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인가 생존인가 -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노암 촘스키 지음, 황의방 외 옮김 / 까치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폭력과 왜곡 그리고 프로파간다로 점철된 미국의 패권주의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유엔연설을 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소개한 책 한권이 있다. 차베스는 유엔연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패권정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책 한권을 소개했다. 바로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쓴 <패권인가 생존인가(Hegemony or Survival)>이다.

베네수엘라의 진보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전쟁기계는 자신들의 점령지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온갖 제재와 악행을 일삼았다.

혁명가 차베스는 제국주의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신제국주의 국가가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여론조작의 달인이며, 파괴본성을 버리지 못했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런 차베스가 많이 공감한 책이 바로 촘스키의 저서 <패권인가 생존인가>였다.

책은 2003년 미국이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했던 패권정책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며, 이들의 전략이 얼마나 많은 국가들을 빈곤과 파괴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얘기한다.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발발한 1991년 걸프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중동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연합군 300명이 죽을 때, 이라크군 수만 명이 죽는 수준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해제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엔을 동원하여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라크의 아이들 50만 명을 포함하여 125만 명이 아사했다. 의도적으로 죽음을 만들어 놓은 미국은 이것을 가치있는 희생이라고 미화했다. 네오콘인 매를린 울부라이트는 방송에 나와서 ˝이라크 사태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제재를 통한 살인은 엄밀히 따지면 범죄다. 그러나 미국은 제대로 규탄받은 적이 없다.

미국은 타국 지도자에 대한 악마화에도 뛰어나다. 이집트의 초대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제3세계 진영에 들어가자, 미국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제3세계 진영에 있으며 반미노선을 걷자, 마찬가지로 그를 히틀러와 같은 존재로 악마화했다. 미국의 이런 악마화는 카다피, 김정일, 차베스, 모랄레스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전가됐다. 이 지도자들이 미국과 다르게 타국을 침공하지 않았지만, 미국에게 이들은 그저 악의 축으로 규정되어야할 대상이었다.

언론 보도들 또한 조작과 편향이 넘친다. 미국은 제국주의적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우방으로써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대상으로 온갖 폭력과 범죄행위를 저질렀고,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도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때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을 테러리즘에 자주 비유했다. 물론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이 테러를 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한 것은 미국에 의해 여론조작되어 과장보도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폭격하고 탱크로 밀어 거기 있던 장애인이 죽자, 미국은 이를 절대적으로 침묵했으며 보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러한 조작과 프로파간다는 1857년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할 때 사용하던 논리와 일치한다.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언론들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인도인들이 무고한 영국인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학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영국 지배자들은 이 항쟁을 진압한뒤, 저항에 참가한 인도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온갖 잔혹행위들을 저질렀다. 무수히 많은 인도인이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영국 지배층은 이를 폭동진압으로 미화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하던 여론조작은 현재 미국이 패권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미국은 무수히 많은 타국 민간인을 죽였다. 한국전쟁 당시 공중 폭격으로 북한은 초토화 되었고 대략 10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한 인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2003년 일으킨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패권주의는 파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2004년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이 책은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미국의 추악한 패권정책의 민낯을 밝힌 책이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자연 스러운 번역투와 철자오류들이 다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한 명저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2022년 미국은 다시한번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대규모 군사 개입을 할까? 앞으로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은 그런 위험한 도박을 자신들의 자본축적과 이윤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가 종식되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보이는 위선을 이해하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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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구 인터넷에서 한 유튜브 동영상이 논란이 되었다. 그 동영상은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쓴 미국인 남성이 러시아군의 기갑 행렬 앞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이 미국인은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들과 함께 전선에 있다고 말하며, 우크라이나의 좋은 사람들을 돕고 나쁜 사람들을 박살낼 것이라고 말한다. 유튜브의 친러시아 동영상 검열에 따라 곧바로 삭제되었지만, 트위터 등을 통해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2014년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을때, 여러 나라에서 돈바스 주민들의 항쟁을 도와 마이단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서유럽 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돈바스로 간 자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오늘 소개할 미국인 사회주의자 러셀 벤틀리이다.


러셀 벤틀리는 텍사스 출신으로, 1960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동네인 텍사스에서 자란 부잣집 아들이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저작들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들이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고, 피델과 체의 혁명은 쿠바를 도박장이자 매음굴로 만든 외국인들을 몰아낸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벤틀리는 중학교를 중퇴한 뒤 검정고시를 보고, 미군에 입대해 독일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후 텍사스 해안으로 돌아가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고 록 밴드 활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쿠바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벤틀리는 쿠바에서 쿠바군 장교를 만났는데, 그 장교는 벤틀리에게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벤틀리는 "나는 겁쟁이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가 된 벤틀리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996년 미네소타에서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하다 대마초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99년 탈옥하기도 했으며, 이후 워싱턴 주에서 살며 시애틀에서 열린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밖에 걸프전 반전 운동,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의 인권 신장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다 2007년 재수감되어 2012년에 석방되었다.


그레나다 침공, 유고내전 개입,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 등을 겪으며 조국 미국에 대한 벤틀리의 실망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2011년 미국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을때, 그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마이단 쿠데타가 일어났다. 벤틀리는 이 쿠데타를 미 국무부와 CIA가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바라봤고, 오데사 학살 사건으로 반 마이단 시위대들이 마이단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며 친러 분리주의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이단 정권이 들어선 후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되었다. 벤틀리는 루간스크 시가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롤링스톤 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공습으로 다리가 잘린 채 죽어가는 여성을 언급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잡고 평화를 외치며 미국을 횡단할 건가? 아니면 쿰바야(아프리카 영가)를 부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니, 난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벤틀리는 그의 다짐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러시아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는 도네츠크로 간 후 이탈리아 출신의 자원병을 만났고 그를 통해 도네츠크 민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 였고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지만,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군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텍사스'라는 호출부호로 불리며 도네츠크 공항 등 격전지에서도 싸웠고 "자유 돈바스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유튜브에도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벤틀리는 자신은 자원병이며, 아무에게도 돈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그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시민권을 받았고, 2020년에는 러시아 시민권도 얻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전쟁에 대해 "빌어먹을 미국 정부가 8년 전에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가 끝내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라고 평하며, 푸틴에 대한 지지와 젤렌스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젤렌스키를 "그는 광대, 꼭두각시고 약쟁이다. 말그대로 마약중독자다. 그는 포로셴코처럼 훈련받은 원숭이다. 워싱턴의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가. 젤렌스키는 포로셴코보다 더 한심한 아첨꾼이다."라고 평했다.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서구 언론의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다거나 우크라이나군이 이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도(당시는 4월 1일)들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진격이 느린 것은 우크라이나 군과 그들의 나치 부대가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으며 러시아군이 집집마다 확인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인간 방패는 우크라이나군의 전략 중 하나이고 그들은 믿을 수 없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나치 대대들은 진짜 나치들이다. 스와스티카 문신을 하고 '하일 히틀러'나 '반데라 만세'를 외치고 다닌다. 반데라는 나치 협력자이자 끔찍한 전범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돈바스 주민들에 대해 "지구의 소금이자, 인간성의 정수"라고 극찬하면서 교양적이고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벤틀리는 8년째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사실상 미국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있지만 가족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는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이념을 사랑한다. 나는 미국인과 미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 "나는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의사는 없음을 밝혔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애는 여기서 하는 것처럼 미국을 해방하는 러시아 전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맨몸으로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며, "난 미국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 난 DPR 여권을 갖고 있고,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시민이고, 러시아 시민이기도 하다. 난 작은 집과 큰 마당, 아름답고 똑똑하고 강한 훌륭한 아내가 있다. 그녀는 3개 국어를 하고 90%의 미국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여기 말고 살고 싶은 곳은 없다."라고 도네츠크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러셀 벤틀리의 일생으로, 롤링스톤과 뉴스위크, 스푸트니크의 인터뷰를 참조했다. 본래 롤링스톤의 기사 전문을 번역하려 했지만 서구 주류 언론인 롤링스톤답게 벤틀리를 미치광이 음모론자로 묘사하고, 기사 중간중간에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을 끼워넣고, 도발, 조롱이 목적인 질문도 서슴치 않는 내용이라 번역하기엔 불쾌감이 느껴져 벤틀리의 일생 부분만 참조하고 거기에 뉴스위크와(여기도 부정적인 논조지만 롤링스톤보단 온건함) 스푸트니크의 기사를 참고해서 작성했다.


아래부터는 2018년 좌파 유튜버 'TheFinnishBolshevik'가 인터뷰한 내용 중 돈바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답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질문 5: 당신은 이전의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왔다. 당신과 당신의 조직인 'Essence of Time'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노보러시아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기본적 구조들이 여전히 돈바스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답: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방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을 비웃는다.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 겁쟁이, 얼치기들로, 그들의 공산주의는 아마존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사는 것, 그리고 아마 끝없이 인용할 수 있는 한두권의 책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서방에 앉아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벽한 예다. 그들은 실제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 보다 동지를 비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서구의 아무 "공산주의자" 그룹에게 실제로 나치를 죽였는지 물어봐라. 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천 배를 더 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는 사람들은 경멸할 가치도 없다. 내가 1995년 쿠바에 갔을 때, 쿠바 육군 대위와 아주 계몽적인 토론을 했다. 나는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내가 둘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다." 기꺼이 싸우겠다는 것은 기꺼이 죽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서방에는 공산주의자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와 'Essence of Time'의 내 동지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을 얻었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


DPR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료다. 식품, 에너지, 주택, 교통과 통신비는 서방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질은 더 좋다. 이것은 좋은 시작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서 이긴 사회주의이다. 이것과 동일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은 우리를 비판하거나 조언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이나 하러 가라.


질문 6: 위키피디아같은 일반적인 인터넷 자료를 통해 돈바스 전쟁을 조사해 보면, 노보러시아 군대에서 싸우는 부대 목록에 민족볼셰비키, 러시아 국민 연합, 세르비아 체트니크 같은 대부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대할 극우 부대들이 있다. 이것은 서방의 많은 좌파들에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관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자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 나치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노보러시아쪽에도 나치와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익 부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이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볼 것이다.


답: 전쟁 초기 노보러시아 군대에 "민족주의자"들이 일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나와 함께 전선에서 싸운 사람들은 나치 문신이나 나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우지 않을 것이다. 노보러시아 군에는 카자크나 심지어 왕정주의자까지도 있지만 그들은 파시스트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 옆에 서서 나치와 싸우는 전우들이다.


돈바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는 나치나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다이다. 그건 "공산주의는 나치만큼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멍청한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공산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혁명적 운동 중 하나를 지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다. 비겁함과 위선의 반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파시즘과 싸워 이긴 사람들에게 부적절하고 자격 없는 비난을 한다.


질문 7: 돈바스 지역은 사회주의 이념과 반파시스트 정신의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탄생한 곳이며, 2차 대전 동안 돈바스는 나치 독일에 영웅적인 저항을 했고, 최근까지 오데사는 수백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매우 다문화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당신은 노보러시아 사람들이 소련 시절의 향수나 민족적 자부심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답: 도네츠크도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이고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1869년 존 휴즈가 이곳에 제철소와 탄광을 지었을 때, 그는 전세계에 이곳에서 좋은 일자리와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100개 이상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도네츠크로 이주했고, 그 후 "유조브카"(도네츠크 시의 옛 이름)라고 불렸다. 돈바스 지역은 역사적으로 소련에서 가장 굳건한 공산주의적 지역 중 하나였다. 이 곳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이론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투쟁, 희생, 승리의 역사, 사회주의의 보상과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폐해에 대한 현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싸워야 할 때 기꺼이 싸울 것이다. 나는 돈바스 공화국이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의 선두이자 가장 좋은 예시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 8: 우리는 돈바스의 몇몇 공장들이 국유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유화가 얼마나 퍼져있는지, 이것이 경제의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답: 몇몇 공장과 기업체들이 올리가르히로부터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DPR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부유층을 부유하게 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도록 조정된다. 그것은 진행중인 과정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심지어 유럽연합 대부분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민의 뜻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9: 돈바스가 국교(동방 정교회)를 믿는 것과 공산주의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냉전기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종교는 권장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나? 해방신학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답: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신전에서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는 이곳에 정교회 사제인 친한 친구 3명이 있다. 그들 모두 DPR군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파시스트들 중 일부는 성직자다. 디트리히 본회퍼, 오스카 로메로, 베리건 형제,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


'Essence of Time'은 소련의 반종교적 측면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여긴다. 나는 공산주의와 종교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비록 나는 조직된 종교를 의심스럽게 보긴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기독교의 주요 종파 중 가장 부패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교회는 "국교"가 아니다. 이곳에 국교는 없다. 도네츠크에는 유대인, 개신교도, 무슬림들이 있으며 예배 장소도 있다.


질문 10: 당신은 돈바스에 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동영상에서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만약 돈바스에서 실업자가 된다면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길거리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가? 돈바스에선 직업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직업을 가질때까지 국가가 돌봐주는가? 돈바스에는 노숙자가 어느정도 존재하나?


답: 돈바스 인민공화국에는 노숙자가 없다. 말그대로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가 살 곳을 준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도 전기가 꺼지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거리를 청소하거나 공공 정원을 가꾼다. 꼭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임금은 적지만 먹고 살기엔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서방의 어느 곳보다 좋고,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질문 13: 돈바스 지역의 반군의 통제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러시아는 1990년 초부터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신은 그들을 제국주의자로 보는가?


답: 다시 말하지만, 바보와 거짓말쟁이들만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말한다. 돈바스 사람들은 외국에 의해 세워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리를 돕는다. 러시아는 많은 결점들이 있지만 제국주의는 그 중 하나가 아니다. 소련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곳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줬지만 그 장소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익이나 자원을 착취하지 않았다. 오늘날 돈바스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연방은 돈바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 러시아의 시리아 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은 서방보다 낫고, 러시아에서는 삶의 질이 계속해서 향상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자료


https://www.rollingstone.com/politics/politics-features/russell-texas-bentley-putin-propaganda-ukraine-interview-1315433/ 롤링스톤 기사


https://www.newsweek.com/russell-texas-bentley-interview-pro-russia-donbas-ukraine-1684450 뉴스위크 기사


https://sputniknews.com/20220401/nazism-is-disease-texan-came-to-donbass-to-protect-people--tell-the-truth-about-8-year-long-war-1094369347.html 스푸트니크 기사


https://mltheory.wordpress.com/2018/08/31/interview-with-russell-bentley-american-communist-in-donbass/ 인터뷰 전문


원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131032&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8F%88%EB%B0%94%EC%8A%A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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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국에 조금 어렵지만, 베트남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PBS 베트남 전쟁을 다시 보게 됐다. 4년 전에 이미 봤지만, 한 번 더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 1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보유한 작품이라 사실상 책 한 권의 분량이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로 보는 재미가 제법 있는 작품이다. 1화는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1961년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점에서 끝났다면, 2화는 존 F. 케네디 집권 2년 동안의 베트남 전쟁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격적으로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 전쟁을 다큐멘터리가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iding the Tiger 오프닝, 맥나마라와 케네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미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전쟁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독일과 일본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개입한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논리를 적용했다는 데 있다. 즉 미국은 오류가 없는 ‘선’이고, 미국의 적국은 오류가 많은 ‘악’인 것이다. 이러한 선악구도식 논리는 특히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세력과 냉전시기 경쟁하면서 많이 악용됐고, 베트남 전쟁도 그런 구도에서 미국이 침략한 전쟁이었다.


1967년 DMZ 근처에 있는 콘티엔에 배치된 미 해병대 참전용사인 존 머스그레이브는 자신이 젊은 시절 아버지나 삼촌 세대들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로 참전했었고, 이웃 아저씨나 집 근처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었다. 즉 그러한 사회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존 머스그레이브의 젊은 시절 사례는 적잖은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영화 <7월 4일생>을 보면, 주인공인 론 코빅 또한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 또한 어린시절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잖게 회고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서 깨진 것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 F. 케네디와 최고의 인재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와 베트남 정책을 추진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 잘생겼고, 똑똑하며 많은 이들에게 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참전용사는 “당시 나에게 존 F. 케네디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어요.”라는 찬양어린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던 1960년대 초반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점차 당기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본인은 고문단 지원을 통한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원했지만, 그가 고문단을 파병할수록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다.

(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오딘지엠, 친미반공주의자인 그는 남베트남 민중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른바 전략촌이라는 반민중적인 계획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다. 이들이 죽인 베트콩들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사실 베트콩과 민간인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다. 베트콩에게는 제대로된 군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민중적 정책은 오히려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을 베트콩 편으로 만들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야심차게 건설한 전략촌 대다수는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민중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무기나 물자 훈련면에서 당연히 남베트남 정규군보다 항상 열악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콩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충성심 경쟁에만 몰두했지, 베트콩과 싸우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치민과 레주언, 1959년 북베트남은 아이젠하워와 응오딘지엠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자, 남부통일을 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남부에서 혁명투쟁을 했던 레주언은 호치민보다 더 무력통일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존 F. 케네디는 반공국가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를 정부에 결집시켰다. 월트 로스토, 맥스웰 테일러,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등 미국 정치계나 경제계 그리고 군사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소위 존 F. 케네디는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ist)’을 결집시킨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이 점을 간과했다. 케네디 본인은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킨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케네디의 적이었던 호치민은 케네디가 그러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만의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켰다. 거기다 그들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또 독립을 쟁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케네디의 정책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응우옌응옥(Nguyen Ngoc)과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는 다큐멘터리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응우옌 응옥,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카오슈안다이,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호치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일부러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수염을 길렀어요. 모두에게 자신을 호 삼촌이라고 부르라 했어요. 일부러 아주 겸손한 이미지를 만들었고요. 항상 간단한 말을 썼어요. 사람들과 소통할 땐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습니다.”


“호치민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호치민은 우리에게 말했어요. 전쟁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겁먹지 않을 겁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프랑스 침략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참전용사 바오닌, 국내에도 번역된 <전쟁의 슬픔> 저자이기도 하다.)


(존 F. 케네디와 니키다 흐루쇼프)


(미군의 네이팜 폭격)


(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수송기)


(남베트남군을 훈련시키는 미군고문단)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을 믿었다. 반면 존 F.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은 사실상 대다수 농민을 적으로 규정한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케네디가 보낸 미군사고문단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를 지원하여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응오딘지엠 정부가 반공정책으로 죄다 적으로 만든 이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구금하고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그리고 전략촌 건설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1954년에 체결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인권’이라는 부분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행위였다. 

(전략촌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


(닐 시핸 기자, 196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심층보도를 했다.)


(존폴밴,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남베트남의 현실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닐 시핸기자가 쓴 <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으로 출판됐으며,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던 이들은 남베트남을 지지했지만, 남베트남군의 문제를 깨닫게 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고문단 및 주월미군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던 존폴밴(John Paul Vann)이다. 존폴밴은 전형적인 미국 군인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와 대중성 결여의 문제점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존폴밴은 주로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고문단 기지에서 초기에 근무했는데, 대다수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지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존폴밴이 보기에 남베트남군은 너무나도 부정부패한 집단이었지만, 그의 적이던 베트콩은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며 대중과 소통하는 세력이었다. 밴은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폴 하킨스에게 이러한 사정을 여러번 보고했지만, 하킨스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은폐했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의 작전도)


(압박 전투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 1951년 12살의 나이때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으며, 이후 미국에 맞선 전쟁에도 참전하여 베트콩으로 활약했다.)


(베트콩에 의해 격추된 헬리콥터)


(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의 스탬프)


결국 문제는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서 터졌다.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의 지원을 받은 15대의 헬기와 10대의 장갑차 그리고 최소 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베트콩 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투의 패배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됐다. 심지어 베트콩들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총기와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5대의 헬기 중 14대에게 손실을 가했다. 이 중 5대는 완전히 파괴됐으며, 장갑차 또한 막았으며 파괴했다. 당시 베트콩의 병력은 300명도 채 안됐다. 거의 1/6이나 적은 병력으로 화력과 병력이 뛰어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영광스럽게 승리했다.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압박 전투를 통해 응오딘지엠 정부의 지방 통제능력이 사실상 바닥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킨스는 압박 전투가 남베트남군의 승리였다고 오보를 했다. 압박 전투에 대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존폴밴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기자인 닐 시핸과 말컴 브라운 그리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이를 알렸지만, 결국 본국으로 잠시 송환되어 베트남을 떠나게 됐다. 압박 전투의 처참한 패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 정부는 자국 내 불교도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애초에 민중과 전혀 소통할 생각이 없던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그리고 제수인 쩐레쑤언은 가족 독재정치를 하며 자신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소신공양을 하는 틱광둑 스님)


(1963년 11월 쿠데타군에게 총살당한 응오딘지엠)


이들이 자행한 반민주주의적 탄압은 특히나 불교도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응오딘지엠 일가친척이 가톨릭 주교가 된 것은 축하해줬지만,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자 이들을 총기와 경찰력으로 진압했다. 불교도들을 탄압하며 이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베트콩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불교도 탄압에 맞서 1963년 6월 13일 수도 사이공에서 한 승려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교도인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자, 뒤를 이어 적잖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소신공양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이들 중에는 남베트남 의회정치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마져도 지엠 정권에겐 공산주의 동조자였다.


이들에 대한 지엠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도 기가막혔다. 그의 제수인 쩐레쑤언은 방송에 나와 “중놈이 한 일은 바비큐가 된 것 뿐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이는 미국의 정치인마져 경악하게 만들었다. 학생들과 불교도들의 시위는 계속됐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결국 존 F. 케네디는 일부 남베트남군 장성과 쿠데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과거 미국은 이란의 모사데그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그 외에도 여러번 레짐 체인지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미국의 레짐 체인지 사례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도자 제거라는 성격을 많이 가졌지만, 응오딘지엠의 사례는 “이 지도자가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이 공산화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쿠데타는 게시됐고,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총살된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자신의 베트남 전쟁 관련 자서전에서도 밝힌 일이지만, 케네디는 지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지엠 사후 몇일 만에 이러한 살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유지할 방안에 대해 계속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암살범에게 총에 맞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존 F. 케네디가 죽자 베트남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에게 이어졌고, 남베트남에는 16,000명 이상의 미군고문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의 상황은 점차 암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닐 시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다큐멘터리를 끝낸다. 

(추락한 헬기에서 뛰어 나오는 미군 병사)


(헬기 부대, 남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헬기를 투입했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미국인들이 역사에서 예외라고 생각했어요. 역사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우리에게 못 이기는 전쟁은 없으며, 나쁜 대의명분을 나타낼 수도 없다고 말이죠. 우린 미국인이었어요.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닌 게 증명됐죠.”


1부에 비해 2부는 미국 케네디 정부의 베트남 개입을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부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소개서에 가까웠다면, 2부는 이 다큐멘터리의 메인 주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베트남 전쟁의 초기 케네디 정부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1시간 30분 동안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베트남 정책이 민중을 무시하는 정책이었음을 다큐멘터리가 잘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케네디 사후 베트남 전쟁은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계승했다. 그러나 이는 암흑 터널로의 행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대베트남 정책은 실패했으며, 결국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다음에 3부 리뷰를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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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국민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자유민주주의 용사로 찬양하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본질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당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이 입증해주듯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에 따라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국가였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46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를 지원했고,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도 친일 경찰과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중을 탄압하는 이승만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패망한 일본을 제국주의자들을 앞세워 재건한 것도 미국이었으며, 프랑스가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위해 전쟁비용 80%를 대신 부담한 나라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의 과테말라 개입을 다룬 영어 서적)


미국의 중남미 지역 내정간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다. 니카라과, 칠레, 엘살바도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이티,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그레나다 등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굶주림과 독재정치, 학살, 빈곤,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말 그대로 미국의 중남미 통치는 대다수 중남미 민중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고 협박했다. 미국이 이러한 짓을 자행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s Company)와 같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마음껏 보장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과테말라 또한 미국에 의해서 주권과 인권 그리고 권리가 무참히 짓밟혔으며, 미국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일 것이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진성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이유를 들어 무수히 많은 나라의 주권을 침해했었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이 후원했던 유비코 정권이 종결되고, 새로운 내각이 등장했다. 유비코 정권은 14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독재정치를 자행하다가, 전국적인 시위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당시 미국이 후원한 유비코 정권 하에서의 삶은 아주 열악했다. 전 국민의 2%가 과테말라 전체 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국민의 50%는 전체 토지의 3%를 경작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원주민들의 경우 50센트도 안되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사진, 그는 아레발로 정권을 이어 과테말라를 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던 1950년 과테말라 국민은 38세의 젊은 대통령인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르벤스는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를 개선하여 인민위 권익을 성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실 유비코 정권 이후 집권한 아레발로도 개혁을 실행했지만, 아르벤스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르벤스는  법령 900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크고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중 90% 이상이 놀리는 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연설하고 있는 아르벤스 대통령)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됐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으며,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브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트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출처: 워싱턴 불렛 p.88~89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원을 받앗던 인물)의 용변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미국이 과테말라 체제 전복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용하는 정권 교체 매뉴얼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여론’을 공작하라

2. 현지에 적임자를 임명하라

3. 군 장성을 준비해라

4.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라

5.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라

6.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

7. 청신호

8. 암살 연구

9. 부인하라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의 지원한 과테말라 군부 쿠데타를 표현한 풍자화)


(과테말라 독재자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놀랍게도 아르벤스의 발언은 현실이 됐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송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출처: 워싱턴 불렛 p.117~118

(과테말라에서 자행된 학살을 표기한 지도)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서 발견된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과테말라가 공산 제국주의에서 구원됐으며, 이는 미주 국가들의 위대한 전통에 영광스러운 새 장을 추가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덜레스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정치공작과 독재정치 수립을 이러한 방법으로 옹호하고 미화했다. 과테말라 정부 전복작전에 참여했던 한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이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미국)의 성공은 결국 31년간의 억압적인 군부 통치와 과테말라인 10만여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1


놀랍게도 당시 과테말라 정부 전복애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1961년 존 F. 케네디가 주도했던 피그스만 침공작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맞서 진보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하코보 아르벤스는 사임하면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피로 얼룩진 과테말라의 파시스트 독재는 40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사건 당시 이를 직접 두눈으로 지켜본 젊은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행객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군이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결국 그는 혁명에서는 무장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몇 년 뒤 이를 실천하게 됐다. 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쿠바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다(Che Guevara).


참고문헌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것』, 한울, 1997


노엄 촘스키, 황의방, 『패권인가 생존인가』, 까치, 2004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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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강철비 2: 정상회담>을 보면미국과 일본이 한 팀이 되어 중국과 대립하려는 구도로 나온다영화상에서 일본의 정치계를 사실상 사로잡고 있는 모리 신죠라는 한 인물이 나온다그는 일본 내 극우 단체의 물질적 지주 역할을 하는 야마토 재단의 총수로 아베 신죠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모리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정의의 대동아 전쟁이라고 믿으며 원자폭탄 투하를 얘기하며전형적인 일본의 역사왜곡 인식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그는 어제 죽은 아베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일본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도 작중에서 비추어 진다.

(욱일기와 성조기를 같이 들고 있는 일본 자위대)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패망시킨 나라가 미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일본의 침략을 무찌르고, 1945년 8월 원자폭탄을 투하하여일본을 항복시켰다는 것이다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기여한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실제로 일본 대본영이 1945년 8월에 조기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 때문이었다소련의 진격을 워낙 신속했고일본의 저항의지를 완벽히 꺾었다대다수 일본 제국의 전쟁광들은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미국과 함께하는 일본 자위대 행사)

 

물론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일본의 신속한 항복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태평양 전쟁 당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다카날 전투펠렐리우 섬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 등 미국의 전쟁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조기 항복한 이후미국은 일본을 점령했다일본 본토에 미군이 주둔했으며더글라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GHQ가 창설됐다이후엔 도쿄 군사재판도 열고 일부 전범들이 처벌받기도 했으나대다수 전범들은 살아남았다. 731 부대로 유명한 이시이 시로 같은 전쟁범죄자들이 맥아더와 결탁하여 살아남았다.

(욱일기를 바탕으로 서서 웃고 있는 미군 병사)

 

미국은 1946년과 1947, 1949, 1952년에 치러진 조기 선거를 지도했다맥아더가 통치하는 미점령군은 극우 세력(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민주당)이 연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대적하도록 만들었고, CIA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민주당과 자유당이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이 민주자유당이 바로 1955년 일본의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된 것이다당시 민자당에는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결집했다하토야마 이치로나 기시 노부스케 등이 바로 그들이며일본 극우 CIA요원 고다마 요시오를 포함하여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친미주의자들로 변모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미군 마크)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일본은 미국의 전쟁물자 보급기지 및 수리기지로 변모했다이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에도 성공하여세계적으로 막강한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일본의 자유민주당은 친미외교노선을 추구하며냉전시기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는데 주력했으며이러한 기조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분명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렸지만그 일본제국주의적 잔재를 가지고 반공국가 일본을 만든 것 역시 미국이었다따라서 미국과 일본은 한패며현재 일본의 극우들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한국 극우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암살 당한 아베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일본 제국주의자 아베가 미일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며일본의 과거사를 부정하며 한국과 북한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미국 제국주의가 아베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미제국주의는 아베 신죠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극구부정하는 정권이어도 일단 친미주의만 한다면 받아들인다미국의 부시 정부와 버락 오바마 정부 그리고 조 바이든 정부까지 이들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사이가 좋았고한일관계에 있어서 항상 일본편에 섰었다.

(주일미군 해군 마크)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얘기할 때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을 지적한다그러나 이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 731일 부대와 같은 제국주의적 범죄를 부정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고세력이 견고한 이유에는 자신들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외면하고 있다또한 이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항상 외면받는다.

 

한국 사회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지만이제는 본질을 알아야할 때다한국의 반공주의도 일본의 반공주의 및 제국주의도 사실 따지고 보면 미제국주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이번에 아베 신죠가 일본의 한 극우주의자에게 사망하자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하여미국 및 서구 세계의 언론들은 아베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다일본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아베를 마치 민주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다왜 그러겠는가이것은 결국 미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공주의 친미주의의 문제가 아니겠는가이런 점에서 아베의 죽음은 미제국주의의 추악한 민낯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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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8-0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미국은 대통령이 공화당(리차드 닉슨, 로날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 도날드 트럼프 등)이건 민주당(죤 F. 케네디, 린든 B. 죤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이건 항상 한일갈등에서 일본 편을 들어왔죠.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미국은 항상 영국 편을 들고, 영국 중심의 유럽정책을 편다. 중동에서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고, 친이스라엘적인 중동정책을 편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항상 일본 편을 들고, 동북아 패권정책에서 일본 중심적인 정책을 편다‘!

게다가 앞서 설명하신 것처럼, 악랄한 전쟁범죄를 자행하고도 하나도 반성하지 않는 사악한 국가 일본이 국제제재를 받고 매장되기는 커녕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아시아 유일 선진국‘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패권국가들이 일본을 지원하고 있음에 있다는 것도 알면 좋습니다.

역시 미국이나 일본놈들이나 우리 민족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 패권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똑같군요!