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위치)

 

911년 프랑스의 왕 샤를 3세는 바이킹(Viking)들이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그가 허락하면서 노르만 족들 즉 바이킹의 후예들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북유럽 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다 서유럽에 침입한 그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봉건영토로 제공받았고 세력을 키워나간 것이다. 1066년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국왕은 죽기 전 해럴드를 후계자로 선택했다그러자 노르웨이의 정복왕인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후계자이며 잉글랜드 국왕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이것은 해럴드와 윌리엄의 싸움으로 이어졌고이들의 싸움은 이른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윌리엄이 해럴드를 공격하며 시작됐다정복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윌리엄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9개월 전부터 군대를 모아 준비했다그는 영국 침공을 위한 450척이 넘는 수송섬 함대까지 확보해두었다또한 그는 3,000명 이상의 기사와 4,000명 이상의 보병을 소집했다그가 모은 보병들 중 일부는 석궁을 사용했는데이것은 일반적인 활보다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무기였다. 8월 말 쯤 영국 해협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마친 윌리엄은 남서풍이 부는 바람에 한 달을 더 기다렸고, 9월 27일 밤 솜 강 하구에서부터 해협을 건너기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 헤이스팅스 근처에 상륙할 수 있었다.

(헤이스팅스 전투 당시 병력 배치도)

 

당시 윌리엄의 라이벌인 해럴드의 경우 잉글랜드의 북부를 침입한 노르웨이 인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남부해안을 무방비 상태로 두는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따라서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영국 땅에 상륙하여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월 1일 윌리엄이 이끄는 부대가 영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병력을 다시 배치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거리가 400km나 떨어져 있어서 이동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다이러한 과정에서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지역을 무참히 약탈했고과거 해럴드가 백작 시절에 소유한 영지의 일부였던 그 지역을 유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분노한 해럴드는 윌리엄이 예상한 대로 곧장 헤이스팅스로 진군했고, 10월 13일 저녁 헤이스팅스 북방 도로변 산등성이에 진지를 폈다한편 윌리엄은 이튿날 아침 적 기습을 받기 전에 미리 움직여 영국군 진지 전방에 도착해있었다. 10월 14일 아침노르만군의 궁수들이 잉글랜드의 방패 벽에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쌍방은 각각 약 1만 명으로 전투대형을 편성했다영국군은 순전히 보병 밀집대형으로서 중앙에 정예 상비군을 배치하고모든 보병이 방패와 창을 들고 이른바 방패벽을 형성하고 숲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병사들이 많았고 강행군 뒤라 매우 지쳐 있었다.

(방어하는 잉글랜드군, 전투 초기 이들은 돌격해오는 창병과 기병을 방어해냈다.)

 

활을 쏘며 전투를 시작한 노르만군은 궁수의 공격 후에 창병을 전진시켰다방어를 하고 있던 잉글랜드 보병들은 창병을 효율적으로 방어했고결국 노르만군은 기병을 투입했다그러나 기병 또한 돌파에 실패했고노르만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노르만군은 더 심한 혼란에 빠졌다그러나 노르만군이 후퇴를 거듭하던 순간 윌리엄은 나타났고나타난 윌리엄은 노르만 기사들에게 반격을 명령했다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고오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그의 공격이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윌리엄은 색다른 방법을 시도했다그는 궁수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낸 다음 적과 90거리에서 화살을 거의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여 날리도록 했다화살은 영국군에게 빗줄기처럼 쏟아졌으며그러자 영국군은 겁에 질리고 혼란상태에 빠졌다그 순간 기사들은 일제히 공격하여 방패벽을 무너뜨리고 대승을 거두었다이렇게 해서 헤이스팅스 전투는 윌리엄의 승리로 끝났다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방어군은 해럴드를 포함해 병력절반이 전사했다그에비해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군은 2,000명이 전사했다.

(헤이스팅스 전투를 표현한 그림)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윌리엄은 영국을 쉽게 정복했다그리고 그해 성탄절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12세기에 노르만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영토를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서부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까지 판도를 확장했다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은 이른바 노르만의 시대는 영국의 역사에 지대한 흔적을 남겼다오늘날 잉글랜드인의 25%가 노르만 군대의 후손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지배계급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중세 영어가 섞이며 어휘도 크게 늘어났다.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성()들도 이때부터 축성됐고 봉건제가 자리 잡았다신분별 인구와 토지특산물가축과 삼림 등을 자세하게 조사한 기록물인 둠즈데이북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봉건 경제구도로 지배·운영하기 위한 도구였다선진화한 데인족인 노르만족은 기록 문화를 널리 퍼트렸다옥스퍼드 영국사에 따르면 로마군대가 영국을 떠난 450년부터 노르만 침공까지 토지 관련 문서는 2,000건에 불과했지만 13세기께 800만 건으로 늘어났다재산에 대한 인식과 기록화는 법제화와 직업 관료제로 이어졌다따라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영향력이 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가람기획, 2010

 

위키피디아/헤이스팅스 전투

 

나무위키/헤이스팅스 전투

 

[오늘의 경제소사헤이스팅스 전투권홍우서울경제,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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