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
길(도서출판)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2012101일 영국의 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9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살아온 인물이었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이다. 젊은 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에릭 홉스봄은 생전에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4대 저서인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성과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책들이다.

 

필자는 올해 초 SNS상에서 잘 알고 있는 한 동지로부터 에릭 홉스봄의 저서를 알게 됐다. 이에 따라 필자는 그가 집필한 극단의 시대를 전 페이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 참고할 용도로 읽게 되었는데,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20세기의 역사를 조명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가 인식한 냉전에 대한 관점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저서 극단의 시대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명저지만, 지난번 액기스로 읽은 그 책을 뒤로하고 필자는 이번에 그의 저서인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을 읽었다. 이 책이 더 끌렸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의 책 표지가 끌렸기 때문이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총 5부로 나뉘어있다. 공산당의 투쟁을 다룬 1부와 아나키즘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다룬 2,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다룬 3, 군인과 게릴라를 다룬 4부 그리고 반란자와 혁명을 다룬 5부로 나뉘어 있다.

 

아나키즘에 대한 그의 성찰 및 날카로운 비판은 상당히 볼만 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대책성을 홉스봄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와 동시에 홉스봄은 과거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에 헌신하여 기존의 체제를 타파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부분을 인정하기도 한다. 즉 홉스봄은 아나키즘의 양면을 아주 잘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각 당의 공산당의 역사적 사건과 활동들을 통해 유럽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조명한다. 그는 기존에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머물러 있는 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그 자체를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에서 홉스봄은 필자와 좀 다른 견해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그가 끝까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믿었다는 점에서 그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장인 5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체로 68혁명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은 좀 구식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 나름 고찰해볼만한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는 68혁명에서 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의 분석은 생각보다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는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적합한지 그 대안이 뭔지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준다.

 

책의 제4부에서 다룬 군인과 게릴라 파트에서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 게릴라 투쟁을 통해 게릴라전의 특성과 본질을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베트콩은 민중과 함께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그는 이에 맞서는 미국은 그런 게릴라전의 본질을 쉽게 무시하고, 거기에는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가 분석한 게릴라에 대한 내용도 상당히 감명 깊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1960년대(특히 68혁명을 전후로 해서)1970년대 그가 쓴 논문들을 모으거나 핵심을 간추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분석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의 글들이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에는 그가 끝까지 영국 공산당에 남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았던 행적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홉스봄 나름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역사와 주제를 분석한 책이기에 읽어볼 가치가 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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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11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12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10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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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ISIS에 빠지는가?

넷플릭스(Netflix)에서 내 흥미를 아주 자극한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스웨덴에서 제작한 8부작짜리로 2014년과 2015년 당시 돈바스 전쟁 관련한 뉴스를 잠식시키고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ISIS를 주제로 했다. 바로 ‘칼리프의 나라(Kalifat)‘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리아 리카에 위치한 ISIS에 합류했다 그들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에 기겁하여 탈출을 하려는 부부, 스워덴에서 살다 자신이 차별받는다 생각하여 ISIS에 심취한 10대 소녀들, 스웨덴에서 테러행위를 준비하는 ISIS 그리고 그걸 막으려는 스웨덴 경찰당국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만든 드라마이기에 2015년 스웨덴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나라 스웨덴의 이미지는 부유함, 복지국가, 아름다운 자연환경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부러움을 사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ISIS에 가담하려는 애들이 있으니 어떤이들은 놀라움 내지는 충격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왜 ISIS가 되는 걸까? 드라마 보는 내내 이들이 ISIS가 되는 동기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생각해보게 됐던것 같다. 그들이 ISIS가 되는 이유에는 기본적으로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의식과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가 우리 종교를 차별한다는 의식˝이 존재한다. 그런 의식 속에는 전쟁과 파괴로 얼룩진 중동의 역사가 있고, 그 중동분쟁의 원인인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

1970년대 중동전쟁으로 빗어진 오일쇼크, 1991년 걸프전쟁과 2001년 9.11테러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라는 역사적 흐름에는 무슬림들이 그들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런 일련의 사건에서 빚어진 전세계적인 이슬람 차별도 그들이 ISIS가 되는 이유였다. 실제로 2000년대 미국이 중동분쟁에 기름을 부으면서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는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억압받고 차별받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동기부여로 작용했다.(실제로 ISIS들도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하고)

2014년에 등장한 ISIS의 특징은 아마도 전 세겨적으로 자원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심지어 이슬람 신자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ISIS에 가담하는 한국인도 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즉 ISIS는 불행한 가족사가 있거나 종교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접근하여 자신들 편으로 끌어 들였다. 그렇게 끌어들아 사람들을 모아 소위 지하드라는 이름하에 자신들의 율법과 교리를 강요하고, 그들에게 폭탄테러와 같은 자폭행위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라의 이름으로 합리화 된다.

드라마에는 종교가 한 개인에게 강요하는 잔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것이 다 알라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맹신적 믿음이 어떻게 악의적으로 이용되는지,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드라마에서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드라마 칼리프의 나라는 ISIS가 일반사람을 현혹시키는 방법과 ISIS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이 벌이는 과정을 아주 긴장감 있게 그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칼리프의 나라라는 제목과는 달리 ISIS 치하 일반사람들의 삶이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ISIS 치하의 삶을 아주 긴장감 있게 잘 소화했다는 점은 이 드라마의 장점일 것이다. 중동문제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드라마를 적극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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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Netflix)에 있는 쿠바 리브레 스토리(Cuba Libre Story)’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평소에 쿠바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로썬 참으로 반가운 다큐멘터리였고, 바쁜 와중에도 이 다큐멘터리를 챙겨봤다. 다큐멘터리는 쿠바 역사의 시작부터 오바마 정부 시기까지의 쿠바 역사를 다뤘고, 8부작으로 구성됐다. 8부작 안에는 수백 년간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와 수십 년간의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 맞서 자유와 독립 행복을 찾아나서는 쿠바의 역사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매우 가까이 있는 쿠바는 수백 년간의 스페인 식민지 지배와 50~60년간의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다. 1492년 인도와 향신료를 찾기 위해 쿠바를 방문한 콜럼버스는 그 지역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수백 년간 이어질 스페인 지배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1898년에 일어난 미서전쟁(American Spanish War)은 사실상 미국과 스페인 이 두 제국주의 국가 간에 일어난 식민지 쟁탈전이었고, 전쟁의 승자가 된 미국은 쿠바에게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이 부여한 독립은 또 다른 식민지배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기업들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잠식해 나갔고, 쿠바를 사실상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는 냉전시기에도 계속됐다. 그러던 1959년 이런 미국의 지배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이었다. 이들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대략 3년간 쿠바의 정글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여왔고, 1959년 수도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써 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정권을 잡게 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있는 미국 기업과 마피아들의 생산수단을 국유화 하여, 쿠바 인민들을 위한 여러 조치를 실행했다. 당연히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의 이런 조치에 경제제재를 걸었고, 쿠바와의 수교를 끊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수십 년간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다큐멘터리는 쿠바의 총체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쿠바 망명자와 같은 우익 성향의 인물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지만, 쿠바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 세대들까지 인터뷰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어떤 면에선 우익적인 시각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를들면 쿠바의 카스트로가 우상화를 했다던 지 혹은 독재와 사치를 부렸다는 얘기를 강조하는데, 솔직히 사치나 호화스러운 생활 문제라면 쿠바 위에 있는 나라 미국 정치인들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들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시각은 필자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줬다.

 

이런 약간의 오류 내지는 우익적 관점을 배제하면 이 다큐멘터리는 정말 잘만든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문제가 있지만, 쿠바의 무상의료나 그외의 사회주의적 성과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는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의 보루로서 서 있다는 사실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쿠바 혁명에 참가하거나 쿠바를 지켜왔던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쿠바 사회주의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다큐멘터리를 대체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1959년 쿠바 혁명 성공은 미국에게 있어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전의 바티스타 정권은 말 그대로 이승만이나 응오딘지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마르코스, 수하르토처럼 미국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미국에게 있어 쿠바는 자신들을 가장 잘 따르는 구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혁명이 성공하면서 모든게 바꼈다. 더 이상 쿠바는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복종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적인 변화를 통해 이에 저항했다. 그러자 미국은 혁명정권이 된 쿠바를 전복시키고자 여러가지 교활한 수법을 사용한다.

 

1961년 미국의 존F케네디 정권은 1500명으로 구성된 쿠바 망명자들을 상륙시켜 침공을 가했다. 이게 바로 피그스만 침공이었다. 피그스만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피그스만 침공 이후 미국은 쿠바 정권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바탕으로 한 쿠바 상륙훈련을 전개했다. 즉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미국은 군사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결국 쿠바에게 있어 선택지는 하나였다. 당시 미국과 체제 경쟁중이던 소련과의 관계를 넓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으로 부터 대규모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받았고, 1962년에는 미국 영토 코앞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사실 소련과 쿠바가 미국 앞에 핵미사일을 배치한 것은 미국이 소련 국경 근처인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여 수도 모스크바까지 날릴 수 있는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련도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빚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소련이 미국에게 굴복하게 됨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사실 카스트로는 소련과 미국이 자기들끼리 협의한 것에 매우 분노했지만, 소련의 흐루쇼프가 그를 달래는데 각고한 노력을 했다. 그는 카스트로를 소련에 초대하여 전국적으로 돌아다니게 했고, 소련에서 최고 훈장이기도 한 레닌 훈장을 수여함과 동시에 영웅으로서 아주 극진한 대접을 해줬다. 뿐만 아니라 쿠바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도 늘려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의 한 보루로서 설 수 있게 도왔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미국의 탄압과 억압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바도 1991년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경제난이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버텨냈다. 또한 쿠바는 국제주의 원리에 따라 의사들을 보내 여러나라와 협력하고 그들을 지원했다. 대표적으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원이 그러했다. 1970년대 쿠바는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여 혁명세력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 쿠바 리브레 스토리를 통해 이런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쿠바 혁명 참전용사의 한 인터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과거에도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나는 그것이 정의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설 것이고, 제국주의 압제에 맞설 것입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인 발언이다. 이 발언에서 쿠바 인민들 대다수가 가난한 인민들과 약자의 편에 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유와 독립 그리고 행복을 찾아나서는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켜 그런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켜온 피델 카스트로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필자는 그렇게 살다가 2016년에 생을 마감한 그를 매우 존경한다.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정서가 강한 한국에는 쿠바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대다수 한국인이 생각하는 쿠바의 이미지란 낙후 내지는 가난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뤄내지 못한 가치와 인권을 이룩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쿠바의 차이다. 쿠바의 역동적인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 다큐멘터리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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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
아담 맥케이 감독, 크리스찬 베일 외 출연 / 인조인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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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를 조종한 최고 권력자

지난번 거의없다 유튜버가 만든 4.15 투표 독려 영상을 봤다. 거의없다의 영상에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 한편이 소개되었고, 그는 그 영화를 감상하기를 적극 추천했다. 그 영화가 바로 아들 부시 시절 부통령(Vice President)를 지낸 ‘딕 체니(Dick Cheney)‘의 인생을 블랙코미디로 접근한 영화 바이스(Vice)다.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는 아들 부시가 대통령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했던 인물로 소위 네오콘 세력을 이끈 인물이었다. 딕 체니와 아들 부시의 관계는 한국의 박근혜와 최순실의 관계와 비슷하다. 아들 부시는 딕 체니에게 의존했던 인물이다.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이 9.11테러를 주도했을때, 그 충격과 혼란속에서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획했다. 그래도 중동과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알 수 없는 공포가 미국인들에게 사라지지 않자, 그들은 희생양을 찾기시작했다. 희생양이 된 나라가 바로 이라크다.

이들 또한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터무니 없는 정보조작과 정치선동을 통하여 2003년 이라크를 침략했다. 이라크 전쟁 개전 초기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하고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는 과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침략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으로 포장됐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얻은 것은 없었다. 개전 초기의 전황과는 달리 이라크 전쟁은 역으로 극단적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이들이 게릴라전으로 나서면서 미국은 이라크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또한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들었던 신무기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딕 체니는 자신이 CEO로 있던 석유회사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라크 침공 과정에서 미국은 최소 60만 명의 이라크 민간인을 학살했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를 가졌던 미군은 포로 수용소에서 이라크군 포로에게 기행적인 고문과 폭행을 저지른은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러한 고문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금지된 행위였지만, 민주주의와 테러리즘 박멸이라는 명분아래 일방적으로 허용됐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딕 체니가 보인 모습은 반성없는 철면피였다. 그는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로 기업 이윤을 창출했음에도 반성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이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진실이 탄로났음에도 여전히 구차한 변명으로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영화 바이스는 명분없는 전쟁을 일으킨 인물이자 미국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는 딕 체니의 인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과거 그가 CEO회장이었던 도널드 럼즈펠트 밑에서 비서로 있을때,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이 있었다. 그 침공은 럼즈펠트와 공화당 각료에 의해 결정됐다. 그는 닉슨 정부가 베트남 전을 확전하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럼즈펠트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고 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럼즈펠트는 이에 낄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온 딕 체니가 얘기하듯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부와 권력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려 했던 관료들이었고,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할 뿐이다. 결국 그런 그들의 행동과 욕심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전쟁범죄를 양산해 냈고, 중동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고, 하지 않고 있다.

주인공 딕 체니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거라고 하며 적반하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국민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뽑았고, 난 국민의 부름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한다. 그렇기에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다가선다.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가 보여주듯이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안다. 어리석은 선택은 결과가 무엇인지 말이다!

오랜만에 정말 의미심장한 영화 한편을 봤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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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5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라크 침략 전, 미국은 이라크에 경제 제재를 가해 200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중 50만 명이 5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