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 세력의 통일로 끝난 이후 당연히 베트남은 전후처리 과정을 거쳤다.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통일을 이룬 북베트남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한 재교육 및 청산 작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학살당했다는 주장들이 과거 대한민국에서 정훈교육이나 반공교육 차원에서 많이 강조되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이러한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차원에서 이용된 것이다. 물론 그 시기 대한민국 사회가 인식하는 현실 사회주의권은 말 그대로 1978년에 나온 똘이장군 수준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걸러야할 점이 있지만 말이다.

(보트피플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협력하던 이들은 이렇게 도망쳤다. 마치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공화당 지지자들 처럼 말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트남 전쟁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수백만 즉 20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죽었다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하거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운동 혹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많이 퍼졌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말 사실인 것일까?

 

우선 수백만이 학살당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루머의 출처의 근원을 찾는 건 많이 힘든 일이지만, 확실한건 현재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루머가 일부 티비 조선을 포함한 곳에서 각본대로 읽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얘기 또한 상당히 과장되고 부풀려져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소련 시절 굴라그에 대한 얘기가 그러하다. 냉전시기 소련의 굴라그에 대해 엄청난 루머를 퍼뜨렸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최소 10배 이상의 수감자 수치를 과장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그것이 매우 과장되었음이 드러났다.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에서 선고된 사형선고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 출처는 정정진 교수의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p.200쪽이다.)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라는 책에 따르면 수천 만 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던 것처럼,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수감되었던 이의 숫자는 그것보다 한참 아래였다. 또한 영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로버트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콘퀘스트의 자료에 따르면 그 이후에 거친 수감자는 그러나 더 많은 셈이다. 소련의 젬스코프 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당시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고,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 굴라그라는 곳이 단순히 감옥이 아닌 인근마을과 굴라그 수용소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더 와 닿지 않는다면, 이걸 예시로 들어볼 수도 있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1997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자세한 자료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no=245981#0DKU

 

지금까지 소련에 존재했던 굴라그에 대한 자료를 길게 이야기 했다. 소련의 사례를 예시로 든 이유는 일각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학살 혹은 인권유린으로 알려진 사건들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 정권이 단행했던 재교육 수용소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많이 부풀려지거나 과장되는 이유는 확실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당한 옹호력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폴포트의 학살을 다뤘던 영화 킬링필드가 강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재교육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연구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감독은 켄 번즈(Ken Burns)2017년 거의 20시간 가까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베트남 전쟁 10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모은 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제작되었고,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미군, 반전운동가 그 외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신빙성 있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화인 10화에서는 잠시나마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 많은 이가 두려워하던 피의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시골에서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이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보복차원에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에 가담했던 장군부터 평범한 직원들까지 모두 재교육을 받았습니다. 남베트남군에 입대했던 사람은 3일간만 교육받는다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1달만 출석하라고 했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남베트남 군장교로 참전했던 한 사람의 증언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한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캠핑을 간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7년 반 동안이나 재교육 캠프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100명 중 하나였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캠프에 수감된 이들은 짧게는 3일에서 1주일 혹은 1달 길게는 1년에서 3년 아주 길게는 10년 혹은 15년을 갇혔던 이들도 있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라는 책에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남베트남 군인 전직 관료 등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던 100만 명 중 90%나 되는 사람들을 새 조국 건설에 동참시킨 아량은 높이 평가되나, 나머지 10만 명(재교육 대상자)에의 가혹한 처사는 통일 베트남 전권을 두고두고 괴롭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베트남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p.173쪽을 참고함)

 

캐나다 출신 종군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과 닉슨의 크리스마스 폭격 등을 직접 목격했던 마이클 매클리어는 1980년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지만, 1980년대 초에 책으로 출간 됐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 저자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서글픈 전쟁의 성격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즈엉반민(사이공 함락당시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5 저자 후기)

 

2002년 당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집필한 베트남사 전공 교수인 유인선 교수는 2018년에 책 개정판을 내놓았다. 개정판에선 1986년의 도이모이 정책까지의 내용을 보다 확장했는데, 책에서 그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언급했다.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군인·사업가 등 최소한 수만 명은 각지에 설치된 재교육수용소에 억류되어 지위에 따라 몇 주일 내지 몇 년을 보내야 했다. 남부의 통합 후 10년이 경과한 1985년에도 수용소의 억류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427을 참고함)

 

일단 이 책에서 나온 재교육 수용소의 수감자에 대한 수치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판단해볼 수 있는 것은 일각에서 얘기하는 수십만이 죽었다거나 수백만이 재교육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일부 억울한 사례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몇몇 루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 거기다 당시 베트남의 인구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6년 도이머이를 하기 이전까지 베트남의 인구는 남북을 아울러 4,000만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통일 이후 공산당 정부가 수백만 명을 처형한 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고, 또한 그럴만한 행정체계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의 주석이었던 쯔엉던상, 그는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베트콩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베트콩이나 학생운동이 대량으로 토사구팽당했다는 루머가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물론 일부 처형된 사례가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이나 반정부 종교인들 그리고 베트콩 출신들이 무조건적으로 토사구팽당한 것은 아니다. 2016년 당시 베트남 주석이었던 쯔엉던상의 경우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하다가 베트콩이 된 케이스였고, 당시 베트콩의 지도급 위치에 있던 응우옌흐윽토나 호앙반타이 등의 인물들도 공산당 내에서 당적과 지휘를 계속 유지했었다. 이 루머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극히 일부의 사례를 확대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와 수백만 처형에 대한 루머를 다소 길게 정리했다. 이 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남베트남 패망 후 수백만이 처형당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2. 남베트남 패망 이후 베트콩이나 학생운동가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3. 일각에 알려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루머는 한국의 탈북자들이 티비조선에서 퍼뜨린 것처럼 말 그대로 루머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4. 남베트남 패망 이후 대규모의 학살을 공산당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일부 개인적인 보복에서 일어난 사례들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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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만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1931 9 18일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왔고, 1932년이 되었을 당시 일본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결코 적진 않았다이들의 저항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시작했었고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분명한건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전개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이용했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한마디로 일제의 어용단체였던 것이다.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자가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다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하기에 이르렀다반민생단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갔었던 한 조선인 유격대 지휘관이 있었다그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20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김일성은 10대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탐독했었던 열혈 사회주의 청년이기도 했었다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구국군으로서 항전했는데당시 조선인 당원들도 거기서 활동했다.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安图)에서 구국군 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의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이것이 김일성이 최초로 조직한 항일 유격대였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1933년 2월은 김일성은 왕칭(왕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이른바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는데그는 여기서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여기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중학교에 다닌 경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실제로도 그러했다그가 왕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1933년 6월이었다또한 3개월 뒤 김일성은 둥닝 전투(둥닝현성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구국군의 스중헝과 스중헝의 부대를 구출하는 전공을 만들었다그 이후 김일성은 중국 최고의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투쟁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몰려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되었었다물론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고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다김일성이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구국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억울한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거기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김일성이 유죄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둥닝전투에서 스중헝을 구출해줬던 김일성은 당연하게도 살아남았고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을 회복했다.

 

반민생단투쟁사건으로 조선인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처형됐다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되었고그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들을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되었다이 부대의 규모는 최소 300명 정도였고사장은 중국인 양정우참모장은 조선인인 이홍광이었으며부대의 1/3은 조선인들이었다또 동만주에서도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성립되었으며사장은 조선인인 주진이 맡았으며병력의 2/3는 조선인이었다또한 북만주의 밀산에서도 1934년 밀산유격대와 중국의용군이 통합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4이 편성되었다.

 

1934년 6월 김일성은 동만의 유격대를 통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 그리고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 전투에 참가할 때 지휘부의 일원으로 복귀했으며그해 9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민생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이었다이후 김일성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 보고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이 이른바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로 바뀌면서 이에 영향을 받았고민생단 사건도 최종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른다또한 여기서 김일성은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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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참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중국 사회내에서도 ''''에 대한 평가가 존재할 정도죠. 1893년에 태어나 1976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조타수'는 많은 것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또 많은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1958년에 진행한 대약진 운동에서의 아사자는 최소 2,000만 이상이었고,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은 최소 150만 가까이 되는 희생자가 나왔죠. 특히 문화대혁명의 경우 마오 개인 권력욕에의한 광기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은 한편으로 제3세계 지도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기도 했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반전운동 속에서 서구좌파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쿠바의 체게바라와 더불어 68혁명의 우상이기도 했죠. 따라서 마오쩌둥이 당시 좌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세상의 꿈을 품게 했던 것도 사실이라 봅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과오들도 분명히 존재했던 사실입니다. 대약진 운동은 중국 공산당 관료들의 과장 보도와 잘못된 농업 정책 등이 한 몫 한것도 있지만, 정책 자체를 오류있게 잡은 마오쩌둥의 책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학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근은 처참했고 1960년 이후에 마오쩌둥이 권좌에서 잠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처참한 기근은 많게는 4,500만 명이 희생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들어 이것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죠.


 

마오쩌둥의 가장 결정적인 잘못은 문화대혁명에 있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현실 상황에서 소위 주자파라는 세력과 투쟁해야 하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지나친 개인 보복이나 문화재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억울한 희생자를 냈죠. 그리고 이것은 마오 개인의 권력욕에서 이어진 점이 강했기에 변호하기 힘든 점도 큽니다.

 

마오쩌둥이 저지른 과오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폭력적이고, 폄하되어야만 하는 인물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또한 그는 냉전시기 서구좌파들의 우상이었고, 서구사회가 보다 진보적인 길로 갈 수 있는 희망을 어떤면에선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 혁명을 성공시켰고, 국민당을 축출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과거 근현대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로 서구 열강에게 뜯기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공을 받아 갈기갈기 찢기는 형편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이 만든 중국은 비록 정권기 과오가 있더라도 더 이상 열강의 침공을 받지 않고, 서구 자본에 이용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죠. 마오쩌둥 평전의 저자 알렉산더 판초프가 말했듯이 그는 사회관계를 변혁시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쑨중산(孫文)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중국인을 존중하게 만든 위대한 반제국주의 혁명을 실현시킨 민족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과오가 적지않은 인물임에도 중국인들이 결코 위대한 조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죠.

 

중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중국의 중화주의적인 모습에 반대하기도 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들이 많이 읽히고 강조되기도 하지만, 정작 현대 중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인들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근현대 중국의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참으로 많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한국하고는 한국전쟁에서의 관계도 결코 적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현대 중국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선 마오쩌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국내에는 제법 큼지막한 마오 전기들이 있는 편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제가 읽었던 마오쩌둥 전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사진에 나온 책들은 에드가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 알렉산더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 그리고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2부작입니다.

 

마오쩌둥은 공과 과가 매우 뚜렸한 인물입니다. 그는 위대한 혁명가였지만, 무자비한 파괴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 파괴자의 면모는 문혁의 광기로 잘 드러났죠. 에드거 스노의 붉은 별은 읽는 이로 하여금 대장정에 나섰던 혁명가 마오쩌둥의 위대한 혁명적 생애를 알려줄 것입니다. 르포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분들이라면 분명 맞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알렉산더 판초프나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스노의 책에 비하면 매우 학술적인 책입니다. 무엇보다 읽을 거리가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완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혁명가적 생애와 무자비한 파괴자의 생애를 같이 알 수도 있습니다. 판초프가 쓴 평전보단 필립 쇼트가 쓴 평전이 보다 마오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입니다. 아무튼 이 책들은 마오쩌둥을 알기 위해 읽어야할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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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2-20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 참 복잡한 인물입니다.. 얼른 이 리스트에 있는 책들 읽어봐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ㅠㅠ

NamGiKim 2021-02-20 00:49   좋아요 1 | URL
네 복잡한 인물이죠. 필립 쇼트의 마오 전기를 1달 전 쯤에 읽기 시작했는데, 요즘 복학하고 이것저것 복잡다다한 일들이 많다보니 진도가 잘 안나가네요. 그래도 2부에서 대약진 운동까지 읽었으니 복학하기 전까지는 읽을 것 같습니다.

MSS 2021-02-2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트 책 제대로 읽진 못했지만... 디쾨터의 악의적 왜곡을 비판하는 부분은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NamGiKim 2021-02-24 11:08   좋아요 0 | URL
그 내용이 개정판 후기에 나올겁니다. 그 대약진 운동 부분에 달린 주석들을 보면 거기서도, 디쾨터가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것이 나오죠.
 

(이 글은 존 톨랜드의 저서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개양상은 엄밀히 따지자면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과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등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전쟁이었다추축국 안에도 헝가리나 루마니아 그리고 불가리아 등에서 차출된 그 나라 병력들이 있었지만그래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독일의 동맹세력으로써 알려진 이는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일 것이다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추축국(Axis Power)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적인 나라들이었다그러나 일본은 지구반대편에 있었고지정학적인 부분에서 나치독일의 동맹국은 사실상 이탈리아 밖에 없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파시스트 선배다. 물론 1930년대 히틀러의 독일이 성장하고 군사력을 발휘하면서 그 위치는 히틀러가 더 앞서게 됐다.)

 

그러나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무능력한 군대였다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의 침략은 거의 다 실패를 맞보아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는 신세였다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침공은 이탈리아군의 무능력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또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빨치산에게도 연전연패를 맞보았다북아프리카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탈리아군은 영국군에게도 계속 패배를 맞보았다.

(오토 슈코르체니, 히틀러가 아끼던 군인으로 ss친위대 소속이었다. ss에 있으면서 여러 특수작전을 전개했었다.)

 

이처럼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독일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독일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던 형편이었다북아프리카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42년과 1943년 이탈리아는 영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다거기다 독일의 롬멜 장군이 투입됐던 북아프리카 전투도 1943년 5월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그로부터 2개월 뒤인 7월 연합군은 이른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을 감행하여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24일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위협을 가하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포함한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를 축출하려고 했다결국 왕에게 사임 요청을 받은 무솔리니는 실각했고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행정수반으로 임명됐다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바돌리오는 두 달 뒤인 1943년 9월 8일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특공대, 여기에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도 투입됐다.)

 

당연히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체포된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161km 떨어진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그란사소 꼭대기 부근의 한 호텔에 감금되어 있었다거기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따라서 히틀러는 비록 도움은 안 되는 인물 무솔리니를 구출하기로 결심한다이것은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도 이 선택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고그렇게 해서라도 연합군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호텔과 인근 지역 위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위해 히틀러는 SS친위대 대위인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를 불렀다그는 키 190cm인 인물로 특수작전에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오토 슈코르체니 휘하의 특공대가 편성되었다이 특공대는 독일 공수부대인 팔슈름 야거 출신들이었다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오토 슈코르체니와 107명의 특공대는 9월 12일 일요일 오후 1시 글라이더에 오라 이륙했고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던 곳에 착륙했다글라이더에서 나온 독일 군인 4~5명이 기관총을 설치하였고슈코르체니의 글라이더는 호텔에서 18m도 안 되는 거리에 착륙했다슈코르체니의 부대원들은 저항하는 경비병력을 쓰러뜨리고 무솔리니가 있는 방문을 열고 그를 구출했다.

(호텔 근처에 착륙했던 독일 특공대의 글라이더)

 

무솔리니를 만난 오토 슈코르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그것은 지도자가 나를 보냈다당신은 이제 자유다였다이를 들은 무솔리니는 슈코르체니를 껴안았다고 한다또한 무솔리니는 나의 친구 아돌프 히틀러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특공대원들에게 엄청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한다무솔리니를 구출한 특공대원들은 목초지 경사면에서 겨우 안전하게 착륙한 피젤러슈토르히 소형 비행기에 올랐고이륙 과정에서 불가피할 추락의 위험이 있었지만비행기는 이륙했다.

(교전을 치르며 호텔 진입을 시도하는 독일 특공대)

 

구출된 무솔리니는 9월 14일 아침 일찍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여 히틀러를 만났고매우 고맙다는 표시를 히틀러에게 했다이 작전을 성공시킨 오토 슈코르체니는 영원히 히틀러가 아끼는 군인이 되었다거기다 무솔리니가 구출되자 독일인의 사기가 올랐다물론 히틀러가 그를 구출한 것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따라서 구출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즉 살로 공화국을 수립했다.

(구출되어 비행기에 오른 무솔리니, 오토 슈코르체니와 함께 찍었다.)

 

그러나 살로 공화국은 군대가 그리 많지 않았다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대부분의 군대는 독일군이었다거기다 1941년에 점령되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선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권력 공백기를 틈타서 유고슬라비아 내에 있던 이탈리아군 거점 지역들을 단숨에 접수해버렸다따라서 거기서도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군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결국 살로 공화국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독일 꼭두각시 노릇(그 이전부터도 사실상 꼭두각시였지만)을 하다가 1945년 4월 25일 공식적으로 사라졌다그리고 무솔리니도 이탈리아 빨치산 유격대에 체포되어 총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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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도)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떨어진 류타오후에서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주철도를 달리던 특급열차는 달리던 중 폭음을 듣게 됐다다행히 폭발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파괴되지 않았고제 갈 길을 달렸다같은 시각 철도 주변에는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고이들은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그 시각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이렇게 해서 일본군과 중국군간의 전투가 시작됐다이것이 바로 1931년에 일어난 일본의 만주사변이었다.

 

지난 1920년대의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긴 했지만중국 대륙의 영토를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본격화 하지는 못했다그러나 1931년의 일본은 비록 만주이긴 해도 중국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나갔다이것은 1937년에 일어날 중일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몇몇 학자들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로 나가는 방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도대체 왜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일까?

(검은 화요일,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을 불러 일으켰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일본 정부는 기업의 도산 사태를 막기 위해 진재어음을 발행하는 것으로 수습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1927년에 이르러 일본의 만성적 불황은 금융공황으로 비화됐고가까스로 수습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1929년 만성적 공황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다른 일이 일어났다바로 그해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해 세계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검은 화요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경제 대공황은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특히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의 경우 1924년부터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자직격타를 맞았다일본 또한 경제 대공황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경제 대공황으로 수출 시장이 축소되고공업 생산이 급감했다이것은 일본의 임금 하락과 실업 증가로 나타났으며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여기서 일본이 선택한 노선이 바로 팽창정책이었다.

(만주사변 당시 중국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과 기병대)

 

사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이후부터 만주 지역을 독점 하고자 했다. 1912년과 1916년 그리고 장작림 폭사사건에서 비롯된 1928년의 사건은 일본의 만몽 자치운동을 사주하려는 계획의 결과였다즉 일본은 예전부터 만주지역을 탐내고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미국발 경제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아시아 문제를 무관심하게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인 만주침략을 가속하 하기 위한 내적 혹은 외적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 소총 대대)

 

1931년 9월 18일 밤에 철도가 폭파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됐다다음 날인 19일에는 관동군에서 조선군 사령부에도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고대략 4천 명으로 구성된 조선군과 2개 비행중대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또한 펑톈을 방어하는 동북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240mm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공격 앞에 중국군은 패주했다이후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병기창동대영이 잇따라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일본 관동군의 수중에 들어갔고그날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장춘도 함락됐다그 다음 날인 21일에는 지린 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점령됐다이렇게 해서 광대한 남만주 지역이 거의 2~3일 만에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만주에서 진공중인 일본군 관동군 소속 육군 부대)


(1931년 9월 19일 새벽 장학량 군대를 공격해서 펑톈 성을 장악한 것을 환호하는 일본 관동군)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일으켰다하지만 국제연맹은 무능함만 드러냈다거기다 미국은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일본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과거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었던 영국도 일본편을 들었다어쨌든 일본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는 전혀 없었다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를, 2월 5일에는 하얼빈을 점령했고만주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장학량은 국민당의 장제스 밑에서 있었는데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 사변 당시 방어진지에서 전투중인 중국 국민당군)


(상하이에 입성한 일본군 89식 전차)

 

1931년 만주를 손쉽게 장악했던 일본은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중국 본토에서도 전투를 전개했는데그것이 바로 상하이 사변이었다당시 일본은 상하이에서 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만주에서 상하이로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게 해서 만주 전역을 장악하겠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상하이와 앙쯔강 일대에 배치된 해군력을 강화했다항공모함을 포함한 군함들을 그곳에 증파했고상하이 지역에 일본군 병력을 증원했다또한 장제스도 그곳에 병력을 배치했고이렇게 되면서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상하이 사변 당시 독일제 트럭을 타고 시내오 진입한 일본군)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를 거두고 환호하는 일본군들)

 

전투는 1932년 1월 28일에 일어났다당시 중국군은 3만 3,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반면일본군은 6천 명에 불과했다그러나 일본군은 30척의 군함과 최소 4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야포와 장갑차 수십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즉 화력이나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훨씬 압도했던 것이다양측의 전투는 매우 치열해졌고초기에 일본군이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지만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2월 9일에는 일본군 또한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2월 24일에 일본군 2개 사단이 증원되면서 점차 승기를 잡았다. 1932년 3월 1일 네 번째 총공격에서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일 뒤인 3월 3일 양측은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2020년에 만들어진 중국 영화 800, 제1차 상하이 전투 당시의 전투를 다룬 영화다.)

 

상하이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2달간 전개됐던 이 전쟁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던 일본군은 3,091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반면 중국군은 1만 4,326명이 나왔다고 한다이후에도 일본군은 국지적인 충돌을 계속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목표 자체는 만주지역 점령과 만주국 수립에 있었기에 전투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선에서 국제적인 합의를 봤다상하이 사변 이후 일본은 이를 승전으로 홍보했다.

(만주국 초대 내각)


(만주국 괴뢰 황제 푸이)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 있는 홍커우 공원에서는 일본군의 전승행사가 열렸다그리고 그 전승행사에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시께미스 마모루 등을 포함한 7명의 일본측 대표들이 누군가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끄는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윤봉길 의거였다비록 상하이 전투에서 장제스는 패배한 입장이었지만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을 듣고이에 감동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상해사변 승전 기념식에서 터진 폭탄, 이 폭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인 윤봉길이 던진 것이었다.)


(윤봉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이후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것은 임시정부 주석이던 백범 김구가 계획했던 일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임정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된다.)


(윤봉길의 유서)

 

상하이 사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내세워 이른바 만주국이라는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었다따라서 일본은 본인들이 목표했던 것을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상하이 사변 당시 일본은 국제적인 반대에 시달렸는데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1933년 3월 27일에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같은 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거기다 히틀러의 파시즘적 형제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미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본의 만주 침략과 시작된 1930년대는 암흑의 터널을 통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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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2-2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주국에 대하 쓰신 글을 보니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떠오르네요^^

NamGiKim 2021-02-21 14:41   좋아요 0 | URL
푸이를 보살펴주던 중국 공산당 출신의 인물이 있었죠. 나중에 문혁으로 죽게 되지만ㅠ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