트남 정권에 대해 옹호적이거나 비호적인 견지를 취하는 관점은 지극히 몰역사적이고 반민중적이며 역사적 사실관계마저도 무시하는 행위다. 이런 사실관계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공부해보면 알 수 있다. 즉 아직도 자유월남이니 월남패망이니 하며 반공주의를 호소하는 이들은 최소한의 역사적 지식마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은 민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와 미국에 맞선 베트남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이었고, 앞으로도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있어서 야만적인 제국주의를 쓰러뜨린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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